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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건축을 배워온 김중업...영화인 이지룡과 신영균

지승룡 작가 | 기사입력 2024/06/29 [15:04]

▲필자/지승룡 작가.  ©브레이크뉴스

나는 어린 시절 부산국세청으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 몇 년 살았다. 당시 서른 즈음인 부모님은 남포동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셨고 특히 어머니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 나를 업고 극장에 가셨다. 컴컴한 광장 같은 곳에서 업혀있는 나는 여기 저기 부딪혔던 기억이 난다. 광복동 남포동이 지금도 낯설지 않은 이유다.

 

시인(詩人)이기도 했던 김중업 건축가는 25살인 1947년에 서울대 건축공학과 조교수가 된다. 그는 6.25이후 부산에 온 문화예술인들과 남포동에서 새로운 벗들 뜻이 맞는 동지를 많이 만났다. 전쟁은 그에게 우정과 타 분야와 건축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건축을 휴머니즘으로 풀어내는 김중업의 생각은 청년인 문화 예술인들에게 호기심이 되었고 김중업을 통해 거처하는 곳들이 좋아지는데 도움을 받았다.

 

이런 인연과 덕을 쌓은 김중업에게 부산에 있는 지인들은 김중업의 꿈을 위해 돈을 모아주었고 이 돈으로 김중업은 1952년 9월  베네치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참석했고 3개월을 체류할 수 있었다.

 

김중업은 한국을 대표해 그곳 강단에 섰다. 이 회의에 참석한 세계적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는 김중업의 강의에 좋은 느낌을 받고 김중업에게 질문을 한다. 당신은 시인인가? 건축가인가? 김중업은 시인이고 동시에 건축가라고 답했다. 운명처럼 김중업이 남긴 훗날 건축은 詩처럼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었다.

 

김중업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르 코르뷔지에’에게  함께 일하며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에 있는 건축물을 답사 후 김중업은 바로 파리에 있는 ‘르 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 찾아가 3년 2개월간 수학한다. 수학을 마치고 김중업은  17개국을 다니며 유명건축물 조사를 했고 1956년 2월에 귀국했다.

 

전후 새로운 건물, 의미 있는 건물을 짓고자 하는 수요층이 있었다. 그런 소비자에게 김중업의 설계는 섭외 0순위였다. 34살 김중업은 첫 작품으로 건국대 도서관(현 언어교육원)을 설계했고 이어 다음 해인 1957년에는 첫 상업건물인  명보극장을 설계했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교시설과 학교 주변이 맘에 안 들어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다. 이런 혼돈의 시간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담임인 영어 교사였다. 선생님은 영어를 배운 이유가 영화를 보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사전이 중요하다고 하며 늘 외우라고 강조하시더니 사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영화라고 하시며 자신은 사전을 팔아서 외화를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시절은 영화가 지나면 다시 상영이 없고 필름에 소나기가 내리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영화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영어 수업을 넘어 영화감상회 같았다. 다행히 학교는 대한극장 등 영화단체관람을 자주 해주었고 그런 즐거움이 있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다시 서울로 복귀해서 명동에 있는 남대문 세무서에서 근무하셨고 아버지사무실에 들르면 용돈을 주셔서 중앙극장 명보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명보극장은 1957년 8월26일 1234석 규모로 개관했다. 대한극장보다는 스크린은 작았지면 대한극장과 함께 70mm 영사기를 갖추고 있었다. 명보극장의 역사를 살펴본다.

 

영화광 이지룡을 소환한다.

 

함흥출신 영화광인 이지룡에 의해서 명보극장이 시작되었다. 이지룡은 지인들을 설득해 돈을 모아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명성극장으로 이름을 지었지만 나중에 자신의 고향, 함흥에 있던 명보극장을 떠올리며 명보극장으로 변경한다.

 

그는 함흥에서 함산금융조합에서 일했고 장사를 시작하다 서울로 왔다. 전쟁이후  부산에서 창고업과 함흥냉면집을 했다. 전후 서울로 올라와 건설업에 종사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 외화 수입을 하는 친척 이희극(수도극장 부사장)의 사무실을 자주 다니며 날씨와 관계없이 극장에 모이는 것을 관객을 보며 영화관 사업에 눈을 뜬다.

 

이지룡은 삼양물산을 투자사로 유치하고 친구인 양봉식(연방영화사 부사장)과 합심해 수도극장 맞은편 332평의 소유주 17명을 설득해 부동산을 매입하였고 고향 선배인 서울시 도시계획 위원장에게 추천받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건축가 김중업에게 설계를 맡겼다.

 

그러나 대형 영화관을 건설하다가  자금 부족으로 공사가 멈추게 된다. 29살 이지룡은 충무로에 있던 박산부인과 원장을 통해서 대림산업을 소개받는다. 대림산업 이석구와 이재준에게 극장사업의 전망에 대해 피력하고 투자를 받고 이익을 대림 6대 이지룡 4의 조건으로 합의하고 극장을 마무리했다.

 

이후 극장 경영의 어려움과 영화관 주변 유지광과 이화룡의 싸움이 언론에 보도되자  대주주 대림산업 이재준은 관리사장 양봉식을 해고하고 이지룡과 삼양물산을 극장에서 손을 떼게 한다. 결국 이지룡은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한 채 명보극장을 나와야했다.

 

이지룡이 그만두고 난 뒤 대림산업은 극장 공사비 허위신고와 입장세 포탈 혐의로 물의를 일으켰다. 억울하게 퇴출당한 이지룡은 주식을 찾을 수 있다는 변호사의 말에 대림산업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지만 5.16이 일어나 포기하게 된다. 이지룡의 명보극장 이야기는 “…그래가 재수가 없었지”라고 담담하게 끝이 났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 이지룡이 조금 비전을 줄이고 계약서를 깊이 살펴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지룡은 영화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6년 아세아영화사를 설립한다. 홍콩과의 합작영화도 7편이나 제작했고, 그 유명한 정창화 감독을 홍콩영화계로 진출시킨다. “정창화 감독이 액션영화를 만들자고 했지 내가 이긴 적이 없지, 밀어줘야지” 하며 정 감독이 홍콩에 가서 홍콩 영화를 한 단계 업 시켰다.

 

즉 홍콩 영화를 우리가 한 때 수입하며 누렸지만 홍콩영화는 정창화 감독에 의해 성장한 것이었다. 이지룡은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순간은 영원히’ ‘20인의 여도적’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을 1992년 은퇴한다.

 

신영균의 명보극장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명보극장의 탄생을 하게 한 이지룡 영화인을 짧게라도 이렇게 기록해둔다.

 

대림기업 명보 극장을 운영하다.

 

명보극장의 시공사는 대림산업이었다. 대림은 1953년 이후 사업 확장을 하며 1954년 1월에 서울부동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곧이어 서소공동에 서울증권주식회사를 차리며 증권업에 진출했다. 1955년에도 건설회사인 금강산업주식회사의 주식을 대량 매입했고  서울시민들의 유일한 오락장이며 휴식공간인 극장이 부족한 것을 알고 극장건설에 관심을 갖게 된다.

 

대림은 이지룡이 만든 명보극장에 3000만환을 투입해 중구 초동 18-5번지에 부지를 더 마련하여 극장을 완성했다. 대림은 1966년 말까지 명보극장을 운영했다. 이재준의 형은 국회의장이었던 이재형과는 달리 군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한성정미소'를 설립해 사업을 일찍 시작했다.

 

1939년에는 대림그룹의 모태 '부림상회'를 세워 건설자재사업을 시작하고 1947년 6월부터 '대림산업'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후 대림산업은 국내 굴지의 건설업체로 성장을 했고  1977년에는  '대림공업전문학교'를 세웠다. 이어서1980년에는 기아기연을 인수해  오토바이 전문 메이커 대림자동차로 키워냈다.

 

1977년에는 영화배우 신영균이 명보극장을 인수한다.

 

신영균은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 후 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하여 연극공연을 했다. 1953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해군 중위(군 의무장교)로 임관했고 1958년 대위로 전역한다.

 

신영균은 29세 때 7세 연하인 이대 정외과 학생 김선희와 결혼했고, 치과의사 면허자격을 딴 뒤 1958년 명동 건너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열었다.

 

연극을 했던 인연으로 친분 있는 연극인들이 찾아 왔고 허장강 등이 연극을 하자는 권유를 하여 ‘여인천하’에서 조광조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다.

 

영화 ‘과부’의 주인공을 물색하던 조긍하 감독이 이 무대를 보게 되고 영화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하게 된다. 1960년, 조긍하 영화감독의 제안으로 32세에 영화 ‘과부’에서 머슴 '성칠이'역을 맡았다. ‘마부’는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961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신영균은 1962년에는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고등학교시절부터 시작한 연극이 바탕이 되었다. 1964년에는 ‘빨간 마후라’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국제 배우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1978년 은퇴하기까지 294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1960~70년대 톱스타였다.

 

지금 한국 연예인가운데 가장 큰 부자인 신영균도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늘 불안하게 여기고 1963년 서울 금호동에 있던 재 개봉관  ‘금호극장’을 인수했고 이후 명보극장 옆에 있는 명보제과를 인수하여  부인 김선희씨가 직접 사업을 키워 나갔다. 이후 태극당 풍년제과 등을 인수하였고 1971년에는 볼링장을 인수하였고, 1973년에는 빌딩관리업체인 '한주흥산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부동산임대사업을 했다.

 

1977년 8월에는 명보극장을 7억 5천만 원에 매입을 하고 ‘지옥의 묵시록’ ‘빠삐용’ 등의 외화와 ’별들의 고향 2‘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영화를 배급·상영하여 큰 성공을 했다.

 

명보극장은 성춘향, 폭군 연산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등의 영화를 개봉하면서 1993년까지 건물의 옛 원형이 유지하다가  이 자리에는 한국 최초 다섯 개의 상영관이 있는 멀티플랙스 ‘명보 프라자’가 지어진다. 명보 프라자는 김중업 건축가로부터 사사 받은 김석철이 설계했고 명보 프라자는 1995년 한국건축가협회상 본상을 수상했다.

 

1957년 8월26을 문을 연 명보극장의 개봉작은?

 

1956년 제작된 상류사회였다. 찰스 월터스 감독의 상류사회(원제:High Society)는 재혼하려는 신부와 재혼을 방해 하려는 전 남편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재즈의 선율과 함께 로맨틱하게 그려진다.

 

빙 크로스비, 그레이스 켈리가 주인공이고 조연으로 프랭크 시나트라, 셀레스트 홈, 루이 암스트롱 등이 나온다.

 

트레이시<그레이스 켈리 분>는 전 남편 덱스터<빙 크로스비분>는 주변배경과 지식이 우수해 외교관 등 멋진 직업을 가질 수 있었으나 그의 현실은 겨우 딴따라였다. 이에 못마땅한 트레이시는 믿음이 가는 조지(존 런드)와 재혼하기로 결심을 한다.

 

결혼식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 마이크<프랭크 시나트라분>도 온다. 그러나 트레이시를 여전히 사랑하는 덱스터는 재즈 뮤지션들을 이용해 공연을 보여주며 트레이시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한다. 트레이시는 자신의 인생을 망쳤으면 됐지 텍스터가 재혼까지 방해한다고 신경질을 낸다.

 

딸과 소원했던 아빠도 오고 결혼 하객들이 도착하고 춤판이 벌어진다. 트레이시는 마이크가 부르는 노래에 빠져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 몸을 못가누는 트레이시를 염려한 재혼 예정자에게 미이크는 아무 일 없었다고 하며 키스를 두 번 했다고 한다. 트레이스는   오히려 화가 난 목소리로 마이크에게 묻는다. 키스 두 번 한 것이 다냐고 따진다.

 

“왜요? 내가 매력이 없어서. 차갑고 냉정하고 무서워서?” 그 마이크는 “당신은 매력 있고 차갑거나 무섭지 않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나의 예의였다.” 소중한 정조를 지킨 것이 내 의지가 아니라 그의 예의 바른 행동 때문이었다고 트레이시는 마이크를 칭찬한다.

 

그리고 조지에게 그것에 좌우지 되면 결혼하기 싫다고 파혼을 선언한다. 결혼선물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돛단배를 선물했던 덱스터는  트레이시의 마음을 사로잡고 두 사람은 결혼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식장으로 들어간다.

 

3류 잡지기자 마이크는 회사를 그만두고 동료 사진기자와 사랑이 빠진다. 루이 암스트롱은 트럼펫을 힘차게 불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맘마미아가 영화상류사회 스토리를 따온 것 같은 느낌이다.

 

상류사회는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이 영화의 메시지다. 특히 그리스 왕비가 되기 전 그레이스 켈리의 마지막 영화이었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았다. 그레이스 켈리가 이 영화를 끝으로 은퇴를 하고 모나코 왕비가 되었고 52살 운전 중 뇌출혈로 낭떠러지에 떨어져 사망했기에 이 작품을  아련하게 기억한다.

 

사람들은 왜 영화를 볼까?

 

책에서는 동화가 있지만 현실에서는 동화가 없다. 그런데  한 끼 밥값이면 좋은 시설에서 영화를 보며 주인공과 일체감을 느끼며 꿈을 꾸고 주인공이 겪는 고난을 자신과 대비하며 위로받지 않았을까? 스트레스도 풀고 호기심도 챙기며 연인과 더 가까워지며 친구와 우정을 깊게 하는데 영화가 역시 가성비 갑이다.

 

비싼 지불을 하며 사는 우리들  지금의 권력은 고객만족도 별이 몇 개일까?

 

*필자/지승룡, 작가. 목사. 민들레영토 대표.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Kim Chung-up studied architecture in Paris...filmmakers Lee Ji-ryong and Shin Young-gyun

-Writer Ji Seung-ryong

 

When I was young, I lived in Busan for several years with my father, who was assigned to the Busan National Tax Service. My parents, who were around 30 at the time, went on a date at a theater in Nampo-dong, and her mother especially loved watching movies, so she carried me to the theater on her back. I remember bumping into various places while being carried on my back in a dark square-like place. This is why Gwangbok-dong and Nampo-dong are still familiar to this day.

Architect Kim Chung-up, who was also a poet, became an assistant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Architectural Engineering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in 1947 at the age of 25. He met many new friends and like-minded comrades in Nampo-dong with cultural artists who came to Busan after the Korean War. The war became an opportunity for him to meet friendship, other fields, and architecture. Kim Chung-up's idea of ​​interpreting architecture through humanism became a curiosity among young cultural artists, and he was helped to improve the places where he lived through Kim Chung-up.

Kim Chung-up's acquaintances in Busan raised money for his dream, and with this money, Kim Chung-up attended the 1st World Artists' Conference hosted by UNESCO held in Venice in September 1952 and stayed there for three months. I was able to.

Kim Chung-up stood at the podium there representing Korea. Le Corbusier, a world-renowned architect who attended this meeting, felt good about Kim Chung-up’s lecture and asked Kim Chung-up a question. Are you a poet? Are you an architect? Kim Chung-up answered that he was a poet and an architect at the same time. As fate would have it, the later architecture that Kim Chung-up left behind inspired people like poetry.

Kim Chung-up did not miss the opportunity and said that he wanted to work and learn from ‘Le Corbusier’. After visiting the buildings in Italy, Kim Chung-up immediately went to ‘Le Corbusier Architectural Office’ in Paris to study for 3 years and 2 months. After completing his studies, Kim Chung-up traveled to 17 countries to survey famous buildings and returned to Korea in February 1956.

After the war, there was a demand for new, meaningful buildings. For such consumers, Kim Chung-up's design was ranked 0th in public relations. 34-year-old Kim Chung-up designed the Konkuk University Library (now the Language Education Center) as his first work, and the following year, 1957, he designed the Myeongbo Theater, his first commercial building.

As soon as I entered middle school, I tried to quit school because I didn't like the school facilities and surroundings. The person who was able to continue attending school during these chaotic times was my homeroom English teacher. The teacher said that the reason I learned English was to watch movies.

He said that a dictionary is important and always emphasized that I should memorize it. He also said that there is something more important than a dictionary and it is movies, and that he sold dictionaries so he did not miss out on foreign films. In those days, after a movie, there was no screening again and it was raining on the film. The teacher often told movie stories during class. It was more like a movie watching party than an English class. Fortunately, my school often organized movie group viewings at the Daehan Theater, and I was able to continue attending school because of that enjoyment.

When he was in middle school, his father moved back to Seoul and worked at the Namdaemun Tax Office in Myeong-dong, and when he stopped by his father's office, he would give him pocket money to watch movies at the Myeongbo Central Theater.

Myeongbo Theater opened on August 26, 1957 with 1,234 seats. Although the screen was smaller than the Daehan Theater, it was equipped with a 70mm projector along with the Daehan Theater. Let’s take a look at the history of Myeongbo Theater.

Summoning movie buff Lee Ji-ryong.

Myeongbo Theater was started by Lee Ji-ryong, a film enthusiast from Hamheung. Lee Ji-ryong persuaded his acquaintances to raise money and began purchasing land. At first, the name was Myeongseong Theater, but it was later changed to Myeongbo Theater, remembering the Myeongbo Theater in Hamheung, his hometown.

He worked at Hamsan Financial Association in Hamheung and started a business before moving to Seoul. After the war he worked in a warehouse business in Busan and a Hamheung naengmyeon restaurant. After the war, he moved to Seoul and worked in the construction industry, but when he felt that he was doing a job that was not suited to his aptitude, he often visited the office of his relative Lee Hee-geuk (Vice President of Sudo Theater), who imported foreign currency, and saw the audience gathering at the theater regardless of the weather, which led to his interest in the movie theater business. pops up.

Lee Ji-ryong attracted Samyang C&T as an investment company, worked together with his friend Yang Bong-sik (Vice President of the Federal Film Company), persuaded 17 owners of 332 pyeong across from the Capital Theater to purchase real estate, and studied abroad in France after being recommended by his senior from his hometown, the Seoul City Planning Chairman. The design was entrusted to architect Kim Jung-up, who returned from the project.

However, while he was building a large movie theater, construction stopped due to lack of funds. Ji-Ryong Lee, 29, was introduced to Daelim Industrial through the director of Parksan Gynecology in Chungmuro. He expressed the prospects of the theater business to Daelim Industrial's Lee Seok-gu and Lee Jae-jun, agreed on the terms of receiving investment and profits from Daelim 6th and Lee Ji-ryong 4, and finished the theater.

Afterwards, as the difficulties in theater management and the fight between Yoo Ji-gwang and Lee Hwa-ryong around the movie theater were reported in the media, majority shareholder Daelim Industrial's Lee Jae-jun fired management president Yang Bong-sik and forced Lee Ji-ryong and Samyang C&T to withdraw from the theater. In the end, Lee Ji-ryong had to leave the Myeongbo Theater without even recovering his investment.

After Lee Ji-ryong quit, Daelim Industrial caused controversy on charges of falsely reporting theater construction costs and evading admission taxes. Lee Ji-ryong, who was unfairly expelled, prepares a lawsuit against Daelim Industrial after his lawyer tells him that his stocks can be recovered, but he gives up after the May 16 incident. The story of Lee Ji-ryong’s Myeongbo Theater is “… It ended calmly, “Yes, it was unlucky.” As the saying goes, “the more you hurry, the more you go back,” so it would have been nice if Lee Ji-ryong had reduced his vision a little and looked deeper into the contract.

However, Ji-Ryong Lee did not give up on his film business. In 1966, he founded Asia Film Company. He also produced seven joint films with Hong Kong, and helped the famous director Chung Chang-hwa advance into the Hong Kong film industry. “Director Chung Chang-hwa asked me to make an action movie, and I have never won, so I need to push him,” said Director Chung, who went to Hong Kong and took Hong Kong movies to the next level.

In other words, we once enjoyed Hong Kong movies by importing them, but Hong Kong movies grew under director Chung Chang-hwa. Lee Ji-ryong retired in 1992 after working on ‘Sunset on the Sarvin River’, ‘The Moment is Forever’, ‘20 Female Thieves’, ‘Juria and Tokugawa Ieyasu’, and ‘Falling Things Have Wings’.

We will not only remember Shin Young-kyun's Myeongbo Theater, but we will also briefly record Lee Ji-ryong, the filmmaker who gave birth to Myeongbo Theater.

He runs Daelim Enterprise Myeongbo Theater.

The construction company of Myeongbo Theater was Daelim Industrial. Daelim expanded its business after 1953, establishing Seoul Real Estate Co., Ltd. in January 1954, and soon thereafter entered the securities industry by establishing Seoul Securities Co., Ltd. in Seosogong-dong. In 1955, he purchased a large amount of stock in Geumgang Industrial Co., Ltd., a construction company, and became interested in theater construction after realizing that there was a shortage of theaters, the only entertainment and relaxation space for Seoul citizens.

Daelim invested 30 million won into the Myeongbo Theater created by Lee Ji-ryong and completed the theater by acquiring additional land at 18-5, Cho-dong, Jung-gu. Daelim operated the Myeongbo Theater until the end of 1966. Unlike Lee Jae-hyung, who was the Speaker of the National Assembly, Lee Jae-jun's older brother started his business early by establishing 'Hanseong Jeongmiso' after graduating from Gunpo Public Elementary School.

In 1939, the founder of Daelim Group, 'Bulim Sanghoe', was established to start the construction materials business, and in June 1947, the name was changed to 'Daelim Industrial'. Afterwards, Daelim Industrial grew into one of Korea's leading construction companies, and established 'Daelim Industrial College' in 1977. Subsequently, in 1980, it acquired Kia Motors and developed it into Daelim Motors, a specialized motorcycle manufacturer.

In 1977, actor Shin Young-gyun took over Myeongbo Theater.

After Shin Young-gyun entered Seoul National University's College of Dentistry, he founded the student council's theater department and performed plays. He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in 1953, was commissioned as a Navy lieutenant (military medical officer), and was discharged with the rank of captain in 1958.

At the age of 29, Shin Young-gyun married Kim Seon-hee, a student of political science at Ewha Womans University who was seven years his junior, and after obtaining a dentist's license, he opened ‘Dongnam Dental Clinic’ in Hoehyeon-dong, across from Myeong-dong, in 1958.

He was visited by theater people he was familiar with because he had acted in plays, and Heo Jang-gang and others encouraged him to do plays, so he took on the role of Jo Gwang-jo in ‘Women in the World’ and went on stage.

Director Jo Geung-ha, who was looking for the main character for the movie ‘Widow’, saw this performance and actively encouraged her to enter the film industry. In 1960, at the age of 32, at the suggestion of film director Jo Geung-ha, she played the role of Seongchil, a servant, in the film ‘Widow’. ‘The Coachman’ was the first film in Korean film history to win a special award at the 1961 Berlin Film Festival.

Shin Young-gyun established himself as a talented actor by winning the 1st Grand Bell Award for Best Actor for ‘Yeonsan-gun’ in 1962. It was based on a play he had started in high school. In 1964, he received the Best Actor Award at the Asian Film Festival for ‘Red Mahura’, giving people the impression that he was an international actor. He was a top star in the 1960s and 1970s, appearing in 294 films until his retirement in 1978.

Shin Young-gyun, who is now the richest Korean celebrity, was always anxious about the job of a movie actor, and in 1963, he acquired the re-release theater 'Geumho Theater' in Geumho-dong, Seoul, and later acquired Myungbo Confectionery next to Myeongbo Theater, and his wife, Kim Seon-hee, personally opened the movie theater. The business grew. Afterwards, he acquired Taegeukdang Poongnyeon Confectionery, etc., and in 1971, he acquired a bowling alley. In 1973, he established 'Hanju Heungsan Co., Ltd.', a building management company, and engaged in the real estate rental business.

In August 1977, it purchased the Myeongbo Theater for 750 million won and achieved great success by distributing and screening foreign films such as ‘Apocalypse Now’ and ‘Papillon’ as well as films such as ‘Hometown of the Stars 2’ and ‘Even If I Hate You Again’. did it

Myeongbo Theater maintained its original form until 1993, when films such as Seong Chun-hyang, Tyrant Yeonsangun, Sarangbang Guest and Mother, and Evergreen were released, and then Korea’s first multiplex ‘Myeongbo Plaza’ with five theaters was built in its place. Myeongbo Plaza was designed by Kim Seok-cheol, who studied under architect Kim Chung-up, and Myeongbo Plaza won the main prize at the 1995 Korean Institute of Architects Award.

What film was released at Myeongbo Theater, which opened on August 26, 1957?

It was High Society, produced in 1956. High Society (original title: High Society), directed by Charles Walters, is a romantic story of a bride who wants to remarry and her ex-husband who tries to prevent her from remarrying, with beautiful jazz melodies.

Bing Crosby and Grace Kelly are the main characters, and supporting roles include Frank Sinatra, Celeste Holm, and Louis Armstrong.

Tracy (played by Grace Kelly)'s ex-husband Dexter (played by Bing Crosby) had an excellent background and knowledge, so he was able to have a great job, such as a diplomat, but his reality was barely different. Tracy, dissatisfied with this, decides to remarry her trusted friend, George (John Lund).

Reporter Mike <Frank Sinatra> also comes to cover her wedding. However, Dexter, who still loves Tracy, tries to win Tracy's heart by using his jazz musicians to put on a show for her. Tracy gets on her nerves, saying that Textor is preventing her from remarrying.

Her daughter's estranged father also arrives, wedding guests arrive, and a dance breaks out. Tracy fell asleep after drinking her drink while listening to Mike's song. Miike's prospective remarriage, who was concerned about Tracy's inability to control her body, told her that nothing had happened and that he kissed her twice. Trace asks Mike in a rather angry voice. She asks if two kisses are all it takes.

"why? Because I’m not attractive. “Because you’re cold, callous, and scared?” The microphone said, “You are charming and not cold or scary. “It was the bare minimum I could show courtesy to someone who was drunk and passed out.” Tracy praises Mike, saying that it was his polite behavior, not my will, that kept my precious chastity.

She tells George that if she gets swayed by it, she doesn't want to get married and she breaks off the engagement. Dexter, who gave her a sailboat called ‘True Love’ as a wedding gift, captures Tracy’s heart and the two enter the ceremony hall with the wedding march playing.

Mike, a third-rate magazine reporter, quits his job and falls in love with his fellow photojournalist. Louis Armstrong blows her trumpet loudly and the story ends here. It feels like Mamma Mia is based on the movie High Society story.

The message of the movie is that high society is about true love. In particular, people's interest was high because it was Grace Kelly's last film before becoming Queen of Greece. Grace Kelly retired after this film and became Queen of Monaco. She remembers this work fondly because she died after falling off a cliff from a cerebral hemorrhage while driving at the age of 52.

Why do people watch movies?

There are fairy tales in books, but there are no fairy tales in reality. But wouldn't you have been comforted by watching a movie in a good facility for the price of a meal, feeling one with the main character, dreaming, and comparing yourself to the hardships the main character goes through? Movies are great for relieving stress, sparking curiosity, getting closer to your partner, and deepening your friendships.

How many stars does the current power have in terms of customer satisfaction, as we pay high prices?

*Author/Ji Seung-ryong, writer. minister. Representative of Dandelion Terri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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