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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탄생 그리고 위기의 한글 [1]

박경범 소설가 | 기사입력 2025/04/19 [00:17]

 

▲필자/ 박경범 소설가.     ©브레이크뉴스

600년 전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열고자 모든 백성이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훈민정음을 연구한 신미대사의 뜻은 오늘날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 우리 현시대의 이념갈등 중에서 불교와 한글이 가진 의미 -

 

한글은 정녕 위기인가

 

고려의 백성에 여진과 왜의 귀화자를 통합해 아우르는 새 나라를 다스릴 소리글자가 필요했던 세종대왕

한문과 이두를 계속 사용하며 군자의 나라를 지향하고자했던 유학자들

이들 사이에서 백성 모두가 부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게 하려는 신미대사의 뜻이 합하여 훈민정음은 탄생되었다.

오늘날 한글에서 그 뜻은 과연 지켜지고 있는가

 

연재를 시작하며

 

이 글의 중심내용은 신미대사와 세종대왕에 의한 훈민정음 창제비화를 담고 있다. 그 내용은 이미 신미대사와 훈민정음 창제, 해맞이, 2019로 출간된 바 있으나 여기의 연재소설은 해당 내용을 포함하여 현대배경을 덧씌운 액자소설이다. 소설의 주내용과 그 포장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는 알지 못하고 전체의 흐름이 얼마나 두서가 잘 짜여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해당 주제를 독자에게 충분히 전달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다 보니 생긴 결과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세상에 연재소설을 읽으며 다음 회를 궁금해하며 목빼고 기다리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 같다. 독자는 한 연재분을 그 나름으로 가볍게 읽고 한글에 관련해 그런 이야기도 가능하구나 생각할 기회가 되었다면 연재의 목적은 이룬 것이다. 전체의 구성이 얼마나 충실한지는 그다지 관심사가 되지 않을 것으로 믿고 감히 졸고(拙稿)를 내놓는 것이다.

2025.4.19. 朴京範

 

머리말

 

소설의 소재를 정한 다음 중요한 것은 내용에 담을 주제를 설정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공로가 위대함은 수없이 강조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업적을 향유하는 후손이 해야 할 일이 공로자의 찬양으로 충분할 것인가.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 중에 부처님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자는 없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 중에 예수님의 위대함을 부정하는 자는 없다. 다만 그 가르침의 취지를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가 신앙인의 건전성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공로가 위대함은 다들 인정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인이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었다.

신미스님의 한글창제비화에 더해 오늘날 우리 한국인이 당면한 언어문제를 화두로 삼으며 이에 연관된 이념문제까지 전개하니 유례가 드문 三重의 액자소설이 되었다. 소설이란 장르를 좀 더 우리현실에 친근하게 자리 잡고자 하는 희망과 어울린 결과였다.

오늘날 우리의 국어와 정치풍토를 보며 정말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리라는 문제의식이 있는 모든 독자와 함께하고 싶은 내용이다.

 

2019 저자 朴京範

 

차례

 1. 의문의 메모쪽지

2. 초대받지 않은 여자

3. 권력의 견제는 영성(靈性)으로

4. 한국인의 문자의식

━━ 5. 제왕의 상()을 가진 아이

6. 불교가 기른 민족혼

━━ 7. 불경을 백성 모두에게

━━ 8. 세종과 왕자들

━━ 9. 왕실에 충만한 불심

━━ 10. 불심의 전달자

━━ 11. 대장경을 갖다줘버리라니

━━ 12. 문수보살이 내린 지혜

━━ 13. 학문이 없는 세상

━━ 14. 무당이 본 미래의 환상

━━ 15. 군자의 의지는 생명

━━ 16. 소리글자인가 쉬운 글자인가

━━ 17. 우리말로 쓴 석보상절

━━ 18.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부처님 은혜

19. 퇴보된 한글

━━ 20. 복천암의 신미대사

━━ 21. 수양의 정변과 그 업보

━━ 22. 왕실 영륜(靈侖)의 변화

23. 오랜 윤생(輪生) 후에 얻은 미모

24. 문단 예외자 두 사람

25. 본분을 어기는 것은 만악(萬惡)의 근원

26. 선거구호 공일오비(空一五飛)

27. 관용(寬容)이 있는 사회

  

1. 의문의 메모쪽지

 

 

배신자를 처단해야겠다.”

조직에서 명령이 하달되었다. 행동요원 넷이 출동했다.

요원들은 처단될 자가 출근하러 나오길 밤에서 아침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나왔다. 그의 집은 평범한 아파트이지만 현직국회의원으로서 비서가 운전하는 차에 오르고 있었다.

요원들이 탄 차는 그 국회의원의 차를 쫓아갔다. 여의도로 가는 찻길은 이른 시간이라 이따금 한적한 구간도 있었다.

요원들의 차는 의원의 차를 앞질렀다. 그리고 멈춰서 의원의 차를 멈추도록 했다.

한 여름인데도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쓴 두 남자가 앞차에서 나왔다. 그리고 뒤차의 운전자 옆자리와 의원 옆자리에 앉았다.

국회로는 가지 말라. 마지막으로 들르고 싶은 곳을 가라.”

그들의 단호한 명령이었다. 의원은 그들을 모르지 않는 것 같았다. 당황한 운전석의 비서에게 의원은 그대로 따르라고 했다. 두 명이 남은 요원들의 차는 의원의 차를 뒤따라갔다.

이미 조직에서 살포한 비리의 소문으로 인해 의원은 정치생명이 끝나는 중이었다. 누구보다 깨끗한 정치를 표방해온 정치인에게 비리사실은 치명적이니 자연인으로서의 생명유지본능도 파괴직전이었다.

마지막 인사는 어디로 가야할까. 방금 자택을 나왔으니 모친에게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의원은 모친의 집으로 가라고 비서에게 지시했다.

모친의 아파트 십육층을 방문한 의원은 문안인사를 했다.

형찬아 바쁜데 아침에 왜 내게로 오냐. 난 걱정 말고 어서 가서 일이나 해라.”

어머니, 다시 먼 길을 가야겠습니다.”

의원은 그제 외국출장을 마치고 왔는데 다시 출장을 갈 것처럼 모친에게 전했다.

강형찬(康亨燦)의원은 사람들이 성씨를 같은 한글표기로 수효가 더 많은 씨로 오인하고 있지만 여간해서 자기의 진짜 성씨를 자필서명 등에서 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가 씨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그의 신상명세를 열람한 언론이 가끔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의원이라고 기사에 표기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우호적인 진보언론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고 보수언론에서만 있었던 일이었다.

모친은 구십세가 넘었다. 이승에 머물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을 수 있다. 어차피 이승에서 얼마안가 헤어질 운명인데 내가 먼저 가 있으면 곧 다시 만나겠지. 강형찬은 심중은 무슨 불안이나 누구를 향한 원망도 없이 의연했다.

문안을 마치고 모친의 집을 나섰다. 어떤 사태가 일어날 것은 짐작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지는 알지 못했다.

십팔층으로 가시오.”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요원들의 지시에 따라 형찬은 함께 십팔층으로 갔다.

여기 신발을 벗어놓고 다시 옥상으로 갑시다.”

그들의 지시가 심상치 않자 형찬은 멈칫했다. 그러자 그들은 순식간에 형찬을 붙잡아 입을 열고 굵은 주사바늘로 무슨 약물을 주입했다.

정신을 잃은 형찬을 하나가 업고 네 요원들은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문의 열쇠는 이미 조직에서 복사해주어 있었다.

옥상에서 네 사람은 각각 형찬의 양팔과 양다리를 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

그리고 형찬의 몸을 저 아래로 던졌다.

강형찬의원은 아파트에서 투신한 상태로 경비원에게 발견되었고 언론에서는 자살로 발표되었다.

이제 지도급인사로 자리잡아가는 거물 정치인이 많지도 않은 뇌물 때문에 자살한 것은 충격적 사건이었다. 여러 억측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수사기관에서는 강의원에 관하여 더 이상의 주변조사는 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배경을 밝히는 일은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가 아닌 다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두 달이 지나 구월이 되어 사회적 파문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에 강의원의 소속인 진보당에서는 강형찬의 어록을 모아 기념책자를 내기로 했다. 유족과 협의하여 강의원의 집을 방문해 어록을 위한 유품을 받아서 정리했다. 정치활동 관련 일기장은 물론이고 평소 가지고 다니며 메모하던 수첩들도 살폈다.

진보당의 젊은 남녀당원 김성환(金成煥)과 양성자(楊盛子)는 이 일에 참여했다. 둘은 서로 친할 만한 삼십이세 동갑내기였지만 양성자는 기혼자이고 미혼인 김성환은 함께하는 동지로서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두 사람은 강의원의 서재에서 강의원이 남긴 기록을 살피는 중에 의외의 한 메모쪽지를 발견했다.

 

……

홍인철이 나를 괴롭게 한다

……

 

이게 누구지.” 성자가 쪽지를 들어보이자

인터넷을 검색해보자.” 성환은 곧 스마트폰에서 검색했다.

홍인철을 검색창에 치니 소개가 나와 있었다. 성환은 몇 번 클릭하며 살펴보았다.

삼류작가로군.”

성환은 자기가 모르는 이름이 인터넷에 소설작가로 검색이 되니 얼른 그 신분을 단정했다.

그러나 그 인물이 강형찬에게 가진 의미는 삼류작가라는 직업명이 풍기는 가벼운 의미가 아니었다.

지난 시절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탄압의 시련을 받으면서도 한평생 깨끗한 진보정치인으로서의 소신을 지키며 올곧게만 살아왔던 강형찬 의원의 삶에 파란이 생긴 것은 재작년 홍인철(弘仁哲)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

동명이인일 수 있잖아.” 성자가 의문을 표하자

강선배의 사회망(社會網) 통신을 살펴보면 돼.”

성환은 답하고 강형찬의 명조망(鳴鳥網) 계정(計定)을 살펴봤다.

강형찬은 유명인사라서 다수의 추적자(追跡者 follower)가 있었으니 단지 홍인철이 강형찬을 추적한다고 해서 둘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성환 강형찬 스스로가 명조망에서 추적하는 사람들인 추적대상자(追跡對象者 following) 명단을 살펴봤다.

과연 그중에는 홍인철이 있었다. 그리고 홍인철의 초상(肖像)을 누르니 검색에서 보았던 사항과 자기소개가 일치했다.

맞아. 이제 홍인철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봐야겠어. 결과적으로 우리 강선배를 죽인 자가 아닌가 말야.”

성환은 분노에 섞인 말소리를 냈다.

우리는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는 동지인데 그런 정보기관원 같은 발설을 하면 안 되지. 복수는 우리의 할 일이 아니야.”

성자는 새로운 발견에 흥분하면서도 차분하게 성환을 타일렀다.

진보라고 복수하지 말란 법이 있나.”

진보는 사람들의 영혼이 성숙되었다고 믿는 데서 출발해. 성숙된 영혼이라는 것은 충분한 윤생(輪生)의 경험이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두 사람의 관계에서도 한사람이 가해자이고 한사람이 피해자라고해도 그것이 전생(前生)에 누적된 업보에 의한 필연적인 것이라고 인정하고 비록 가해자라고 해도 인간으로서의 새 삶의 기회를 얻도록 하고 있지. 그래서 사형제를 반대하는 거야. 아무리 극악한 범죄자라도 거기엔 피치 못할 업보의 근거가 있으리라는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보는 가치이지.”

그런데 성범죄에 관해서는 우리 진보 측에서 더욱 철저한 응징을 요구하지 않나.”

성자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 또한 최근 예체능계에서 선배들의 성폭행을 엄벌하고 가해자는 다시는 사회에 발을 딛지 못하게 하라는 성명에 동참한바 있었다.

이때 거실에서 미망인과 대화하다가 방에 들어와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간부당원 김규식(金規植)이 나서주었다. 그는 이제 사십세의 젊은 예비정치인으로서 진보당의 중요한 일에는 그의 손을 안거치는 것이 없었다. 이번 강형찬의원의 어록발간도 비록 중요한 당무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강형찬의원의 정치활동에 관한 총평을 당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발표함으로써 대중에게 진보당에 관한 인식을 바르게 하려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에 김규식은 당원들의 강형찬의원 자택방문을 인솔한 것이었다.

성자의 말도 옳고 성환이의 이의제기도 좋은 지적이야.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에는 대국적(大局的)이고 보편적인 가치가 있고 반면에 국지적(局地的)이고 특수한 가치가 있어. 양쪽의 가치가 상충할 때는 당연히 대국적인 가치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상식이고 또 궁극적으로는 그리해야 우리가 꿈꾸는 나라가 된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목적을 이루는 데는 순서가 있어. 우리의 가치를 펼치기 이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나라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일이야. 그래야 우리의 가치를 펼칠 수 있으니까.”

저희의 초기학습과정에서도 배웠던 것이 아닙니까.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첫 번째로 이룰 일은 자기가 속한 단체가 교섭권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고.”

먼저 의문을 제기했던 성환은 선배의 지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렇지. 그런데 그 선행되는 과정을 단지 필요악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가치의 유연성으로 보아야 할 거야. 미투운동에서 드러나는 성폭행의 범법자들은 사회 도처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로서 남성우위의 가부장적 사상이 잔존한 것이 범죄의 원인이기도 하지.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사회에서 퇴출함은 사회의 진보를 이루는 과정이기에 우리는 결코 그들에게 용서의 이름으로 범죄이전의 위상을 회복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사회의 말단계층에 불과한 자들이 서로의 업보의 결과로 저지르게 된 범죄를 용서하고 다시 사회로 복귀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 진보의 가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 미투의 성범죄자들에게는 목적을 향하여 가는 특수상황에서 필요한 가치판단의 유연함이 적용될 필요가 있지.”

하지만 진보사회에서 성범죄단죄의 엄격함은 비단 지도층에 적용된 것이 아니지 않나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 이미 진입했다면 남녀간의 문제에도 진보의 가치를 살려 용서와 화해를 권면(勸勉)하면서 모두가 행복한 세상으로 함께 가자고 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그럴 수가 없지. 일반대중이라 하더라도 남성의 도발성이 용서받지 못할 범죄가 된다는 인식을 심으면 구시대적 성관념을 가진 부류의 기세를 억제하는 효과를 얻을뿐더러 남녀간 경계가 심화되어 혼인과 출산이 줄면 이민자를 받아들일 필요가 더해져 나라의 근본적인 변혁에 도움이 되는 등 여러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성범죄의 엄벌은 용서와 화해의 가치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지. 반면에 절도 살인 등의 범죄자는 사회적 역학(力學)과는 무관한 자들이니 여기에는 용서와 화해라는 진보의 가치가 우선 스며들 여지가 있지.”

맞아요. 페스카마호 집단살인을 주도한 범인도 갱생해서 복음전파를 하고 다니게 되었죠. 진보가치를 강조한 변론에 의해서.”

보수가치에 따르면 이 세상을 떠나도록 해서 하늘에서 다음 생을 새로 지정받아 태어나야 비로소 갱생을 할 수 있지만 진보의 가치는 한 생애에도 거듭남을 허용하는 것이지. 주기도문대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실천하는 가치이네. 살인죄를 일부 용서한다고 해서 살인범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 살인은 법적인 죄가 아니라도 자기업보에 영향을 주는 것이니 말이야. 다만 성범죄는 업보관리를 위한 양심의 통제가 쉽사리 일어나지는 않는 범죄이기 때문에 관용을 베풀면 범법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있어. 그 때문에 진보의 가치를 넘어 강력히 처벌해야 할 필요가 있지. 마치 가격을 올리면 급격히 수요가 줄어들 상품은 가격을 쉽사리 올리지 않아야 하는 반면에 가격을 올려도 수요가 그다지 줄어들지 않을 상품은 가격을 충분히 올려 이익을 보는 것이 상업의 기술인 것처럼 형벌에도 시장의 논리를 적용하여 형량을 내리면 급격히 늘어날 범죄는 형량을 높이고 형량을 내려도 그다지 늘어나지 않을 범죄는 형량을 낮추는 것이 민중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길이지.”

김선배는 시장논리는 부도덕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장신구나 사치품처럼 가격을 올리면 급격히 판매가 줄어들 물건은 그만큼 민중에게 덜 필요한 것인데 이런 건 가격을 올리지 않으면서 의식주나 교통비처럼 가격을 올려도 판매가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 것은 그만큼 민중이 필요로 하는 것인데 비싼 가격을 매겨야 한다니요. 그러면 민중의 삶은 어려워지지 않나요.”

물론 생필품에 관해서는 정책과 여론으로 통제하니까 현대 민주사회에서 그런 부당한 이익을 얻기는 어렵지. 그러니까 상업에는 그냥 비유한 것일 뿐이고 그와 같은 시장논리를 형벌에 적용하면 어차피 인간의 업보관리본능 즉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범죄는 피해자의 피해정도보다 가볍게 처벌해도 민중 다스리기에는 지장이 없는 반면에 양심의 통제범위 밖의 범죄는 강력히 처벌하여 사회의 질서를 잡아야 하는 것이지. 사실 우리가 당했던 예전의 그 사상의 자유를 억제하는 법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나. 양심은 통제하지 않는데 법은 강력히 처벌했지. 그것이 군사독재정치의 질서를 잡기 위해서는 필요했으니까. 진보를 표방하는 정권에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민중을 다스리기는 어렵겠지만 대신에 성범죄를 강력히 처벌함으로써 인간의 양심에만 의존하지 않는 사회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데 예전에 어떤 진보언론에서는 아동성폭력범죄의 범인에 대해서도 강한 처벌보다는 확실한 처벌이라는 대책안을 제시했었는데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는 일반대중 및 보수언론보다는 오히려 차분한 것 같던데요. 이것은 성범죄에 엄격한 진보진영의 성향에는 일치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나도 그 기사를 봤었지. 아동성폭력범죄는 진보 측에서 나서지 않아도 엄한처벌이 불가피하니 굳이 이슈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될뿐더러 해당범죄자는 본래 성인대상 성폭행범보다 오히려 약자로 분류될 뿐으로서 미투의 대상인 사회지도층은커녕 계층상승의 잠재력을 견제해야할 일반남성대중도 아니니 화해와 관용의 진보가치가 변화되어 적용될 대상은 아닌 것이지.”

그렇네요. 엄밀히 분류하면 그들도 동성애자나 성전환자나 마찬가지로 성소수자이니까요.”

성환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궁금한 것이 있어 규식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진보정부는 인터넷상에서의 각종 음란물을 더욱 철저히 단속합니다. 그런데 음란물의 주된 수요계층은 돈이나 마초(macho)기질이 부족해서 애인을 제대로 사귀지 못하는 상대적 약자들인데요. 대체로 그들은 사회적 계층상승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도 이런 비진보적인 단속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회가 유지되려면 구성원간 최소한의 긴장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네. 비록 나라의 권력주변까지는 도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가의 구성원 제각각이 어느 정도의 신분상승욕구가 있어야 나라가 유지되는 걸세. 생각해보라고. 학급의 학생이 조금이라도 성적을 올려 담임선생에게 칭찬받을 욕구가 없다면 그 학급에 질서가 유지 되겠느냐고. 독신청년들이 음란영상 등을 보며 변태적인 성욕해소에 안주해 버리면 여자를 얻어 결혼을 하고 사회적 지위를 얻을 욕구가 사라지고 그러면 국민을 다룰 방도가 없어지네. 성욕은 노력하여 진짜 여자를 얻는 것으로만 해결할 수 있어야 국민사이에 경쟁이 생기고 지도층은 그들을 다룰 수 있게 되지. 정 여자를 얻기가 어려우면 동성애를 하면 몰라도 그런 변태적인 출구는 막아야 하는 것이네.”

그건 자본주의적 방법론 아닙니까.”

할 수 없지. 우리에게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자의 세상이 오지 않은 한에는 아직 국가는 있어야 하고 사회적 응집력은 있어야 하는데 과거처럼 식량배급을 조절하며 민중을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직 남은 지렛대인 성욕을 볼모로 민중을 다루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 현실이네. 아까도 남녀간의 경계를 강화시켜 혼인율이 줄어들게 하는 것이 진보의 가치를 돕는다고 해놓고서는 청년들이 결혼을 위한 목표는 가지게끔 해서 경쟁을 유발시켜야 한다고 했으니 모순성을 느끼고 있네. 민중을 세속의 욕구에서 해방시키려는 진보를 추구하면서 정치로써 민중을 다스릴 궁리를 하는 진보정치라는 그 자체가 모순된 것일지도 모르지. 하여튼 돈과 물자에 관해서는 우리는 철저히 자본주의를 배격하며 사회주의적인 함께 나눔을 주장해야겠지만 그 밖에 가능한 민중통제의 수단에는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경쟁체제를 인정해야 하네.”

보수적인 사회에서는 남자가 물품이나 가축 등의 재산처럼 여자를 경쟁적으로 소유해왔는데 이제 진보적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소유가 평등해져야하지만 여자 또한 남자와 동일한 인격주체이니 여자를 소유대상으로 삼았던 사고방식으로 진보주의적인 분배의 정의를 논하기는 곤란한 것 같군요.”

과거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강한 남자는 많은 여자를 거느리고 약한 남자는 여자를 못 거느렸지. 자본주의가 성행할 무렵엔 일부일처제가 통용되었지만 다시 진보적인 사회에서는 경쟁력 있는 남자는 여자에게서 선택받고 경쟁력 없는 남자는 선택 못 받는 것이지. 아직도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로 보는 자들은 이것을 자본주의식 불평등과 혼동하겠지만 여성주체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이지.”

진보적인 사회에서 남자의 경쟁력은 무엇일까요. 자본주의적 관점은 아니겠죠.”

얼마나 성평등사상을 가지고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하느냐가 경쟁력이 될 것이고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한 남자들은 이제는 도태되어야 할 걸세.” 규식은 여기에 와서는 자신감을 갖고 힘주어 발설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옆으로 샜네요. 지금 그런 얘기 할 때가 아닌데. 우린 어서 여기서 결과를 얻고 당사로 돌아가야 해요.”

혼자서 강형찬의 유품들을 살펴보던 성자가 두 남자의 대화를 막았다.

그렇지. 미안하네. 방금 둘이 뭘 찾아낸 것 같던데 무엇이었지.”

규식은 책상 한가운데 놓여 있는 홍인철 관련 메모쪽지를 보았다.

강선배의 죽음과 관련된 홍인철이란 인물을 찾았는데 성환이가 마치 그 사람이 강선배를 죽게 한 자인 것처럼 복수심이 깃든 말투를 하기에 내가 진보는 복수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중에 딴 얘기들이 많이 나온 것이죠.” 성자가 답하자

그래도 홍인철이란 인물에 관해서는 우리가 살펴봐야 하지 않나.” 성환은 뭔가 사명감을 가지는 듯 다시 성자에게 주장했다.

그냥 인터넷 자료나 봐야지. 정 안되면 그 사람의 책이나 사줘서 보든지. 우리가 뭐 정보수사기관처럼 그 사람을 조사할건 없잖아. 경찰도 검찰도 다 손 놓고 끝냈는데.”

성환과 성자가 다시 먼저와 같은 대화를 하는 중에 휴대폰 검색을 하던 규식은 이윽고 둘에게 그만하라 손짓을 했다.

그 사람을 불러서 이야기를 듣자. 우리가 그 사람에게 잘못을 밝히라고 협박할 것도 아닌데 어려울 것은 없지. 보아하니 그 사람도 자기주장을 펼치려고 정치판 근처를 상당히 기웃거렸던 것 같은데 공당(公黨)에서 자기를 부르면 좋다고 올 것 같다.”

선배님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답했다.

당사로 돌아온 세 사람은 진보당 명의로 오십팔세의 삼류작가 홍인철을 당사로 초청하는 전자우편 서신을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홍인철 작가님. 社會網上에서 우리나라 정치를 위한 貴下의 소중한 견해들을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政綱政治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저희 당에서 귀하의 고견을 적극 반영코자 하오니 부디 왕림하셔서 저희와 앞으로의 좋은 因緣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가능하시면 다음 주 요일이 좋겠습니다. 오시면 김성환 정책위원을 찾아주시면 되겠습니다.

 

당비서실 명의로 편지를 보냈으니 곧 올 것 같았다. 홍인철의 활동행적을 살펴보니 살짝 보수 쪽에 기울어 있으나 정작 보수 쪽에서는 보수정당은 물론이고 웬만한 언론기관에서도 소외되어 있었다. 보통 보수니 진보니 해서 진영을 나눠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이른바 논객들의 행태인데 그의 글은 진정한 이념이 무엇이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니 당장에 상대진영의 인사를 상처 내며 기세몰이를 해야 할 논객사회에서 소용될 것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초청장을 그가 좋아할 것 같은 한자표기까지 해서 보냈으니 그는 이것을 받고는 역시 진보정치 쪽 사람들이 순수하다며 감격스레 찾아올 것이다. ,<계속>.mumanews@han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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