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보훈처 의견에 의거하면 박탈해야 할 ‘을미의병 145명 서훈 명단’

박용규 박사 | 기사입력 2023/05/26 [14:10]

지난 4월 24일 ‘보훈처가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실로 보내온 검토의견’ 전문을 필자는 다음날 입수하였다. 아래는 ‘보훈처가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실로 보내온 검토의견’(2023. 4. 24) 전문이다.   

 

“독립유공자법(수용 곤란)

 

ㅇ 동학 2차 봉기의 항일적 성격은 인정하나 독립운동적 성격은 인정할 수 없음

  - 독립은 국권침탈 이후 항일운동에 인정할 수 있으나, 국권침탈 시기 의견이 상이

  - 동학 2차 봉기를 독립운동으로 인정할 경우, 국권침탈 시기를 봉기가 있었던 1894년 9월로 지정해야 함

  - 학계·교과서 집필 자문계에서는 국권침탈 시기를 1904~1905 러일전쟁 직후 또는 1905 을사조약 전후로 보는 것이 다수 의견

  - 국권침탈시기를 앞당기면, 을사조약 전의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을 일제 치하의 근대화 논리로 해석할 우려”

 

위의 보훈처의 검토 의견은 국권침탈 시기를 1905년 러일전쟁 직후와 1905년 을사조약 전후로 본다는 것이며, 독립운동은 1905년 국권침탈이 이루어진 을사조약 이후의 항일운동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보훈처의 검토 의견에 의거하면, 독립유공자 서훈도 ‘1905년 국권침탈이 이루어진 을사조약 이후의 항일운동’에 참여한 대상자에게만 추서되어야 한다.

 

그런데 1962년부터 지금까지 보훈처는 보훈처의 검토 의견에 입각하여 ‘1905년 국권침탈이 이루어진 을사조약 이후의 항일운동’에 참여한 대상자에게만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훈처는 을사조약 이전의 항일운동인 을미의병(1895) 참여자에게도 서훈을 추서하여 왔다. 

 

보훈처는 1962년부터 2022년까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실시에 맞서 봉기한 을미의병(1895) 참여자 145명을 독립유공자로 아래와 같이 서훈하여 왔다. 아래는 필자가 을미의병(1895) 참여로만 서훈된 145명 명단을 연도별로 정리한 것이다. 을미의병(1895) 참여자 145명은 필자가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서 뽑아낸 것이다. 

 

“1. 박근욱(朴根郁, 1838∼미상, 2022, 건국포장), 2. 박화실(朴化實, 1839∼미상, 2022, 건국포장), 3. 이병승(李秉承, 1857∼1924, 2021, 건국포장), 4. 이면수(李勉洙, 1833∼1898, 2020, 건국포장), 5. 류인목(柳寅睦, 1839∼1900, 2020. 건국포장), 6. 김진림(金震林, 1838∼1900, 2018, 대통령표창), 7. 윤병의(尹秉義, 1822∼1899, 2018. 대통령표창), 8. 이강하(李康夏, 1873∼1940, 2018, 대통령표창), 9. 최은동(崔殷東, 1866∼1936, 2018, 건국포장), 10. 조성학(趙性學, 미상∼1914, 2016, 애족장) 

11. 오형덕(吳亨德, 미상, 2013, 애족장), 12. 김문주(金文柱, 미상, 2013, 애족장), 13. 권익현(權益顯, 1845∼1901, 2012, 건국포장), 14. 이빈호(李斌鎬, 1861∼1930, 2011. 건국포장), 15. 권재호(權載昊, 1854∼1903, 2011, 애족장), 16. 권옥연(權玉淵, 1839~1900, 2011. 건국포장), 17. 정석진(鄭錫珍, 미상∼1896, 2010, 애국장), 18. 정인회(鄭寅會, 1868∼1902, 2010, 애족장), 19. 신지수(申芝秀, 미상∼1905, 2009, 애족장), 20. 황재현(黃載顯, 1868∼1903, 2009, 건국포장)

 

21. 홍건(洪建, 1838∼미상, 2009, 건국포장), 22. 이봉학(李鳳學, 1858∼1924, 2008, 건국포장), 23. 김윤모(金潤模, 1847∼1897, 2008, 건국포장), 24. 유완(柳琓, 1860∼1903, 2008, 건국포장), 25. 이중린(李中麟, 1838∼1917, 2007, 애족장), 26. 서상부(徐相孚, 1840∼1896, 2007, 애족장), 27. 권휘연(權徽淵, 1845∼1896, 2007, 애족장), 28. 안재학(安載學, 1852∼1912, 2007, 애족장), 29. 김준모(金濬模, 1845∼1896, 2006, 애국장), 30. 이승학(李承鶴, 1857∼1928, 2005, 건국포장) 

 

31. 원용정(元容正, 1860∼1907, 2005, 건국포장), 32. 이선구(李善求, 1856∼1922, 2005, 건국포장), 33. 한동직(韓東直, 미상, 2005, 건국포장), 34. 송병직(宋秉稷, 1864∼1921, 2005, 애족장), 35. 박주대(朴周大, 1836∼1912, 2005, 대통령표창), 36. 박주학(朴周學, 1843∼1901, 2005, 건국포장), 37. 권성하(權成夏, 1852∼1914, 2004, 건국포장), 38. 김진의(金鎭懿, 1855∼1930, 2004, 건국포장), 39. 유봉영(柳鳳榮, 1858∼1896, 2004, 애국장), 40. 이창서(李彰緖, 1841∼1911, 2004, 건국포장) 

 

41. 이승룡(李承龍, 1853∼1896, 2003, 애족장), 42. 이의호(李宜鎬, 1854∼1896, 2003, 애족장), 43. 이운호(李運鎬, 1852∼1930, 2003, 건국포장), 44. 조동석(趙東奭, 1845∼1896, 2002, 애족장), 45. 권제영(權濟寧, 1850∼1903, 2002, 건국포장), 46. 이만응(李晩應, 1857∼1938, 2002, 애족장), 47. 이긍연(李兢淵, 1847∼1925, 2002, 건국포장), 48. 김성화(金聖化, 미상∼1896, 2001, 애국장), 49. 민동식(閔東植, 미상∼1896, 2001, 애국장), 50. 신무섭(申懋燮, 미상∼1896, 2001, 애국장) 

 

51. 김회락(金繪洛, 1844∼1896, 2001, 애국장), 52. 박동의(朴東儀, 미상∼1896, 2001, 애국장), 53. 이영찬(李永燦, 미상∼1896, 2001, 애국장), 54. 이원하(李元廈, 미상∼1896, 2001, 애족장), 55. 김하림(金夏林, 1846∼1909, 2001, 건국포장), 56. 이병선(李秉先, 미상∼1896, 2000, 애족장), 57. 이경응(李景應, 1865∼1947, 2000, 애족장), 58. 안종응(安鍾應, 1845∼1906, 1999, 건국포장), 59. 남두희(南斗熙, 1850∼1924, 1997, 건국포장), 60. 장무호(蔣武鎬, 1852∼1926, 1997, 건국포장) 

 

61. 김대락(金大洛, 1851∼1905, 1997, 건국포장), 62. 조광규(趙光奎, 1851∼1927, 1997, 건국포장), 63. 김회종(金會鍾, 1852∼1916, 1996, 건국포장), 64. 김진구(金鎭九, 1854∼1914, 1996, 건국포장), 65. 김사정(金思鼎, 1867∼1942, 1996, 애족장), 66. 서효신(徐孝信, 1848∼1915, 1996, 건국포장), 67. 윤정섭(尹鼎燮, 1845∼1913, 1996, 애족장), 68. 서효원(徐孝源, 미상∼1897, 1996, 건국포장), 69. 서효격(徐孝格, 1855∼1936, 1996, 건국포장), 70. 서효달(徐孝達, 1839∼1904, 1996, 건국포장) 

 

71. 손덕화(孫德化, 미상∼1896, 1995, 애국장), 72. 권호선(權灝善, 미상∼1897, 1995, 애국장), 73. 김화식(金華植, 1866∼1943, 1995, 애국장), 74. 이승구(李承龜, 1865∼1931, 1995, 건국포장), 75. 김휘정(金輝珽, 1841∼1901, 1995, 애족장), 76. 주현구(朱鉉九, 이명 朱容九, 1869∼1897, 1995, 애족장), 77. 이범직(李範稷, 미상∼1896, 1995, 독립장), 78. 정성첨(鄭聖瞻, 1853∼1896, 1995, 애국장), 79. 정익(鄭瀷, 1860∼1914, 1995, 애족장), 80. 권기수(權夔洙, 미상∼1896, 1995, 애국장) 

 

81. 심성지(沈誠之, 1831∼1904, 1995, 애족장), 82. 김재관(金在觀, 미상∼1896, 1995, 애국장), 83. 김용주(金用胄, 미상∼1896, 1995, 애국장), 84. 박원용(朴元用, 미상∼1896, 1995, 애국장), 85. 우재봉(禹在鳳, 미상∼1896, 1995, 애국장), 86. 우규하(禹圭夏, 미상∼1896, 1995, 애국장), 87. 임을선(林乙善, 미상∼1896, 1995, 애국장), 88. 윤성호(尹聖鎬, 미상∼1896, 1995, 애국장), 89. 박원영(朴源永, 미상∼1896, 1995, 애국장), 90. 유창식(柳昌植, 1858∼1912, 1995, 건국포장) 

 

91. 김수욱(金壽旭, 1852∼1902, 1995, 건국포장), 92. 권대직(權大稷, 1853∼1930, 1995, 건국포장), 93. 김수협(金壽莢, 1853∼1896, 1995, 애족장), 94. 나시운(羅時雲, 미상∼1896, 1995, 독립장), 95. 송도순(宋道淳, 1857∼1918, 1995, 애족장), 96. 남승철(南升喆, 1851∼1922, 1995, 건국포장), 97. 김수담(金壽聃, 1852∼1896, 1995, 애족장), 98. 김창균(金蒼均, 미상∼1896, 1995, 애국장), 99. 조준교(趙駿敎, 미상∼1896, 1995, 애국장), 100. 최문환(崔文煥, 미상∼1897, 1995, 애국장). 

 

101. 권대일(權玳一, 1858∼1896, 1995, 애족장), 102. 김흥락(金興洛, 1827∼1899, 1995, 애족장), 103. 김선이(金仙伊, 미상∼1896, 1995, 애국장), 104. 문석봉(文錫鳳, 1851∼1896, 1993, 독립장), 105. 이기찬(李起璨, 1853∼1908, 1993, 애국장), 106. 이수악(李壽岳, 1845∼1927, 1993, 애족장), 107. 성경호(成慶昊, 1854∼1896, 1993, 애국장), 108. 이종국(李鍾國, 1860∼1939, 1993, 건국포장), 109. 안옥희(安玉熙, 1863∼1939, 1992, 애족장), 110. 장충식(張忠植, 1836∼1901, 1992, 애족장).

 

111. 이진응(李晋應, 1847∼1896, 1991, 애국장), 112. 주용규(朱庸奎, 1845∼1896, 1991, 애국장), 113. 김백선(金伯善, 1873∼1896, 1991, 애국장), 114. 김경달(金敬達, 1849∼1896, 1991, 애국장), 115. 서재기(徐再起, 미상∼1896, 1991, 애국장), 116. 박동진(朴東鎭, 1847∼1896, 1991, 애국장), 117. 심거벽(沈巨擘, 1855∼1896, 1991, 애국장), 118. 신재가(申在嘉, 1850∼1895, 이명 신재희(申在熹), 1991, 애국장), 119. 임승주(林承周, 1867∼1937, 1990, 애족장), 120. 허훈(許薰, 1836∼1907, 1990, 애국장) 

121. 박주상(朴周庠, 1831∼1908, 1990, 애족장), 122. 권세연(權世淵, 1836∼1899, 1990, 애국장), 123. 조승기(趙承基, 1836∼1913, 1990, 애족장), 124. 이기진(李起振, 1869∼1908, 1990, 애족장), 125. 심상희(沈相禧, 1861∼1931, 1990, 애족장), 126. 김도화(金道和, 1825∼1912, 1990, 애국장), 127. 금석주(琴錫柱, 1857∼1920, 1990, 애국장), 128. 김헌경(金憲卿, 1851∼1910, 1990, 애국장), 129. 김형진(金亨鎭, 1861∼1898, 1990, 애국장), 130. 이충응(李忠應, 1856∼1896, 1990, 독립장)

 

131. 이조승(李肇承, 1873∼1900, 1990, 애족장), 132. 정문위(鄭文緯, 1851∼1896, 1990, 애족장), 133. 이인화(李仁和, 1858∼1929, 1990, 애국장), 134. 이종흡(李鍾翕, 1861∼1919, 1990, 애족장), 135. 장익환(張益煥, 1866∼1937, 1990, 애족장), 136. 장진성(張進聖, ?∼1943, 1990, 애국장), 137. 안창식(安昌植, 1838∼1899, 1990, 애족장), 138. 김상종(金象鍾, 1848∼1909, 1990, 애족장), 139. 김하락(金河洛, 1846∼1896, 1982, 대통령장), 140. 권인규(權仁圭, 1843∼1899, 1980, 독립장)  

 

141. 민용호(閔龍鎬, 1869∼1922, 1977, 독립장), 142. 이춘영(1868∼1896, 1963, 독립장), 143. 서상렬(徐相烈, 1856∼1896, 1963, 독립장), 144. 홍사구(洪思九, 1888∼1896, 1963, 독립장), 145. 안승우(安承禹, 1865∼1896, 1962, 독립장)”

 

아래는 을미의병(1895) 참여로만 서훈된 145명 명단 가운데 극히 일부의 서훈자와 공적개요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 나온 그대로를 기재한 것이다.

 

▲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은 마지막 모습(1895년 2월 27일) Ⓒ 양상현  ©브레이크뉴스

 

“박근욱(朴根郁, 1838∼미상): 1896년 음력 2월 전남 나주군에서 나주의병 우익장으로 활동함.(2022, 건국포장)

 

박화실(朴化實, 1839∼미상, 이명 박찬욱(朴贊郁)): 1896년 음력 2월 이후 전남 나주군에서 김창균 등과 함께 나주의병을 지휘함.(2022, 건국포장)

 

이면수(李勉洙, 1833∼1898): 1896년 1월경 강원 춘천군에서 이소응 등이 의병을 일으킬 때 통문을 돌려 독려하고 이소응 의진에서 군사장으로 활동함.(2020, 건국포장)  

 

김진림(金震林, 1838∼1900): 1896년 경북 안동군에서 권세연이 이끄는 안동의진 내방장으로 활동함.(2018, 대통령표창)

 

홍사구(洪思九, 1888∼1896): 1896년 을미왜변에 분개하여 그의 스승인 안승우와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제천 남성에서 싸우다가 안승우가 전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군사를 지휘하다가 역시 전사함.(1963, 독립장)   

 

안승우(安承禹, 1865∼1896): 1894년 의병으로써 지평군수 이영춘과 함께 지평에서 거의하여 제천으로 달려가 왜적과 항전하다가 1896년 순사하였음.(1962, 독립장)” 

 

이상에서 우리는 보훈처가 을사조약(1905) 보다 10년 이전인 을미의병(1895) 참여자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하여 왔음을 확인하였다. 

 

보훈처는 지금까지 왕비 민비가 시해된 을미사변(1895)을 국권침탈 사건으로 보았고, 을미사변에 맞선 을미의병(1895)을 독립운동의 시작으로 확정하였고, 을미의병(1895) 참여자에게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여 서훈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우리 국민은 모두가 알고 있다. 

 

보훈처의 ‘검토의견’(2023. 4. 24)은 명백한 거짓이고, 국민을 우롱하는 작태이다. 그런데 왜 보훈처는 금방 거짓으로 들통이 날 ‘검토의견’(2023. 4. 24)을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보냈을까? 

필자는 최근 우리사회에 현안으로 부각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에 대해, 보훈처가 이를 방해·훼방하기 위해 거짓 ‘검토의견’을 보냈다고 판단한다. 필자는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다. 

 

‘보훈처가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실로 보내온 검토의견’에 입각하면, 을미의병 참여자에게 추서한 독립유공자 서훈은 박탈하여야 한다. 독립유공자 서훈에는 예외가 없는 것이다. 서훈은 공정성과 형평성에 맞아야 정당성이 확보된다. 

 

1895년 을미의병 145명 서훈을 박탈하지 않을 것이면, 보훈처는 2차 동학 봉기 참여자를 똑같이 서훈해야 한다. 왜냐하면 을미의병과 2차 동학 봉기 참여자가 똑같은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일제가 일으킨 1894년 경복궁점령사건(국권침탈사건)에 맞서,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2차 동학농민혁명(=항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전봉준 장군과 최시형 선생이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싸웠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일제가 일으킨 국권침탈 사건이었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일본군이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여, 국왕 고종을 포로로 잡고, 조선군대의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친일개화파 정권을 세워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경복궁 점령사건 때에 조선군 궁궐 수비대는 17명이 전사하였고, 60여 명이 부상하였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은 1895년 을미사변 보다 더 규모가 컸고, 더 폭력적이었다. 을미사변으로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었고, 조선군 궁궐 수비대 11명이 전사하였으며, 민비가 시해되었으며, 궁녀 2명이 사망하였다.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과 1895년 을미사변은 일제가 일으킨 똑같은 국권침탈 사건이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보훈처는 “동학 2차 봉기를 독립운동으로 인정할 경우, 국권침탈 시기를 봉기가 있었던 1894년 9월로 지정해야 함”이라는 검토의견을 냈다. 이 검토의견은 명백한 거짓 주장이다. 보훈처는 1962년부터 을사조약(1905)에서 10년을 앞당겨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일어난 을미사변부터를 국권침탈 시기로 규정해, 그해에 일어난 을미의병(1895)을 독립운동으로 보아, 을미의병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여 왔다. 보훈처는 ‘검토의견’에서 을사조약(1905) 이전으로 국권침탈 시기를 앞당길 수 없다고 강변하고 있으나, 이미 보훈처는 국권침탈 시기를 ‘을미사변’(1895)부터 이루어졌다고 판정하였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이루어진다면, 국권침탈 시기가 을미사변(1895)에서 1년이 앞당겨져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에 일어난 경복궁 점령 사건으로 지정될 뿐이다. 한국 역사학계는 1894년 경복궁 점령 사건을 국권 침탈 사건으로 보고 있다.

 

현재(2023년 3월)까지 서훈을 받은 전체 독립유공자는 17,748명이다. 의병(을미의병·을사의병·병오의병·정미의병) 참여자는 2,715명 서훈을 받았다. 그 가운데 을미의병 참여자는 145명 서훈을 받았다. 

 

유족이 있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470명에 불과하다. 아래는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군에 의해 총살, 사살, 작두형, 화형을 당해 서거한 순국자 111명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순국자 111명 명단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2019년에 발간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등록 신청 안내󰡕 책자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홈페이지의 참여자 명단에 나오는 내용에만 한정·의거하여 작성하였다.

 

“강기수(미상∼1894.12.30)는 대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전라도 무장에서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된 후 1894년 12월 30일 일본진영에서 총살당함(전라도 무장·나주)

 

강대진(미상∼1894.12.30)은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전라도 영광에서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된 후 1894년 12월 30일 일본진영에서 총살당함(전라도 영광·나주)

 

가병인(賈秉仁, 1866.3.10∼1894.12.30)은 문장준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해 9월 10월 태안, 서산, 해미전투와 홍주성 전투에 참여 후 태안 백화산에서 도피 중 일본군에게 총살됨(태안 예산 홍성)

 

강운재(姜云在, 1856.4.5.∼미상)는 안현묵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해 1894년 10월 태안, 서산, 해미 전투, 홍주성 전투에 참여한 후 일본군에게 생포되어 작두로 처형됨(공주 태안 홍성)

 

이승원(李承遠, 1851.11.25.∼1895.4.10)은 1894년 공주 우금치전투에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으며, 공수원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공주 시내 정주뱅이에서 11월 화형당함(공주)”

 

▲필자/ 박용규 박사.  ©브레이크뉴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 받지 못하였다. 이제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서훈하여야 한다. 

 

보훈처는 1962년부터 을미의병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해 왔다. 1895년 을미의병 서훈이 합당하다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 양반 유생이 주류를 이룬 을미의병은 서훈에서도 우대를 받아왔다. 농민 출신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서훈에서 차별과 천대를 받아왔다. 이제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게도 서훈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hispak@hanmail.net

 

*필자/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고려대 사학과 박사/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상임대표.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