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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스님의 불심, 자비의 꽃으로 맺히다

[인터뷰] 조계종 상담개발원장 도현스님의 대학원대학 설립과 교육관 불사

박정례 기자 | 기사입력 2014/07/28 [09:25]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도현스님, 그의 이름 앞에는 비구니 천사라는 이름이 뒤따른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스님이 부처님의 자비 정신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 민간 속으로 뛰어든 것이. 그러나 헤아려보니 35년이 넘었다.

스님은 어린 시절 자주 병고에 시달렸다. “내 한 몸도 구제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구나.” 스님은 아픔 몸으로 생활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버거웠기에 누구보다도 건강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 과정에서 한 스님을 알게 됐다. 어려운 학생들을 거두면서 공부도 시키고 병자들에게 침도 놔주면서 사는 분이었다. 도현스님은 그 모습을 보면서 “건강해지면 나도 저 스님처럼 어려운 사람들과 벗하면서 살아야지.”하고 은연중에 발원을 하게 된다.
▲ 조계사상담개발원장 도현스님     © 박정례 기자

부처님에게 귀의하게 된 동기

도현스님은 절을 찾을 때마다 ‘부처님을 잘 모시면 병도 낫고 건강해진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한문으로 된 불경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지장경과 천수경부터 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니 어릴 적 인연이 떠올렸다. 친구로부터 불교서적 한권을 선물 받은 적이 있었는데 흥미도 없었던 터라서 한쪽에 밀쳐놓고 쳐다보지도 않은 책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아파서 일도 못하게 되니까 어느 날 그 책을 집어 들게 됐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아픈 내 마음 내 몸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몸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아픈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자꾸 묻게 됐습니다.” 

도현 스님은 절집을 찾는 횟수가 늘고 부처님에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 점차 싹트기 시작했던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에 엎드려서 깜빡 잠이 들었다. “중이 되는 꿈을 꾼 거예요. 꿈속이었지만 전생에 중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로 달려가 불가에 귀의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스님은 선뜻 허락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우선 부모님께 허락을 맡고 와야 한다고 하셨죠.” 

출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부친의 죽음과 유언

지금 스님이 돼계신 걸 보니 허락을 잘 맡으셨나 봐요.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깍은 지 1년이 지나서 스님이 집에 들렀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쟤 왜 저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스승 스님을 찾아가서 “병 고쳐 달랬더니 누구 맘대로 내 딸을 데려다가 중 만들었냐?”며 멱살을 잡는 소동까지 벌였다. 그러나 스님은 말리는 가족의 손길을 뿌리치고 절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스님의 뒷모습에 대고 “저렇게 살줄 몰랐는데 중이 되다니.... 쟤는 중노릇 절대 못할 아이다.”하면서 엄포도 놓고 야유도 해댔다.

스님 부모님의 종교는 달랐나보죠? “아니에요. 불자였습니다. 기복신앙에 매달리는 정도였던 거죠.”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로는 부모님도 아무 말 없이 지켜봐주셨다. 도현스님은 해인사 약수암에서 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게 된다. 이곳에서 행자스님으로 2년 동안을 묵은 다음에 스승님의 배려로 중앙승가대에 입학을 하게 됐다. 지금은 김포로 옮겨간 승가대는 전에는 안암동에 있었다. 그 즈음 스님은 서울대 병원의 법당에서 일하고 있었고, 속가의 부친을 이곳에서 조우하게 된다. 간경화증에 걸린 부친이 입원을 하게 된 때문이다. 부친은 운명하기 직전에 “나 죽거든 우리 살던 곳에 절을 지어라!”고 스님에게 유언을 하시며 돌아가셨다.

스님의 아버지는 조각가였다. 필자는 스님의 아버지가 남긴 뿌리조각품들을 보면서 “스님의 아버지는 괴짜 조각가시네요.”하고 필자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거대한 규모의 뿌리조각품을 보면서 우리나라 산천에서 언제 다시 이렇게 큰 나무들을 뿌리 채 구해다가 그 누가 조형물을 만들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요. 정말 괴짜시죠? 하하하” 뿌리조각품들 만으로도 전문전시장을 만들어도 될 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들을 유산으로 남긴 부친과의 인연이 뭐 그리 간단하겠는가. ‘소매 한 번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허공을 가르듯이 무념무상의 상태로 웃는 스님의 모습에서 측량할 길 없는 수행자의 포스가 묻어났다. 
▲ 조계사상담개발원 대학원대학 후원의 밤     © 박정례 기자

남양주시에 둥지를 튼 정혜사와 스님의 지난 날

정혜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156-2번지 도현스님이 주지로 있는 절 주소다. 스님은 이곳에서 일정이 잡힐 때마다 힐링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매주말과 초하루와 보름날은 상설예불도 봉행한다. 주중엔 종로구 우정국로에 있는 조계사 부속 건물인 불교신도회관에서 불교상담개발원장으로서의 공무를 보고 이와 함께 ‘자비의 전화’를 운영하고 있다. 

스님의 과거를 더듬어보면 재밌고도 신기한 일이 많다. 학업에 정진할 때다. 상도동에 방 하나를 얻어 자취생활을 하면서 등하교를 하고 있었는데 계를 받은 승려의 몸이란 그가 몸을 의탁하는 곳이 곧 절집이고 포교원도 된다. 도현스님이 자리를 잡은 곳은 상도동의 한 산동네였는데 이때부터 스님과 일반 사대부중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상도동 산 말랭이, 그곳은 당시 부모가 일용직에 종사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마땅히 오갈 데도 없었던지 하나 둘 스님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스님은 이 아이들을 거두면서 밥도 같이 먹고 숙제도 봐주고 말벗도 돼줬다. 누나 노릇도 하고 보모 노릇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상담공부를 하러 다니던 학우가 찾아왔다. 늘 침울한 표정이던 그녀는 그날따라 활짝 웃는 얼굴로 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참고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남편이 2살과 3살 박이 얘들을 두고 갑자기 죽는 바람에 고통과 원망 속에서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불자가 돌아가고 난 자리를 보니 통장 하나와 도장이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450만원이 들어 있었다. 스님은 그 즉시 통장 주인에게 “잃어버리고 놔두고 간 것 없냐?”고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대답은 “남편한테 들어온 부조금인데 안 쓰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에게 드리고 싶으니 불사(佛事)하는데 쓰라.”는 것이었다.
▲ 조계사 상담개발원 상담대학원대학 후원의 밤     © 박정례 기자

 


이틀이 지났다. 낯모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찾아와서 “저 건너 산동네에 사는 사람이거 자신을 소개하면서, 세준 거 제외하고 450이면 살 수 있는 집인데 너무 안 팔린다.”는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이 집을 사기로 결심을 했다. 만원이 생기면 만원만큼, 2만원이 생기면 2만원만큼 시멘트를 사고 슬레이트를 사서 벽을 고치고 지붕을 수리해나갔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 날엔 불상과 법당을 갖춘, 150여 평의 절집이 됐다. 스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갔다. 

상담공부를 계속하며 사대부중과의 소통과 대화를 위한 학문적인 정진

스님은 이런 틈틈이 공부를 계속했다. 복지사 자격증과 보육교사자격증과 상담사 자격증을 따낸다. 돈 없고, 시간 없어서 걸림돌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용케도 손이 딸리면 봉사자가 나서서 도와주고, 학비가 없으면 독지가가 나서서 어려운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는데 필요한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다. 

재밌는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써 가꾼 절을 두고 이사하는 일이 생겼다. 재개발 붐이 분 탓에 집이 헐리게 생겼다. 스님은 약간의 보상비를 손에 쥐고 상도동의 또 다른 터전을 물색해야 했다. 옮겨 간 곳은 오랫동안 개를 키우던 장소였다. 십 수 년 동안 쓰레기 한번을 치우지 않은 곳이라서 스님이 치운 쓰레기만도 청소차 17대 분량이나 됐다. “삼년만 묵묵히 일하면 천일기도가 된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스님의 표정을 바라보미 그야말로 무념무상인 거다. 

기도도량을 쌓듯이 묵언수행을 하면서 호미로 땅을 파고 다져서 목단도 심고 대나무도 심고 작약도 심었다. 세월이 지나 10년쯤 지나니 꽃동네가 됐다. 개 짓는 소리와 악취로 공해를 이루던 동네가 꽃동산으로 변하게 되지 그제야 구청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그 때 상도동 산동네 신도들이 잊지 않고 이번 초파일에 스님을 찾아줬다. 160여 명, 팔당댐이 보이는 남양주 끝자락으로. 상도동에서 절집을 꾸리던 때가 1980년 대였으니,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씻기고 재우고 어린이 법회를 열면서 돌보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장가가서 아이를 안고 온다. 이름도 지어주고 공부도 시키며 중매도 섰다. 그들은 이웃이자 친한 벗이었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후미진 곳에서 보낸 세월이 무려 35년이다.

9년간의 불교방송 프로그램 진행 후 개발원장에 임명되다

어느 날 불교방송에서 찾아왔다. ‘거룩한 만남’이라는 방송프로를 맡아달라는 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방송 콘셉트는,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찾고 발굴하여 그 사연과 함께 독지가들을 찾아 연결해주기도 하고, 성금을 받아서 도와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한 번은 백혈병 환자가 있었다. 혈액카드를 다 써서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돈을 모아가니 이미 운명을 한 뒤였더라는 것이다. 영안실에 모실 돈이 없어서 하루만 있다가 화장실로 직행하는 죽음도 보았다. 스님은 봉사자들과 함께 협업하면서 이 프로그램을 9년 동안 방송했다.

스님은 올 초(1월 24) 종단으로부터 ‘불교상담개발원장’이라는 보직에 임명됐다. 상담개발원에서는 그동안 2년제 상담대학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상담대학원대학을 설립하여 상담분야의 전문 인력 양성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도현스님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13일 오후 6시30분 서울 장충동 앰배서더 호텔 2층 그랜드볼룸에서 ‘불교상담대학원대학교 설립 및 교육관 불사 후원의 밤’을 개최했다. 이에 따라서 조계종에서는 ‘(가칭)불교상담대학원대학교 설립 및 교육관 불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고문단과 자문위원, 추진위원 등을 임명했다.

이날 사회는 코미디언 김병조 씨가 맡았고, 초대가수로 ‘찔레꽃’을 부른 가수 장사익 씨와 스님가수 삼진스님 바이올리니스트 강형진 씨가 특별출연을 해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개포동 금강선원의 ‘혜거 스님’이 즉석에서 1억 원을 약정해 주는 등 5억 원 성금 모집에 청신호가 켜지는 모습이었다. 이를 토대로 <마음과학의 시대, 불교 상담이 불교의 미래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16년부터는 대학원대학교 설립에 본격 착수할 예정이다. 속세에 발을 담그며 중생들과 나란히 호흡하는 스님들의 분투정신이 바로 청정심이 아닌가 싶다.

불가에 귀의하여 마음 가득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이 풍진 세상을 극락세계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수많은 스님들의 노고가 오늘도 눈부시다. 도현스님 이하 불교상담대학원대학의 설립에 뜻을 모은 사람들의 불사가 곧 현실로 이루어지길 빈다. 


*인터뷰어 박정례 / 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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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2014/09/03 [17:56] 수정 | 삭제
  • 가족도 없는 절~뼈결핵..패결핵..장결핵..위결핵...슈펴결핵으로...다죽어가던절...
    쌍문동 한전병원까지 댈고...절살려주신분...1~2년 치료로...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ㄳ하다고...얼굴 보니...알겠네요...그당시...지금도 치료중이지만...너무 힘들어 자살도 여러번 했지만 그때마다 스님 생각 했습니다...그당시 너무 ㄳ 합니다...정말 너무 목숨 살려주셨는데 저가 너무 ㅈㅅ합니다....건강하시고...도현스님 항상 건강 하시고 오래오래 건강하세요....전 ㅈㅅ마음분입니다...정말...오래오래 건강하셔야대는분...정말...한글 잘몰라...ㅈㅅ요...파란배개와 지팡이등등 사주셨는데..^^병원에서...저기력 못하시겠조...^^항상 건강 하세요...스님...전~살려주셨는데...ㅈㅅ합니다...절한번 ㄳ하다고 하고 싶었는데...저가 한글이 좀...ㄳ합니다...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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