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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만리동 비탈길 어귀에서 만난 위대한 밥상!

봉제공과 일용직 노동자들의 40년 애환서린 사랑방!

이래권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4/10/20 [15:30]

산새가 오르기엔 다소 헐떡이고, 토끼가 오르기엔 두어 시간 사람들을 피해 숨다가 쉬다가 올라야 할 만리동 꼭대기 아래, 치맛자락 같은 삼거리 초입에 “중림식당”이란 폭삭 삭아버린 10평 남짓한 공간이 있다. 주방과 낡은 냉장고가 차지한 공간을 빼면 실상 대여섯 남짓한 아주 작은 1970년대 풍의 삼거리 주막집이다.

 

탁자 네 개 좌우로 긴 의자가 배치되어 있고, 자칫 손님이라도 많으면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선객(先客)들의 등을 비집고 자리 잡아야 되는 선방(禪房)같은 곳이기도 하다. 비좁은 공간과 사람들은 일면 자세와 예의를 가르치는 죽비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인상을 찌푸리거나 화내지 않는다. 그것은 40여년을 넘겨 운영되고 있는 식당의 역사와 기본이 20년 단골로 이루어진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통해서 대부분이 구면인 까닭이다.

 

▲ 이래권 작가     ©김상문 기자

 

평소 모시는 회장님과 늦은 시간에 식당에 들어섰다. 초저녁의 손님이 얼추 빠지고 마지막 한 테이블 손님들마저 막 자리를 뜨려는 참이었다. “아주머니, 딱 막걸리 한병과 김치 한가닥만 파실 수 있는가요?” 엉겁결에 나온 회장님의 다소 이례적인 청에 나는 다소 당황하며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유. 앉어유. 오랜만에 들르셨네요?”

 

칠십 중반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미륵보살 같은 얼굴과 무표정한 묵언정진 중의 동안거 스님의 얼굴로 우리를 대했다. 진중하고 편안한 충청도 할머니풍의 간결한 어투다. 안주 없이 달랑 막걸리 한 병을 주문했는데, 배추 겉절이 콩나물무침 파김치 등이 큰 접시에 깔끔하게 담겨져 나왔다. 사실 일차 소맥과 이차 생맥을 거치고도 취기가 오르지 않아 삼차 막걸리 한잔 나누고 귀가하려던 참이었다.


기독교 선지자와 박사와 출판사 사장과 언론인과 원로 탤런트와 그리고 내가 어울린 모임이었다. 불황과 암수술과 인간구원과, 사십 넘겨 싱글인 딸의 출가를 노심초사하는 부정(父情), 날로 사양화되는 종이신문 문제와, 역시 쇠락해져가는 출판업에 대한 상호 의견교류 만남이었다.

 

중림식당! 간판 상호마저 비바람에 40여년 넘게 벗겨지고 희미해져가는 만리동의 역사를 간직한 작은 쉼터. 만리동 산비탈은 한때 거대한 봉제공장촌이었다. 밤을 새워 재봉틀이 드르륵거리고 건설노동자들의 고된 노동 후 귀갓길의 항상 소란스러운 사람 냄새나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였다. 이젠 산비탈 아래로부터 서서히 아파트가 산 정상을 향해 진격중이다. 산동네 어귀 옹벽 위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선 중림식당도 언제 헐릴지 모르고, 재개발로 가난한 원주민들은 서울 외곽으로 서서히 쫓겨나고 있다. 재개발의 침공에 몰리면서도 상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1000원 노가리 안주+호프집”이나 “오븐에 빠진 닭”등 체인점으로 전환하여, 잘되면 한철장사로 버티다가 대부분 손 털고 철수한다. 시류의 빠른 트랜드를 무시하고 꿋꿋히 살아남은, 중림식당을 운영하는 온양댁 두자매가 살아남은 비결은 40년 간 제철음식으로 매일 다르게 제공하는 손맛과 인정, 가난한 잡역부에게 선듯 허락하는 외상술로 고객의 주머니 사정까지 꿰차는 배려심이다. 서울 하늘 아래 외상술 주는 데가 어디 있으랴!

 

“사십년 됐슈. 이 까짓것 손바닥만한 가게에서 무슨 떼돈을 벌것슈. 입에 풀칠하고 자식들 다 출가시켜서 더 이상 바랄게 뭐 있것슈. 다행히 돈 안 뜯어가고 찍소리 없이 즈들끼리 사는 것만 혀도 복이지요. 가끔 밑반찬이나 해줄까 이 늙은 몸이 집을 사주것슈 차를 사주것슈. 재주가 몸으로 삭신녹이는 것뿐이라 계속 이 짓을 해야지 무슨 팔자 고칠 상수가 있것슈. 다행히 단골손님들이 시나브로 찾아주시니께 고맙지 뭐유. 남들은 서방 잘만나 손에 물 안 묻히고 백년해로헌다는디 우리는 자매끼리 이 손바닥만한 식당에서 백년해로헐랑개비요. 편안히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미리 말해줘유. 낼 시장 봐서 준비해놓을랑게. 가끔씩 들르셔. 안 뵈면 괜히 궁금해지니께.”

 

퇴직 후 마땅히 할 일이 없어 급하게 뛰어든 프랜차이즈가 하루에 수천개씩  367만개의 자영업자들이 몰락 중이다. 인테리어다 가맹비다 우리 재료 써라, 이리저리 채이다가 끝내 빈민으로 전락하는 서민 창업자들은 중림식당을 교훈삼아 보라고 권고한다.

 

아련한 고향 삼거리 주막집에서 치부책에 연필을 침에 묻혀가며 외상술을 주시던 할머니의 넉넉한 마음씨다. 각박한 요즘 세태에 외상술을 주는 곳이 있을까? 있다. 서울의 한복판 만리동 산비탈에 아직도 어머니 품같이 포근하고 여유로운 선술집이다. 절집의 후덕한 공양보살 같은 두 자매는 만리동의 고달픈 재봉사와 일용직 잡역부의 일상을 그렇게 40년 넘게 감싸고 있었다.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이 달랑 네 개밖에 없고 통로가 비좁아서 출입객들이 몸을 부딪쳐도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서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자리를 잡게 해주고, 가끔씩 구면인 사람들은 권주를 건네면서 해맑은 미소와 함께 안부를 묻는다.

 

피자와 통닭에 길들여져 고도비만 천지인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서, 중림식당에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이 노동으로 단련된 분들이라서 얼굴의 잔주름 외엔 신체들이 날렵한 편이다. 삼겹살 식당에 가면 우선 곁 재료인 마늘쫑 고추 마늘이 말라있는지 보면 그 집의 흥망을 점칠 수 있다.

 

다섯 평 남짓한 식당에서 온양댁 두자매가 40년 단골을 사로잡은 것은 매일 장을 보아 새로운 제철식자재로 안주를 제공하는 일관성과 성실성이다. 그집 안주만 보아도 계절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항생제와 농약으로 농업생산성을 높여 인류의 굶주림을 면케 한 것은 과학자들의 머리지만, 다른 한편으론 각종 성인병과 암으로 가정경제의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섯 평 식당으로 온양댁 두 자매가 살림을 꾸리고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칠순 넘겨 건강과 여유를 유지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매일 장을 보아 제철음식으로 손님들의 잊혀진 향수와 계절의 변화를 알게 한다.

★외상술을 신뢰 하나로 제공한다.

 

★손님이 요구하는 대로 다음날 장을 보아서라도 요리를 뚝딱만들어 제공한다.

 

★비좁은 통로를 불편함으로 여기지 않고 중간에서 양측 손님들을 설득하여, 먼저 일어나게 하는 관용과 배려심을 무언 중에 가르친다.


★아무리 취객의 고성이 오가도 면벽승처럼 얼굴색 하나 변치 않고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묵묵히 포용하고 침묵한다. 나중에는 40년 단골고객의 침묵의 눈총에 화낸 사람 스스로 뒷머리를 긁적이게 만든다. 이른바 내공 있는 단골들이 든든한 후원자들이다. 그 단골들의 주문요구를 40년간 제공하여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지나치는 불량한 참새족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게 만든다.

 

★자매가 40년을 함께 한 연유로 굳이 손님 보다 주인이 큰소리로 떠들 필요가 없다. 눈짓이 곧 재빠른 소통이다. 주인이 손님들의 귓가를 소란스럽게 하면 그 식당은 곧 문 닫게 되어 있다.

 

만리동 산동네 어귀엔 중림식당이 있다. 40년을 함께한 온양댁 두자매가 만리동의 역사요, 노동에 지친 봉제공과 잡역부의 사랑방을 제공하여 동네 인심을 평화롭게 소통시켰다. 중림식당은 소통의 공간이자 일상의 애환을 한잔의 막걸리로 녹여내고, 공동체의 온갖 잡음과 대립을 걸러주는 필터 같은 곳이다.

 

“아주머니 안주는 필요 없고 막걸리 한 병만 마실 수 있을 까요?”
“암은요. 어서 앉으세요.”

 

이 게 중림식당이다. 만리동에서 휘청휘청 내려오는 밤길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낙양사 십리 하에~높고 낮은 저 무덤은~영웅호걸이 몇몇이냐! 절세가인은 그 누군가? 우리네 인생은 한번 가면 저 모양이 될 테인데~에라~만수~에라, 대신이야~”

 

잊혀진 고향과 마음뿐인 양노당의 어머니와, 뿔뿔이 흩어진 어릴 적 친구들이 허공에 별처럼 점점이 빛나는 밤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중림식당만 같아라! 맥도날드는 빠르지만 그저 자본주의의 시간당 생산유통 효율만을 요구 한다. 인정이 없다. 서구화된 닭과 불량 소고기 패치로 유인하는 외식산업은  손님들을 양돈장의 돼지새끼로 숫자놀음 한다. 콩나물 뿌리마저 일일이 다듬는 느림 속에는 손님을 배려하는 고된 노동과 손맛이 절여져 있다. 매정한 정크푸드 공습으로 초토화된 아날로그 재래식당이 용케도 살아남았다. 그곳에는 인정과 40년의 단골들의 일상과 함께 울고 웃는 이웃집 할매같은 푸근하고 어머니 앞에서 응석부려도 받아주는 칠순 넘긴 온양댁 두자매가 선황당 느티나무처럼 버티고 서 있다.

 

맘이 울적하고 허전하면 만리동 사람들은 산비탈을 내려와 온갖 일상사를 얘기한다. 골목 굽이굽이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땅바닥 인생들의 땀내 나는 이야기 꽃을 피운다. 굳이 말하지 않고 듣기만 해도 나와 같은 인생 고뇌 보따리를 옅들을 수 있다. 야만적인 디지털의 공습을 이기고 느리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위대한 온양댁 두 자매 할머니들께 존경과 감사를 보내며. samsohun@hanmail.net

 

*필자/삼소헌 이래권.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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