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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비운의 정치인, 그들의 발자취] ⑤김사만, 정인소, 김대중 外

김대중 전 대통령, ‘인동초’로 불리는 40여년 정치인생

김상래 기자 | 기사입력 2014/10/31 [08:52]
브레이크뉴스 김상래 기자= 성공한 정치인, 좋은 정치인의 조건으로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리더십, 도덕성, 인맥 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정치인이 최종적으로 성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행운’ 또한 빠질 수 없는 한 가지 조건으로 여겨진다. 어떤 정치인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이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지지부진하던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기도 한다. 또한 선거에서 경쟁자가 자신의 실수로 자멸하며 쉽게 당선되는 일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역시 존재한다. 다른 조건을 일정 수준 갖췄음에도 주변 인물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결정적인 승부에서 아쉽게 패배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브레이크뉴스>에서는 ‘비운의 정치인’을 선정하고 그들의 행적과 실패요인을 살펴보았다.
 
▲ 김대중 전 대통령     © 브레이크뉴스

임기 3일의 국회의원 5인방
 
제헌국회가 개회된 1948년부터 66년에 이르는 대한민국 국회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국회의원직을 거쳐 갔다. 4000명이 넘는 인물 중 역사상 가장 짧은 단 3일간의 임기만을 경험한 의원들이 있다. 실질적으로는 48시간가량의 짧은 기간 동안 국회의원직을 경험한 비운의 주인공들은 김성환·김종길·김사만·정인소 4명이었다. 당시 이들과 함께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도 '48시간 국회의원'이란 진기록에 이름을 남겼다.

이들 5명은 1961년 5월13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14일 아침 당선이 선포됐다. 하지만 16일 아침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하면서 국회의사당에 발조차 들여 보지도 못하고 의원직을 잃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정치권에 안착 했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이어진 재도전에서 낙선을 거듭했다.
 
의원의 상징인 금뱃지를 채 달아보지도 못한 최단기 국회의원인  당사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면 그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뿐이었다. 당시 불안한 정국과 군부의 권력욕이 결합돼 군사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정된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됐다면 활발한 국정 활동으로 재선에도 성공하며 승승장구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충북 괴산과 음성에서 각각 48시간 의원을 경험한 김사만·정인소 전 의원의 정치 역정은 1961년 보궐선거를 제외하고도 불운의 연속이었다. 이들은 잠깐의 의원 경험을 전후로 김 전 의원은 6회, 정 전 의원은 8회나 총선에서 패배하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특히 김 전 의원은 이전부터 괴산에서 국회의원으로 있다가 자신에게 보궐선거로 3일간 자리를 내줬던 상대와의 재대결에서 또 다시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이들의 이어진 선거 패배는 군사정변으로 잃어야만 했던 국회의원직을 더욱 아쉽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이들 5인 중 유일하게 국회 입성 재도전에 성공한 김 전 대통령은 최단기 국회의원이기도 하지만 가장 성공적 정치인생을 살았던 인물로 손꼽히기도 한다. 5선 의원을 지냈고 ‘3김 시대’의 한 축으로 정치권 전체를 이끌었다. 그는 정계 은퇴선언을 했지만 이를 번복하고 결국은 대통령에 당선됐다.
 
군사 정권 아래 고난 겪은 ‘인동초’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이 탄탄대로만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인동초’라는 그의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 김 전 대통령은 성공한 정치인으로 남기까지 역경을 겪고 극복해내야만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미 1961년 선거 이전에 3번의 고배를 마셨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당한 대결이 아닌 경쟁자가 중복추천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후보 등록을 무효화시켜 출마조차 못한 일도 있었다. 이 시기에 김 전 대통령은 배우자가 사망 하는 불운이 겹치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생활 초년기는 앞으로 있을 혹독한 시련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성장해 감에 따라 군부 독재 정권의 횡포 또한 심화됐기 때문에 더욱 고초를 겪어야 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브레이크뉴스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맞섰지만 약 8%의 득표율 차이로 패배했다. 선거기간 경쟁자인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공격 등으로 김 전 대통령은 군사 정권의 표적에 본격적으로 오르게 됐다. 이후 운전자가 사망하는 큰 교통사고를 당해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해지기도 했다.
 
이 사고에 대해 일각에서는 미심쩍은 교통사고라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김 전 대통령에게 위협을 가하기 위해 일부러 낸 사고라는 것이다. 교통사고와 관련한 의문에 대해 정확히 드러난 바는 없고 우발적 사고로 밝혀지기도 했지만 의문이 제기되는 것만으로도 당시 김 전 대통령에게 얼마나 많은 위협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유신 선포 후 미국 망명을 선택하고 일본을 방문한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됐고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가택에 연금되며 긴급조치 시대를 맞았다.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속에서도 독재정권에 투쟁을 이어가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납치 과정에서 수장(水葬)위기를 겪고 극적으로 풀려났다. 그는 군사 정권이 독재를 이어가기 위한 대선에서 경쟁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김 전 대통령이 일반적인 ‘정치활동’에만 전념하기에는 어려운 시대 상황이었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신군부 정권 하에서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73년 납치 사건을 겪은 뒤 채 10년이 지나기도 전에 또 다시 위기를 맞은 것이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구명운동으로 감형될 수 있었고 그는 두 번째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거듭된 대선 패배..정계은퇴 선언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귀국 후 김 전 대통령은 정치에 복귀했다.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료이기도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단일화에 실패하고 독자적으로 1987년 대선에 도전하지만 결국 두 전 대통령 모두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패하며 낙선했다.
▲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브레이크뉴스

이전까지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에 힘을 모아오던 양김은 유신 이후 최초로 치러지는 직선제 대선인 결정적 순간에 힘을 분산시키며 스스로 기회를 차버렸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영삼과 당권·대권 경쟁은 없다. 민주화추진을 위해 서로 도울 것”이라던 자신의 발언을 번복했고 경선 결과에도 불복하는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의 강한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개헌 이후 16년만의 직선제 대선에서 그가 염원하던 민주화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욕을 다스리지 못했다.
 
마지막 군인 출신인 노 전 대통령의 임기가 마무리되던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정면 대결을 펼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으로 영남 집결의 역풍을 맞고 패배했다. 
 
‘초원복집 사건’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정주영 당시 대통령 후보가 연루된 사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했어야 했다. 하지만 표를 분산시킬 것이라 기대했던 정 후보는 도청 사실이 밝혀지며 오히려 지지율이 하락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표를 분산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영남권의 지지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몰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선 3수’에 실패했다.
 
3회의 대선 도전에서 모두 고배를 마신 김 전 대통령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성명에서 그는 “40년의 파란 많던 정치생활에 종말을 고한다”며 “국민의 은혜를 갚지 못하고 물러나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당시 그를 공격하던 이들은 정계 은퇴 선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당선보다도 더욱 주목했다. 연일 그의 선언을 ‘아름다운 은퇴’라고 칭찬했고 ‘인동초’와 같은 그의 정치인생을 재조명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를 부각시켜 복귀에 대한 부담을 더욱 키우려했던 것이다. 그는 은퇴 선언 까지도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고난 속 김 전 대통령의 행운
 
김 전 대통령은 이처럼 40여년의 긴 정치인생에서 살해 위협, 사형 구형, 세 번의 대선 패배, 두 번의 가택연금과 망명 등 다른 사람들은 한 번 겪기도 힘든 일들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가 꼭 불운과 역경만을 겪었던 정치인은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은 서거 후에도 존경받는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자 등으로 회자되는 데에는 그만큼의 행운 또한 따랐기 때문이다.
그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재기 할 수 있었던 이유로 그를 중심으로 동교동계라는 정치 계파의 형성이 꼽힌다. 현재는 오랜 시간이 흘러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죽음의 문턱에도 수차례 섰지만 국제사회의 도움 등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두 번째 망명 이후 귀국할 때에는 미국의 저명인사들이 그를 정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직접 나서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망명이나 은퇴 선언 등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던 당시 복귀상황이 잘 맞아 떨어졌다. 김 전 대통령이 몸담고 있던 야권에서 대선과 같은 중대사를 앞두고 그의 빈자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그를 '사욕 덩어리'와 '민주화 구원투수' 사이를 오가며 국민들 사이에 있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오랜 독재가 진행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때로는 김 전 대통령을 정치권 밖으로 밀어내기도 했고 다시 끌어들이기도 하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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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단적이네 2014/11/17 [23:41] 수정 | 삭제
  • 김대중의 삼아들비리, 노태우, 김영삼한테 돈 받은 것, 북한에 핵 개발 자금 미국 몰래 지원해준것, 일제시대의 친일행적, TV에 나와서 목포 해싱빙위대라고 거짓말한거는 서술안하나
  • 777 2014/11/16 [22:01] 수정 | 삭제
  • 삼형제 비리 숨겨논 딸 핵 원조 대단하시군
  • ㅇㄴㅁㅈㄷ 2014/11/15 [22:56] 수정 | 삭제
  • 기자가 백퍼 홍어새끼인듯 김대중 민족의 대 역적을 두둔하네
  • 1189 2014/10/31 [23:32] 수정 | 삭제
  • 자랑스런 아들을 그리워하며 해서 안되는일이 없다고 소리쳐봅니다. 기상이 중천에 떠있는 별과 같이 우리의 세상을 환화게 비추어줄수 있는 모습을 바꾸고 일단 자신이 무장되어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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