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먹고 살기가 힘들다 보니 딸을 가진 집에서는 생활이 어려우면 식구 입이라도 하나 줄이기 위해 남의 집으로 보냈다. 당시 남의 아이를 맡는다는 것은 적선(積善)의 의미였으며 어려움을 나누는 정서였던 것이다. 특별히 돈 많은 집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대부분 7살부터 10살이 가장 적합한 연령으로 ‘아이보기’로 가는 경우가 대 부분이다. 삼월할머니도 그런 케이스였다. 극중에선 할아버지 집에 할머니가 시집올 때 몸종으로 왔던 것이다.
여기선 할아버지를 마음속에 두고 평생 곁을 떠나지 않은 것으로 미화되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기자가 어렸을 때 이모라고 부르는 10살여 위의 여자가 집에 있었다. 실제 이모들이 따로 계셨는데 또 다른 이모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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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의문은 왜 시집가지 않고 같이 사는 지였다.이모에게 언제 시집 가느냐고 물으면 그저 웃기만 했다. 어머니가 55세 될 때 심한 병으로 며칠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의사가 가족들에게 말했다. 당시 어머니는 학생이었던 기자와 그 이모가 제일 마음에 걸린다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이모에게 “너를 가르치지도 못하고 시집도 못 보내 정말 미안하다”라는 말을 계속하면서 그 이모의 손을 꼭 잡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도 모르게 이모가 우리집안의 가장 큰 봉사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이모도 떠날까 봐 두려웠다.
세월이 지나 이모는 누나와 함께 살게 되고 그때부터 우리형제는 항상 이모에게 진 빚을 갚고 싶었다. 극중에 나타나는 하단아의 마음 같았다. 얼마 전 누나와 통화를 하니 이모가 며칠 전에 양로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모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세월이 지나도 우리와 헤어져 산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모를 양로원에 보내 놓고 이틀 동안 울었다는 누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슴을 여민다. “너무 아팠냐”는 질문에 누나는 “나도 60대 중반인데 이모 시중 들기가 너무 어렵고, 목욕을 시키려면 같이 쓰러질 만큼 힘들었다”는 이야기다. 이어서 “이모가 우리에게 어떤 이모냐. 이모가 한달 동안 가 있다가 싫으면 다시 오겠지만 그래도 너무나 슬퍼 한 동안 정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평생 고생만 하던 분들이 노후에라도 안 아프고 편안해야 공평한 세상인데 세상에선 더 힘들게 생(生)을 마감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드라마에서도 삼월할머니가 치매로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끝날 것 같다. 가족들의 애절한 슬픔 속에 양로원으로 갈지 아직 예상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되지 않겠나. 그래서 불공평한 것도 세상살이고, 공평한 것도 세상살이처럼 보인다.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가장 공포로 들리는 단어가 ‘양로원’이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오랜 병고에는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그 만큼 병간호가 힘들고 환자 하나로 인해 전 가족이 힘들게 되어 결국엔 양로원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삼월할머니는 그래도 명문가에 살면서 조금은 걱정 없이 살았지만, 우리 이모는 그렇지 못한 환경 속에서 어머니의 꾸중을 들으며 자기 목소리 한번도 내지 못하고 우리를 키우고 그 아래 손자와 손녀를 길러 주고 또 증손자, 손녀까지 맞았다.
한 여자가 일생에 3대를 보고 산 것이다. 그런 고생 끝에 이제는 양로원 침대 위에서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이모의 손을 잡고 싶지만 여의치 못한 사정이 가슴 아프다. 어렸을 때 기억에 이모는 우리가 잘못하는 것을 꼭 어머니에게 고자질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때는 이모가 미웠다. 간혹 심한 골탕을 먹이기도 하고, 어머니는 이모의 잦은 고자질에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情)이 깊게 들었는데 앞으로 몇 년 밖에는 못 살 거라니…
이모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세상없어도 매주 꼭 ‘가문의 영광’에서 삼월할머니를 본다. 토요일과 일요일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드라마가 조금 있으면 끝날 것 같은데 그 때까지 이모의 건강이 좋아지기를…
dyk47@yahoo.com
*필자/미주 주간현대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