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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봉과 문예대사전

송현 시인이 본 아름다운 세상

송현(시인. 본지 주필) | 기사입력 2009/06/17 [11:32]
▲송현(시인. 본지 주필)    © 브레이크뉴스


 

 
 

 

나는 전기 대학 입시에 떨어졌다. 할 수 없이 후기대학에 들어갔다. 그 무렵에는 학생들이 학교 뺏지를 달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뺏지를 달지 않는 것 같았다. 일류대학생들은 당당하게 뺏지를 달고 다녔는데, 이류, 삼류대학생들은 좀처럼 뺏지를 달지 않고 다닌 것은 아마 학교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을 것이지 싶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뺏지를 달고 다녔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뺏지를 달지 않는다고 내 속에 있는 열등감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학교 간판으로 경쟁하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실력을 쌓아서, 내 속에 있는 열등감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대학생들과 실력으로 겨루어 보는 수밖에 없다. 좋다, 어디 한 번 겨루어 보자!“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순간 내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1468년 포르투칼의 탐험가 디어스는 아프리카 대륙 남방을 탐험하고 돌아와서 왕에게 보고 하러 갔다. 왕이 물었다.

"그래, 자네가 가보니 거기가 어떻던가?"

"폐하, 그곳은 폭풍이 심하고 격류가 흐르는 봉우리였습니다. 그래서 거기 이름을 “폭풍과 격류의 봉우리”라고 지었습니다."

왕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디어스가 다시 설명했다.

"폐하. 정말입니다. 그곳은 무서운 폭풍으로 바다는 사납게 울부짖었고, 파도는 배를 삼킬듯이 거세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왕이 온화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알겠네. 내가 그대의 말을 의심해서가 아니네. 그대가 말한 대로 “폭풍과 격류의 봉우리”라고 이름을 붙여놓으면, 아무도 그곳으로 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름을 지어주마. 거기를 <희망봉>으로 하라!" 

왕은 나이가 많았으며, 세상만사를 훤히 꿰뚫어 보는 현인이었다. 희망봉이라는 이름이 알려지자, 그 뒤에 그곳으로 가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희망봉!

참으로 멋지고 기막힌 이름이다. 


당장 나의 희망봉을 하나 만들겠다는 각오를 하고 대학도서관에 갔다. 학원사에서 발행한 문예대사전을 대출 받았다. 

 
그 무렵 국문과 학생에게는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여 시인이나 소설가란 면허증(?)을 따는 것이 가장 큰 꿈이었다. 나는 문예사전을 책상 위에 놓고 허겁지겁 "ㅅ"항목을 찾았다. 국문과 일학년 신입인 지 동파 이름이 거기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지만, 나는 침착하게 "ㅅ"항목을 찬찬히 훑어가면서 내 이름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는 혹시 누가 보면 어떨까 염려가 되어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마침 보는 이가 없어 다행이었다. 나는 볼펜으로 끼움표를 하고, 내 이름을 거기에 써 넣었다. 

송 현

그 뒤 어느 날 학생 휴게실 게시판에 “제 3회 동아문학상 작품 모집” 포스트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모집 장르가 시. 소설. 수필. 평론 등이었고 상금도 만만치가 않았다. 기간도 충분했다. 그 포스터 앞에서 나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저 상은 반드시 내가 받아야 한다. 문예대사전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여러 해 뒤에 내가 닿아야 할 희망봉이고, 올해 당장 내가 닿아야 할 희망봉은 저 동아문학상이다.”

그날 온 종일 내 머릿속에는 올해 닿아야 할 희망봉 생각뿐이었다. 저녁에 자취방에 돌아와서 올해 닿아야 할 희망봉에 대해서 온갖 궁리를 다 했다. 새벽녘까지 머리를 짠 결론은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소설 부분에 응모할 것
둘째: 당선 소감을 미리 쓸 것
셋째: 상금 용도를 정할 것
넷째: 작품 소재를 정할 것

그날 밤 나는 소설 한줄 쓰지도 않았고, 응모도 하지도 않았는데, 당선소감부터 썼다. 그리고 상금을 받으면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서 계획을 다 세웠다. 

겨울 방학 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쉰 다섯 되던 핸가 꿈에 저승사자가 와서 앞으로 5년 뒤에 잡으러 오겠다는 말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5년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5년 뒤에 저승사자가 잡으러 오지 않았다는 요지의 황당한 이야기를 소재로 좀 붙이고 빼고 하여, “포기령”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을 응모하여 제 3회 소설부 동아문학상을 받았다. 그해 희망봉에 닿은 것이다.

시를 쓰는 선배와 친구들이 소설을 깔보는 경향이 있는 것을 알고, 열을 받았다. 다음 해에 는 시부문에 상을 받는 것을 희망봉으로 정했다. 다음 해에 월남전을 소재로 한 “격전지”라는 시를 응모하였다. 제 4회 시부 동아문학상을 받았다. 한 학생이 시부문과 소설 부문의 상을 받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대학 졸업 후 부산서 중학교 선생 노릇을 몇 해 하다가 1974년 상경하였다. 이듬해에 월간 “시문학”지에 미당 서 정주 선생 추천으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러고 보니 대학 일학년 때 내손으로 문예대사전에 이름을 올린 날로부터 십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 마침내 나는 두 번 째 희망봉에 닿은 것이다. 나는 희망봉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벅차 오른다.**(www.songhy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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