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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볼일을 다 보고 귀가하려고 좌석버스를 탔다. 마침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빈자리에 앉으면서 창 쪽에 앉은 손님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눈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십대 후반의 긴 머리 아가씨였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갑자기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전율했다. 그토록 몸서리치게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보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의 옆모습을 찬찬히 쳐다보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엄청 예쁜 내 자취방 주인집 미옥이 누나도 저리 가라고, 우리 동네에서 제일 예쁜 내 여자 친구 영분이도 저리가라였다. 아니다. 그딴 수준이 아니다. 미스코리아도 저리 가고, 김 지미도 저리가고 엄 앵란도 저리가라였다.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이런 일은 행운이라면 행운이고 기적이라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행운이라면 천운이지 싶고 기적이라면 은총이지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 내가 축복 받을만한 좋은 일을 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나라를 위해서도 민족을 위해서도 이웃을 위해서도 좋은 일 한 게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온 종일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이집 저집 헌책을 뒤진 일 밖에 한 것이 없다.
내가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을 의식한 그녀는 창밖으로만 시선을 돌리고 내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이 도도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아름다움은 신비했다.
2.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의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거나, 하루 밤을 같이 자는 것은 그야 말로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했다. 내 주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지 이름 없는 사립 중학교에 국어 선생을 하는 내 신세가 엄청 초라하게 느껴졌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대학교수도 아니고 고등학교도 아니고 겨우 중학교 국어 선생 하는 문학청년에게 관심을 가질 리가 없을 것 같았다. 내 생각이 여기까지 내 처지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3.
나는 야망을 꿈꾸지 않았다.
"저 아름다운 미녀와 “차만 한잔” 마실 수만 있다면!"
이 젓이 내 간절한 소망이었다. 저 아름다운 여자의 손목을 잡아보지 않아도 좋다. 저 아름다운 여자와 입맞춤을 하지 않아도 좋다. 저 아름다운 여자와 하루 밤을 자지 않아도 좋다. 다만 차만 한잔 마실 수만 있다면 나는 원도 한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고 계속해서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버스는 “서면”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내가 내릴 정거장은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작전을 짜야 좋을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말부터 걸어봐야 할 것 같았다.
--실례지만 어디까지 가십니까?
아니다. 이런 촌스런 멘트로는 어림없을 것이다. 더 세련되고 고상하고 멋진 멘트를 날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내 머리를 짜고 흔들어도 좋은 멘트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내리면 따라 내려서 작업을 해 본다? 아니다. 이것은 아주 구질구질한 낡은 수법이다. 사내가 여자 꽁무니를 따라가면서 수작을 건다는 것은 한없이 세련되지 못한 빛바랜 수법이다.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그러면 뭐란 말인가. 나는 내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4.
한 정거장이 남았다. 그녀는 자세나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계속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보다 더 멀리 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번 정거장에 버스가 멎으면 그녀를 포기하고 내리든지 계속 앉았다가 그녀가 내리면 따라 내려서 수작을 걸어보든지 택일해야 한다. 그런데 그녀를 따라 내려 수작을 거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촌스런 수법 같았다.
그렇다면 길을 하나이다. 포기하고 이번에 내려야 한다! 내가 정거장에 내리는 순간 그녀는 내게서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이름도 성도 모르고 집도 절도 모르는 미녀를 어느 세월에 어느 하늘 아래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버스가 정거장에 섰다. 궁즉통이랬다고 그 순간 재빨리 내 손목시계를 풀어서 그녀의 손에 강제로 쥐어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주 일요일 오후 세시에 시청 앞에 있는 코스모스다방으로 나오세요!"
나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 쪽으로 뛰어나와 도망가듯이 차에서 내렸다. 내가 내리자마자 버스는 금세 출발했다.
“ 휴우!"
나는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나는 멀어져 가는 버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5.
그날 자취방으로 돌아온 이후로 나는 그녀의 생각으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심음을 전폐까지는 아니었지만, 전폐에 근접했다. 입맛도 없고 밥맛도 없었다. 내 머릿속은 온통 돌아오는 일요일 오후 세시에 그녀가 나올까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 때문에 난데없이 나는 열병을 앓았다.
일요일이 되었다. 나는 간밤을 뜬 눈으로 세웠다. 거울을 보니 눈이 휑한 것이 심하게 앓은 것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집에서 두시쯤에 나가면 시청 앞 약속 장소에는 세시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인데도 두시까지 집에서 앉아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찍 나가서 차라리 용두산 공원에 가서 그녀가 나올 경우 어떤 멘트를 날려야 할 것인가를 궁리도 할 겸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용두산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다가 보이는 벤치 중에 빈 것이 눈에 띄었다. 벤치 중앙에 혼자 앉았다. 그녀가 나오지 않을 경우는 할 수 없고, 만약 나올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대책을 마련하였다. 별별 멘트 별별 궁리를 다했다.
6.
나는 오후 3시 10분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다방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녀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다방 안을 둘러 보았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다방 카운터 뒷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3시 5분 전이었다. 그야 말로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3시가 되었다. 내 몸의 피는 다 마른 것 같았고, 이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 동안 며칠 동안, 그리고 오늘 오전 내내 용두산 공원에서 별별 상상 별별 궁리를 다해서 짠 작전과 멘트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완전히 진공상태가 된 것 같았다. 내 몸이 다 풀렸다. 일어설 기운도 없었다.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 다방 문이 열렸다.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으로 문 쪽을 처다 보았다. 긴 머리 미녀가 노란 바바리코트를 입고 들어오고 있었다.(www.songhy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