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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에서는 비(貔, 표범과에 속함)가죽과 붉은 표범가죽, 누런 말곰 가죽 등을 중국에 예물로 가져간 것으로 보아 귀한 상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관자』 「규도」편에 제나라의 환공과 관중이 나눈 다음의 대화에 중국 등이 고조선의 표범가죽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이고 구입하고자 했던 내용이 서술되어있다.
관중은 고조선의 특산물로 빛깔이 화려하고 무늬가 아름다운 범과 표범류의 가죽인 문피를 7가지 중요 특산물 가운데 3번째로 꼽았다. 당시 문피는 요동지역에 위치한 척산에서 생산되는 것을 최고급품으로 삼았다. 척산은 고조선에 속해있던 곳으로 관중은 중국이 발해를 건너 요동에서 고조선으로부터 고급 문피를 구입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들의 교역품을 받아들인다면 중국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책을 내어놓았던 것이다.
또한 새털로 만든 고급 모직물 옷인 타복(毤服)도 문피와 함께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관자 「경중갑」편에는 당시 중국의 주나라가 변방민족들의 침략으로 여러 후국들이 멸망의 위기에 놓여, 제나라의 환공이 관중에게 해결책을 물었던 내용이 있다. 관중은 그들의 특산물을 비싼 값으로 사준다면 교역을 위하여 공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책을 제시하였다. 즉 고조선의 문피와 타복을 교역품으로 한다면 그들은 8천리나 먼 곳에서도 교역을 위해 내조할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 예전에는, “무늬가 아름다운 표범의 가죽이 많고, 과하마가 있으며, 바다에는 반어가 나는데, 사신이 올 때마다 이들을 바쳤다”고 하여 지금의 강원도 지역으로 옮겨간 예에서 그 특산물인 문피와 반어피를 동한의 사신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중국과 인접해 있던 고조선과 예 등이 춘추시대 이전에 이미 그들의 특산물인 문피와 타복, 반어의 가죽을 중국 등지에 수출했음을 알 수 있다.
숙신은 제순(帝舜) 25년(서기전 2209년)에 중국과 접촉하였고, 상·주교체기에도 중국과 접촉하였다. 즉 서주 무왕이 상을 멸망시키자 숙신이 호나무로 만든 화살과 돌화살촉을 보내 왔고, 무왕은 그의 딸이 결혼할 때 그 화살에 ‘숙신이 보낸 화살’이라고 글을 새겨 사위인 진후에게 배반하지 말라는 뜻으로 주었다. 이처럼 숙신의 화살이 중국에 알려졌듯이 그들이 만든 모직물도 일찍이 중국에 알려졌을 것이다.
가죽은 일반복식의 재료가 되기도 하지만 특수복식인 갑옷에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고조선 유적인 영성 소흑석구유적에서는 금속 갑편과 함께 청동투구가 출토되었는데 투구위에 4가닥의 가죽 줄이 부착된 흔적이 있어 발굴자들은 투구를 쓴 다음 가죽 끈으로 묶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갑옷위에 걸쳐 입었을 큰 새 털옷도 함께 출토되어 전쟁 시 새털이 방한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게 한다.
또한 고조선의 유적인 심양시 정가와자 6512호 무덤과 누상무덤에서 묘주의 가슴과 다리부분에서 많은 량의 청동장식 단추가 출토되었다. 이것은 묘주가 청동 단추를 단 가죽옷과 신발을 신었던 것을 알게 한다. 고조선에서는 화려한 청동 장식이 빼곡히 달린 의복과 가죽신발을 신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전쟁터에서는 갑옷의 역할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에서는 신분에 구별 없이 성인 남자 모두 가죽 모자를 쓰고 누런 가죽신을 신고 무늬가 없는 가죽 띠를 착용했으며, 부여와 한에서도 가죽신을 신었다.
신발은 복식 가운데 가장 많은 수요를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짐승 가운데 가장 많이 생산되는 돼지가죽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돼지는 사육이 빠르기 때문에 가죽을 대량으로 쉽게 얻을 수도 있고 털이 적은 동물은 털이 많은 동물보다 가죽이 질기고 강한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의 재료로서 적당했을 것이다.
부여는 건국신화에 돼지우리와 마구간이 등장하고, 짐승의 이름이 관직명으로 사용된 것을 보아 목축업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토성자유적 대부분의 돌관무덤에서는 돼지의 이빨과 뼈가 대량으로 출토되어 부여에서 돼지를 많이 길렀음을 알 수 있다. 숙신에서도 돼지를 많이 길러 고기는 식용으로 하고 가죽과 뼈는 갑옷을 만들고 털은 짜서 포를 만들었다. 읍루에서도 돼지를 많이 길러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다.
고구려에서는 사슴과 멧돼지가 많이 사냥되었다. 부여에서는,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전에 의하면,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 가죽신을 신었다. 외국에 나가면 두텁게 짠 사직물 옷‧물들인 오색실로 짠 사직물에 수놓은 옷‧푸른빛의 모직옷을 즐겨 입고, 대인은 여우‧너구리‧희거나 검은 담비가죽으로 만든 옷을 위에다 더 입었으며, 또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했다”고 하여 부여에서는 여우‧너구리‧담비가 많이 나고, 좋은 말과 담비‧놜(豽)이 모피의 재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담비가죽은 숙신에서도 생산되었고, 동옥저에서는 담비가죽으로 조세를 받을 정도로 많았다.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는 당시의 사냥 활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수렵도가 많아 이 같은 벽화의 내용으로부터 당시 복식의 재료로 쓰인 동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풍부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안악 제3호 고분벽화 육고도에는 꿩‧멧돼지‧노루 등을 걸어 놓고 훈연을 시키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이 동물들은 이미 털이 벗겨진 상태다. 이는 사냥에서 잡은 짐승의 고기를 훈연시켜 베이컨과 유사한 식품으로 저장하였음을 말해 주기도 하지만, 동물의 몸체가 분리되지 않은 채 털이 벗겨진 점으로 보아 이는 털이나 가죽을 복식의 재료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고조선에서는 복식의 재료로 사용된 가죽과 모피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양이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동물들의 가죽과 모피 등은 높은 수준의 가공기술로 이웃나라와의 교역상품이 되기도 하고 사직물이나 모직물, 면직물 옷, 삼베옷, 솜옷 등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고조선 복식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면 고조선의 모직물 생산수준은 어떠하였을까? 고조선지역에서 고급 가죽과 모직물을 생산하여 중국에 수출하였음을 앞에서 서술하였다. 실제 유물을 통해 모직물 직조기술과 가죽 가공기술이 어떠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고조선 중기인 서기전 1000년기초에 해당하는 길림성 영길현 성성초 유적 17호 돌널무덤에서는 양털과 개털을 섞어서 짠 모직물로 묘주의 얼굴을 덮어진 모습이 나타난다. 성성초유적에서 출토된 평문조직의 모직물은 오늘날 생산되는 것보다 다소 거칠지만 비교적 정교한 모직물이다. 이 직물이 생산된 시기가 중국의 상시대 말에서 서주 초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 지역에서 생산한 모직물이 중국에 알려진 것은 이보다 훨씬 앞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기전 4세기 무렵에 속하는 예족의 유적일 것으로 추정되는 서단산문화유적에서도 모직물 조각이 마직물과 함께 출토되었다. 고조선에서는 말꼬리털로 짠 모직물을 생산하기도 했다. 숙신에서는 돼지털로 모포를 짰고, 고구려에서도 돼지털로 짠 모직물인 장일(障日)을 생산했다. 이러한 돼지털을 재료로 한 모직물 생산은 고조선의 기술을 이었던 것이다. 고조선은 중국 보다 앞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돼지를 사육했기 때문에 돼지털 직물도 일찍 발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 중국에서는 모직물이 거의 발달되지 않았다. 상나라 후기에 속하는 하북성 고성 대서촌유적에서 마직물과 함께 양모 한 올이 출토되었을 뿐 모직물이 발견된 예가 없다. 한대에 이르러서도 모직물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 그 수준도 낮았다. 따라서 모직으로 만든 옷은 가난한 사람이 입는 옷으로 인식되었고, 고급 모직물은 고조선과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에서 수입되었다.
후한서 「동이렬전」 마한전에는, “금, 보화, 물들인 실로 짠 금(錦)과 푸른 새털로 짠 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으며……”라는 내용이 보인다. 계는 꿩과의 갈치의 털로 짠 푸른빛의 모직물이다. 계는 춘추시대 고조선이 중국에 수출했던 타복과 같은 종류이다. 마한에서는 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생산량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도 증(繒)‧수(繡)‧금(錦)과 함께 아름다운 색을 띤 계를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복식의 재료들은 고조선의 기술을 이은 것으로 우수한 직조기술과 높은 문화가 아니면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이후 신라와 백제에 이어져 구유(氍毹)‧구수(毬𣯜)‧탑등(㲮𣰆)‧탑등(毾㲪) 등의 덮개와 깔개(카페트)를 생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들 상품을 외래품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조선의 모직물 직조기술은 가죽의 가공기술과 그 역사를 같이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되어, 계에 이어 새로운 생산품으로 출현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고조선 지역에서 품질이 우수한 가죽과 모피 제품을 많이 생산하고 수준 높은 직조기술로 다양한 모직물을 생산할 수 있었던 기반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사냥과 목축업을 통하여 동물자원이 풍부했고, 둘째는 중국과 북방 지역보다 청동기와 철기의 생산 시작연대가 훨씬 앞서 가공도구와 생산기술 방면에서 이른 발달을 가져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 고조선의 가죽과 모피, 모직물 생산 수준은 이웃나라보다 상당히 앞섰음을 알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지배계층에서만 모직물이 사용되었던 것과 달리 고조선에서는 가죽과 모피, 모직물이 복식재료로서 이미 대중화한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박선희. 상명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