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혼인제도에 남자가 정실正室을 두고 또 측실側室을 두는 제도가 있었다. 남자가 가정의 주인이 되는 가부장적家父長的인 제도가 정착이 되면서 생겨난 제도였다.
이 제도를 그대로 실행한 시대가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인 조선시대와 단군조선을 계승한 조선왕조시대였다. 조선시대에 단군왕검은 정실로 웅심국왕의 딸을 두었고, 측실로 비서갑(부소갑)의 딸 하백녀를 두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사대부들이 사대문 안에 정실을 두었고, 사대문 밖에 측실을 두고 2집 살림을 하였다. 천문에서 정실은 직녀를 의미하였고, 측실은 수녀를 의미하였다.

명두. 천부삼인을 명두라하였다. 천부삼인은 해, 달, 칠성이다.
이 제도를 그대로 제사로 만든 것이 칠석제였다. 측실을 두는 사내의 부인들이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지냈다. 본부인마님이 제주가 되어 직녀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 제사는 정실부인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제사였고, 가모장적家母長的인 제도의 확인을 의미하는 제사였다. 그러므로 제주祭主인 제관祭官과 제사를 돕는 배관配官인 향관享官이 모두 여자가 되었고, 여자들이 후원의 중문을 닫아 걸고 철저하게 비밀주의를 고수하였다. 이날 제사만은 남자들에게 발언권이 전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제도가 생겨나게 된 것일까?
칠석제의 주인공인 견우는 2부인을 두었는데, 정실은 자미원에 사는 직녀였고, 측실은 북방현무칠수北方玄武七宿에 사는 수녀須女였다. 칠월칠석 날 우물가를 청소하고 견우의 정실인 직녀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제관인 정실이었다.
필자는 우리 나라 제사의 효시가 칠석제에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한반도에서 적어도 15,000년 전에 농사를 지었고, 일찍이 제물을 담을 수 있는 토기와 청동기를 발명하여 제물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청원의 소로리 토탄층에서 15,000년 전에 재배한 볍씨가 고고학 팀(충북대, 서울대, 단국대, 한국자원연구소)발견되어(1997년 11월~‘98년 4월) 이를 고고학적인 검사를 거쳐(세계벼유전학학술회의(2000년 10월 22일~27)에서 발표되었고, 이 사실을 영국의 BBC인터넷판이 보도하여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의 명두 네브라천반. 우리의 명두보다 화려하고 복잡하다.
15,000년 전은 한국, 중국, 일본이 하나의 대륙으로 묶여 있던 시대였다. 또한 5,500년 전에 한반도에서 오곡(쌀 보리 밀 조 기장)을 농사지어 먹었음을 알 수 있는 오곡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는 부계시대가 아니라 모계시대로 여성들이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아가던 母系族姓의 시대였다. 오곡의 생산과 토기의 생산은 필연적으로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조상숭배사상을 발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계시대에는 조상의 신상으로 장손長孫을 모시고 제사지냈는데, 이를 시동신상尸童神像이라 하였다. 아들이 처가로 장가가서 첫 아들을 낳아 시동신상으로 모시고 제사지낼만한 나이가 되어야 본가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를 장가간다고 하였고, 처가살이라고 하였다. 이때엔 제사지내는 권한을 집안의 최고 어른 할머니가 쥐고 있었다.
우리가 칠월칠석을 중요시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유월장마를 그치게 하자는 데에도 있었다. <태백일사太白逸史>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 나만에게 후손 하백이 있었는데, 장마 때가 되면 은하수를 건너가서, 하나님과 담판을 지어 비를 그치게 해주겠다.”
는 허락을 받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날은 1월부터 6월까지 생성된 극성한 양기가 음기로 대체되기 시작하는 날이다. 7월~12월까지 음기가 서서히 왕성해진다고 보았다. 양기가 음기로 대체되는 칠월칠석 날은 비가 그치는 날이었다. 그래서 칠석제를 다른 말로 지우제止雨祭라고도 하였다.
칠월칠석날 나이 든 부녀자가 장독대에서 우물을 청소하고 직녀제를 지내는데, 이 제사에는 하늘의 적수積水별자리에 고인 새 물을 받았다. 이때 음기를 상징하는 여자가 제사를 지냈다. 이때가 양기가 극도로 쇠약해지는 때였다.
칠월칠석 날 여자만 제사를 지냈던 이유가 천문에 있었던 것이다. 견우가 칠월칠석 날 하늘과 땅을 오가는데, 이를 한자로 쓰면 천지인天地人이 되고, 또한 무巫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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