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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황족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3)

박관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10/27 [07:26]
이미 2회에 걸쳐서 의친왕의 전반적인 생애를 살펴 보았는데, 필자가 오랫동안 의친왕을 연구하면서 절실히 느낀 점은 그에 대한 평가가 한마디로 극과 극이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독립운동가들과 다양하게 교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한 면이 있는 반면에 또 한편으로는 술과 여인들을 가까이 하였던  양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 의화군   ©브레이크뉴스
그런 의미에서 의친왕의 팔십평생(八十平生)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구체적으로 다룸에 있어서 하나의 원칙을 세웠으니 20년 넘게 의친왕가와 인연을 맺고 있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서술할 것이며, 특히 의친왕의 부정적인 모습까지 미화(美化)시킬 마음은 결코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삶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 가기로 하겠다.     

의친왕은 지금으로부터 136년전인 1877년 3월 30일 고종황제(高宗皇帝)의 5남으로서 당시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 상패개 자하동에 있었던 철종의 후궁 범숙의(范淑儀) 처소에서 출생하였는데 그가 태어난 범숙의궁(范淑儀宮)은 현재 종로구 창성동 일대라는 사실을 지난 2008년 현장답사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여기서 의친왕의 출생연도와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로운 사연이 있어서 소개한다.

의친왕의 7남 이해청의 출생연도가 1921년인데 공교롭게도 그의 출생일이 의친왕과 같은 3월 30일이라는 점이니 부자(父子)간에 참으로 특이한 경우라 아니할 수 없다.

참고로 이해청은 2012년 브레이크뉴스에 그의 서거 60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관련칼럼을 시리즈로 소개한 바 있는데,그는 황손들중에서 유일하게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이는 필자가 서울대학교 졸업생 명부에서 직접 확인한 것이라는 점을 밝혀 둔다.
의친왕의 생모(生母)가 되는 장 귀인은 효종의 장인으로서 조선왕조 4대 문장가의 일원(一員)으로 알려진 장유(張維)의 후손이 되는데 어떠한 연유로 입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범숙의(范淑儀)를 모시고 있는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있던 중에,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승은(承恩)을 입어 의친왕을 출산하였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명성황후에 의하여 탄압을 받은 끝에 장 귀인은 의친왕과 함께 출궁되어 친정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장 귀인이 장유(張維)의 후손이라는 것은 명확히 규명되었지만 출생 연도와 서거연도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필자는 순종실록부록 2권 4년(1911년) 3번째 기사에 “장 귀인의 묘소를 남부 두모포 화양정으로 이장(移葬)하는 경비를 정하다”라는 기록을 통하여 장 귀인이 적어도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난 1907년 이전까지는 생존하였다고 본다.

장 귀인은 의친왕을 출산한지 23년이 되는 1900년에 숙원(淑媛)으로 승차(陞差)하고, 그로부터 6년뒤가 되는 1906년에 정식으로 귀인(貴人)의 첩지(帖紙)를 받게 되는데 필자는 장 귀인이 1906년에 서거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한 근거는 영친왕이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된 것이 1907년인데, 장 귀인이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영친왕이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장 귀인의 서거시기를 1906년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장 귀인의 묘소와 관련된 문제를 논한다면 1911년 화양정으로 이장(移葬)하기 전에 최초의 묘소가 있었던 곳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으며 1911년에 이장(移葬)한 묘소를 1965년 서삼릉(西三陵)으로 다시 이장(移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의친왕의 장남인 이건(李鍵)이 남긴 “왕가(王家)의 낙조(落照)”에 “의친왕이 약주만 드시면 그렇게 당신 어머니의 비참한 삶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내용이 있는데, 과연 장귀인의 생애가 어떠하였길래 의친왕이 그리도 비통해 하였는지 궁금하게 생각되는 대목이다.

한편 황제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평탄하지 못한 삶으로 시작하게 된 의친왕은 외삼촌으로 부터 학문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그의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데,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필운학당(弼雲學堂)에서 공부하였다는 점인데, 그렇다면  필운학당(弼雲學堂)은 어떤 곳이었는지 살펴 보기로 하겠다.

필자가 이 필운학당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지난 2008년 의친왕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자료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인데, 이러한 자료를 발견하기 전까지 의친왕이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는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의친왕의 유년시절(幼年時節)이 거의 공백기인 상황에서 이러한 필운학당의 존재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의친왕을 포함하여 이종훈,오세창,권동진,윤치소가 필운학당에서 동문수학(同文受學)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필운학당의 존재와 의친왕과 함께 동문수학한 인물들까지는 밝혀졌는데 좀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학당이 위치하고 있던 장소를 비롯하여 교육과정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의친왕이 필운학당에서 수학한 점은 유년시절의 공백기를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평가한다.

이와같이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외가에서 보낸 의친왕이 마침내 그의 나이 15세가 되는 1891년에 명성황후가 당시 왕세자이었던 순종황제의 후사를 염려하여 다시 궁궐로 불러 들인 이후 그 이듬해 의화군(義和君)으로 책봉(冊封)되었다. 이후 1893년에 연안 김씨 문중 김제남의 후손 김사준의 딸과 길례(吉禮 : 왕자의 결혼)를 올렸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저술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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