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 자칫 일생을 망칠 수도 있는 방심을 막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존심(存心)을 찾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인간의 착한 본성을 잊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은 남의 불행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애써 그냥 지나쳐버리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은 누구나 옳지 못한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저지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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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나에게서 멀어진 양심의 마음을 다시 불러 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 헤매는 양심을 다시 내 몸속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존심인 것입니다. 보존할 存자에 마음 心자, 마음을 다시 잘 보존한다는 뜻이죠. 사람들은 자기가 기르던 애완견이나 고양이가 집을 나가면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자신의 착한 마음이 도망나간 것은 찾을 줄 모른다고 맹자는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얼굴이 조금 남에게 처진다고 생각하면 성형외과를 찾아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TV 연속극을 보면 여배우들의 얼굴이 거의 다 비슷합니다. 모조리 자신의 얼굴을 뜯어고쳤기 때문이죠. 그러나 상처 나고 찢겨진 마음은 얼마나 돌볼까요? 여기저기 양심이 밖을 헤매고 있어도 도무지 찾을 줄을 모릅니다, 남의 불행을 당연히 여기고, 옳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 도무지 부끄러워할 줄 모르며 사는 세상이 어찌 바른 세상이겠습니까?
그야말로 방심의 시대입니다. 옳고 그른 것이 거꾸로 되어 있고,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시대는 우리가 꿈꾸는 맑고 밝고 훈훈한 도덕의 세계가 아닙니다. 존심의 시대는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이 넘치는 시대입니다. 가출한 방심을 다시 찾아 내 몸속에 잘 보존해야 하는 것이 존심입니다. 마음이 찢기고 상처 난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어야 할 이야기가 아닐 런지요?
대개 어떤 일이든지 처음 시작할 때에는 태산도 무너뜨릴 기세로 열과 성을 다해 물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추진을 합니다. 그리고 실패를 하지 않으려고 조심도 하며, 계획대로 일이 진행이 될 때에는 마치 금방이라도 천하를 얻은 듯이 신바람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것을 도중에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여간 드문 것이 아닙니다. 일이 순조롭게 계획대로 잘 진행이 되든지, 아니면 난관에 봉착하여 힘에 겨울 때에는 그만 처음 마음을 놓아버리고 방심하거나 포기를 하고 말죠.
이러한 것이 곧 모든 일에 있기 마련인 순경(順境) 또는 역경(逆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대비하는 마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결코 중도에 자만하여 방심하거나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역경 하나 없이 일사천리로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인지상정이죠. 그러나 일이 잘 풀릴수록 미리 주의하고 조심하여 대비하는 자세가 바로 존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심은 어느 순간에도 방심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일 시작하기 전에는 긴장하고 있다가 성공했다고 방심한다면 존심이 없는 것이죠. 본래 마음이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마음은 우물의 물과 같아서 쓸 만큼은 늘 퍼내도 줄지 않습니다. 그대로 두어도 넘치는 법이 없죠. 그러나 좋은 우물도 오래 쓰지 않으면 물이 변해 먹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때도 없이 함부로 퍼내면 마르게 되죠. 존심이란 바로 이러한 자연의 조화처럼 한 결 같이 대처하려는 마음가짐 아닐까요?
어느 절에 말 끝 마다 ‘제까짓 게 뭐야’ 하며 아주 잘난 척, 거드름 피우기를 좋아하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수행은 혼자 다 하는 양, 최고 어른으로 모시고 있는 방장(方丈)스님에게 마저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비방을 일삼습니다. 자기 존재를 과시하려는 행동이었죠. 다른 스님들 앞에서도 도인 흉내를 내며 거만을 떨 때는 말 그대로 꼴불견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절의 기강을 잡는 책임자인 입승(立繩)스님에게 3000배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스님의 속마음은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그러나 이 선방에서 같이 살고 싶으면 반드시 내려진 경책(警策)을 달게 받아야만합니다. 그 벌이 싫어 도망을 가면 그는 어디 있든 절 집안에 붙어 있는 이상 낙인찍힌 인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한번 내려진 경책은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3000배 경책은 대중 스님들의 교대 감시 속에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지요. 그토록 오만하고 건방지던 스님은 그 이후로 하심(下心)할 줄 아는 참다운 수행자가 된 것입니다. 3000배를 하는 동안 존심을 챙겨 보니 ‘잘났다.’고 으스대던 자기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떠돌든 방심을 찾아 안으로 존심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참 수행자가 된 것이지요.
존심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 방심을 여의고 존심을 세워 우리네 인생에 참 희락(喜樂)을 찾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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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자/김덕권. 시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