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며 신학자인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필자의 젊은 가슴을 콕콕 찔러대던 바늘이었습니다. 셀 수 없는 다양한 학문의 경지가 ‘걸어 다니는 우주’로 느껴진 그를 찾아 국립중앙도서관 구내식당에서 많은 끼니를 해결하던 젊은 날이 있었습니다.
사제인 아버지의 비켜 간 젊음의 사생아로 태어나 10대에 죽음의 바람으로 강타한 전염병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그는 수도원에서 책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후 1492년 26살 나이에 사제가 되었던 그는 돈이 생겨나면 가장 먼저 책을 샀던 삶에 걸맞게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통달한 당대 최고의 석학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친구들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라는 의식으로 1500년에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지혜로운 격언을 집대성한 ‘아다기아’(Adagia)를 펴내면서 당대 유럽의 지식사회를 사로잡았습니다. 남녀평등과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선구적으로 제창한 그가 친구 토머스 모어의 집에서 일주일 만에 써 내려간 저서 ‘우신예찬’(Encomium Moriae)에 담긴 불퉁거리는 어리석음이 매끈한 앎의 허상보다 나은 것임을 풍자한 행간을 오래도록 헤아리면서 젊은 나의 가슴을 지혜의 바늘로 찔러대는 통증에 가위눌린 꿈을 늘 깨어나곤 했습니다.
![]() ▲ (좌로부터) ‘에라스뮈스’/ ‘우신예찬’/ spiritual 일러스트레이션 작품/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인류사에서 가장 많은 노력으로 검증되어 전해진 성경은 유대 민족의 역사와 하느님의 계시를 담아 인간이 지켜야 하는 율법을 기록한 구약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이후 인간의 죄를 짊어진 속죄의 처형 이후 부활하였던 구원의 약속을 담은 신약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약성서는 대부분 이스라엘의 언어인 히브리어와 일부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며 신약성서는 고대 그리스어로 쓰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이 자신들을 ‘헬라스’(Hellas)로 지칭한 사실에서 고대 그리스어가 헬라어로 전해지면서 한자권 에서는 희랍어(希臘語)로 표기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이와 같은 신약성서의 언어를 '헬라어'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약성서는 4세기 무렵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를 집대성하면서 라틴어로 쓰였습니다. 이에 오늘날까지도 신약성서에 가장 권위 있는 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 라틴어에 완성도가 높은 학문을 이룬 ‘에라스뮈스’입니다.
여기서 잠시 신약성서의 에베소서 5장 19절을 살펴보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와 같은 구절은 미국 뉴욕성서공회에서 출판한 ‘새 국제 성경’(NIV)의 번역 내용으로 여기서 살펴지는 내용은 ‘새국제성경’(NIV)에서는 ‘신령한 노래’(songs from the Spirit)로 번역된 부분이 ‘킹제임스성경’’(KJV)에서는 ‘영적인 노래’(spiritual songs)로 표현되는 부분입니다.
이와 같은 ‘킹제임스성경’에 담긴 ‘스피리추얼’(spiritual)은 헬라어 ‘프튜마티코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혼이라는 뜻을 품은 ‘영’(靈)을 의미하는 ‘퓨뉴마’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이와 함께 ‘새국제성경’에 담긴 ‘신령’(神靈)한 의미로 해석된 ‘스피릿’(Spirit)은 정신 또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물론 큰 범주의 맥락에서 보면 ‘스피리추얼’(spiritual)이거나 ‘스피릿’(Spirit)이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이를 길게 설명하는 까닭은 이러한 맥락에서 흑인 노예의 ‘영가’(靈歌-spiritual)가 탄생한 사실입니다.
흑인 노예의 ‘영가’(靈歌-spiritual)가 생겨난 배경을 엄밀하게 살펴보면 18세기 말 미국의 종교 부흥기에 집회에서 불린 민요 리듬의 찬송가가 살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이 영국 교회에서 예배를 올리면서 선창자가 노래하면 이를 따라 부르는 교창(交唱-antiphony) 형식의 성가에서 유래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응답의 노래라는 ‘콜 앤드 리스폰스’(call and response)라는 음악 형태로 발전하여 마침내 ‘블루스’(Blues) 음악이 탄생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가야 할 부분은 ‘킹 제임스 성경’이거나 ‘새 국제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가’(靈歌-spiritual)라는 탄생의 관점에서 ‘킹 제임스 성경’의 에베소서 5장 19절의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spiritual songs)로 서로 화답하며’라는 내용이 가장 맞닿은 맥락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잠시 여기서 우리나라에서 ‘흠정역성경’으로 번역된 ‘킹제임스성경’(The King James Version-KJV)과 ‘새국제성경’(New International Version-NIV)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먼저 ‘킹 제임스 성경’은 영국 ‘헨리 8세 왕’의 두 번째 부인 ‘앤 불린 왕비’(Anne Boleyn. 1507~1536)가 3살 나이의 공주를 두고 처형당한 이후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여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 여왕’(Elizabeth I. 1533~1603)이 독신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이에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 출신 ‘제임스 1세 왕’(James I. 1566~1625)이 스튜어트 왕가로는 최초의 영국 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일을 추구하면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기를 합한 오늘날 영국 국기를 만들어 사용한 왕입니다.
1603년 이와 같은 역사적인 왕에 오른 '제임스 1세 왕'이 새로운 왕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대규모의 성서 번역 작업을 추진하였습니다. 당시 47명의 학자가 기존의 성서를 바탕으로 추진한 번역 작업을 살펴보기 위하여 성경 번역의 역사와 이러한 바탕이 되었던 라틴어 성서인 ‘벌게잇’역(Vulgate)과 이러한 라틴어 성서로 이어진 헬라어 구약성서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BC. 356~BC. 323년)이 세계를 정복한 헬라 시기에 모든 정복인 들은 헬라어를 국어로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자신의 언어를 버려야 했던 유대인들이 사용할 구약성서의 헬라어 역이 필요하게 되면서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번역하여 편의상 ‘70인 역’(ⅬⅩⅩ)으로 부르는 헬라어 구약성서가 탄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헬라어 구약성서 ‘70인 역’(ⅬⅩⅩ)을 바탕으로 교리의 정립과 교회 발전을 위하여 중대한 영향을 가진 인물을 칭하는 ‘교부’(敎父-Father of the Church) ‘제롬’(Jerome, 342?~407년)이 번역한 가장 대표적인 라틴어 성서 ‘불가타 역’(Vulgata)이 영어 표기로는 ‘벌게잇’역(Vulgate)입니다.
이후 성직자의 도덕성을 중시한 선구적 종교개혁자인 영국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는 절대적 신앙과 구원의 본질은 성서에 있다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투르의 ‘베렝가’(Berengar of Tours. 999~1088)가 성찬과 관련하여 가톨릭 교리인 화체설(化體說)을 부인하고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성질은 그것을 받는 자의 신앙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한 ‘영적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지지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권력적인 교황청에 반대하여 종교적 독립을 추구하면서 제자인 ‘니콜라스의 헤리퍼드’(Nicholas of Hereford), 그리고 존 퍼비(John Purvey. 1354~1414)와 함께 라틴어 성경 ‘벌게잇’역(Vulgate)의 영역작업에 착수하여 1382년 최초의 영역 성경 ‘위클리프 성서’(Wycliffe's Bible)가 완성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선구적인 등불을 밝힌 라틴어를 영어로 단순 직역한 ‘위클리프 성경’이 번역된 이후 성경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성서번역 작업이 두 곳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에스파냐(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Isabel I, 1451~1504)의 신앙적 지주이었던 ‘히메네즈 데 시스네로스’(Jiménez de Cisneros. 1436~151·7) 추기경의 계획으로 1502년 번역작업을 시작하여 15년 만에 완성된 ‘다언어 성서’(Complutum Polyglot Bible)입니다. 이는 이사벨라 여왕(Isabel I, 1451~1504)이 콜럼버스(Columbus. 1451~1506)의 항해를 후원하여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서인도 항로를 개발하면서 막강한 해상강국을 이루었습니다. 이어 베네치아 공국을 정복하여 국력이 확장되면서 이러한 위상을 상징하는 국책사업으로 여왕의 강력한 후원 속에 대규모 성경 번역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에스파냐(스페인)의 국가적 후원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성서번역 작업은 헬라어 구약성서 ‘70인 역’(ⅬⅩⅩ)과 히브리 성서의 고대 아람어 번역본인 ‘온켈로스 탈굼’(Targum of Onkelos)을 바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당시 성서번역 작업을 지휘한 인물이 당대의 석학 ‘에라스뮈스’와 쌍벽을 이룬 천재적인 신학자 ‘디에고 로페즈 데 쥬니가’(Diego López de Zúñiga. 1500·1564)입니다.
그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히브리어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셈어 계통의 아람어는 물론 아랍어에 이르기까지 천재적인 언어 능력을 가진 스페인 신학자였습니다. 이러한 성서 번역에 참여하였던 주요한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스페인의 대표적인 신학자 ‘알폰소 데 자모라’(Alfonso de Zamora. 1474~1531)는 스페인 출신의 유대인으로 ‘알깔라 대학교’(Alcalá, Universidad de)의 히브리어 교수를 최초로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구약의 히브리어를 번역하였으며 라틴어 성서 ‘벌게잇’역(Vulgate)의 번역에 1517년까지 참여하였습니다. 이후 스페인 살라망카 대학(Salamanca)의 ‘파블로 코르넬’(Pablo Coronel. 1480-1534)교수가 뒤를 이어 번역을 완성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어 번역은 ‘알깔라 대학교’의 그리스어 교수인 ‘데메트리오스 두카스’(Demetrio Ducas. 1480~1527)와 스페인 인본주의자 ‘후안 데 베르가라’(Juan de Vergara. 1492~1571)가 맡았습니다. 이와 함께 그리스어 구약성서 ‘70인 역’(ⅬⅩⅩ)의 라틴어 번역에 참여하였던 스페인 인본주의자 ‘페르난도 누네즈 데 구즈만’(Fernando Núñez de Guzmán. 1475~1553)과 카스티야 문법의 창안자인 문법학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Antonio de Nebrija. 1441년~1522)가 성서의 교정 작업을 맡았습니다. 또한. 그는 독일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에 성공한 이후 선구적으로 인쇄회사를 설립한 인물로 성서 출판에 대한 많은 공을 남겼습니다.
‘다언어 성서’는 히브리어 성서와 라틴어 ‘벌게잇’역에서 부터 헬라어 구약성서 ‘70인 역’(ⅬⅩⅩ)의 라틴어 번역본과 고대 아람어 번역본인 ‘온켈로스 탈굼’(Targum of Onkelos)의 라틴어 번역으로 구성된 6권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언어 성경’의 신약성경은 1514년에 완성되어 인쇄되었으나 구약 성서의 번역이 1517년 2월에 완료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거대한 계획을 지휘하였던 ‘히메네즈 데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다언어 성경’의 완성을 이룬 후 151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와 같은 ‘다언어 성서’의 최종 출판이 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여기서 살펴보게 되는 내용이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가 1516년 출판한 ‘그리스어 교정 신약성서’(Novum Instrumentum)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는 그리스어 원본과 함께 정통한 라틴어 번역을 통한 주석을 붙여 성서에 대한 그릇된 해석을 차단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으로 해석된 문제를 타파하기 위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는 신약성서의 번역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짚고 가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에라스뮈스의 절친이었던 ‘요한 프로벤’((Johann Froben. 1460~1527)이 운영하던 바젤의 인쇄소에서 1516년 출판된 이와 같은 ‘그리스어 교정 신약성경’은 1514년 에스파냐(스페인)에서 인쇄된 ‘다언어 성서’의 신약성서가 최초로 인쇄되었지만 1522년에 출판된 배경에는 많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서의 출판은 로마교황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다언어 성경’의 구약성서 번역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약성서만을 분리하여 출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 ▲ (좌로부터) Vulgata/ ‘위클리프 성서’/ ‘다언어 성서’/ ‘그리스어 교정 신약성경’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또한, 당시 에라스뮈스는 라틴어 ‘벌게잇’역의 주석본 출판과 함께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지혜로운 격언을 집대성한 당시 큰 관심을 얻은 ‘아다기아’(Adagia)의 새로운 출판을 계획하였습니다. 이에 프랑스에서 문법학자 출신의 인쇄업자 ‘조도쿠스 바디우스’(Jodocus Badius. 1465~1532)와 협의하였으나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는 1514년 8월 친구인 바젤의 인쇄업자 ‘요한 프로벤’을 찾아가 에스파냐(스페인)에서 오랫동안 추진한 ‘다언어 성경’의 신약성경 인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이에 계획에 없었던 ‘그리스어 교정 신약성경’의 번역과 출판을 급하게 서두른 사실입니다. 이는 이미 인쇄술이 보급되었던 시대 상황에서 에스파냐(스페인)의 ‘다언어 성경’을 무제한 공급하게 되면 향후 그 파장에 대한 우려가 컸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를 더욱 확대하여 살펴보면 에라스뮈스의 조국 네덜란드가 1515년부터 에스파냐(스페인)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던 시점에 바젤로 건너가 성서번역 작업에 착수하여 다음 해 1516년 ‘그리스어 교정 신약성경’이 출판된 사실을 깊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할 것입니다.
이는 이와 같은 ‘그리스어 교정 신약성서’가 출판된 이후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세계를 뒤흔든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사실과 그의 조국 네덜란드에서 신교도의 저항을 통한 독립이 이루어진 역사와의 개연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 1513년 3월 로마 교황에 오른 '레오 10세 교황'(Leo X. 1475~1521)에 대한 이야기도 반드시 짚고 가야합니다. 이어서 많은 이야기를 담은 성경 번역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음 칼럼은 예술혼을 위하여 연재 칼럼 (184) 갤러리 관장이 쓰는 성경 번역의 역사(下)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