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2년 라틴어를 영어로 직역한 최초의 영어 성서 ‘위클리프 성경을 탄생시킨 영국의 선구적인 종교 개혁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는 1384년 12월 8일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존 위클리프’에 대하여 짚고 가야할 내용이 있습니다.
1345년 그가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에 1347년부터 유럽 전역을 죽음의 공포로 내몰았던 흑사병이 1348년 여름 영국을 강타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1356년 옥스퍼드대학의 머튼 칼리지(Merton College)에서 청소년 미술교사 자격이 주어지는 학위를 받았을 만큼 미술에도 깊은 감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같은 해 1356년 ‘교회의 마지막 시대’(The LastAge of the Church)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유럽 인구의 삼 분의 일을 앗아간 인류의 참변 흑사병의 상처가 아물어 갈 즈음에 믿음이 부재한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민심을 호도하는 성직자들이 많았습니다. 이에 흑사병으로 유난히 성직자의 죽음이 많았던 사실에 근거하여 그는 도덕성을 잃은 성직자의 심판이라는 강한 비판의식을 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선구적인 종교개혁의 의식을 펴다가 세상을 떠난 ‘존 위클리프’는 1428년 ‘마르티노 5세 교황’(Pope Martin V. 1369~1431)의 재임 기간에 그의 무덤이 파 헤쳐져 화형을 당하여 강에 버려지는 동양의 부관참시(剖棺斬屍)와 유사한 심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복잡한 이야기가 있는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제16차 ‘콘스탄츠 공의회’(Constance)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존 위클리프’에게 이단으로 규정하여 파문시킨 결정이 내려졌으며 이후 ‘마르티노 5세 교황’이 처벌의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 ▲ (좌로부터) ‘존 위클리프’ / ‘존 위클리프’ 처형장면 / ‘마르티노 5세 교황’/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여기서 1384년에 세상을 떠난 종교개혁의 선구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가 사후 44년만인 1428년 무덤이 파헤쳐져 화형을 받게 된 배경에 대하여 잠시 살펴봅니다. ‘위클리프 성경’이 1382년 번역된 이후 오랜 가톨릭교회의 관행처럼 무너져버린 도덕성을 질타한 개혁이 엄밀하게 종교개혁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지는 인물들이 체코의 종교 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69~1415)와 ‘예로니모’(Jerome of Prague. 1379~1416)입니다.
신성로마 황제 ‘카를 4세 왕’(Karl IV. 1316~1378)이 1348년 체코에 설립한 ‘프라하 대학교’(Charles University)는 동유럽 지역 최초의 대학입니다. ‘얀 후스’는 1393년 프라하 대학을 졸업하고 1396년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교수가 되었을 때 프라하의 ‘예로니모’(Jerome of Prague. 1379~1416)가 1398년 프라하 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이후 ‘얀 후스’가 1401년 ‘프라하 대학교’ 철학부장을 거쳐 1402년 학장과 베들레헴 성당 주임신부 직을 맡았던 시기에 긴밀하게 교유하였던 ‘예로니모’에게 영국행을 권유하며 선구적인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의 의식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에 1402년 영국에 건너간 ‘예로니모’는 ‘존 위클리프’를 연구하고 그의 저서와 번역 성서를 가지고 프라하에 돌아왔습니다.
이후 1409년 프라하대학 총장이 되었던 ‘얀 후스’는 ‘예로니모’가 가져온 ‘존 위클리프’의 저서와 ‘위클리프 성경의 체코어 번역에 주력하여 이를 배포하였습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당시 독일의 영향권에 있었던 체코의 민족주의 정신이 태동하였으며 종교개혁의 선구적인 의식이 자라났습니다. 이러한 ‘얀 후스’의 개혁적인 행동에 로마교황청은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제16차 ‘콘스탄츠 공의회’(Constance)의 1414년 총회에서 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트 왕’(Sigismund. 1368~1437)의 신변보장 통행 각서를 소지하고 교회의 분열에 대한 협상을 위하여 참석하였으나 체포되었습니다. 이에 ‘지기스문트’ 황제는 크게 격분하며 반발하였으나 로마 교황청은 이단과의 약속은 그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며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이어 1415년 이미 고인이 된 ‘존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파문시키면서 그의 의식을 전파한 체코의 선구적인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화형으로 처벌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얀 후스’를 보헤미아인들은 국민적 영웅인 순교자로 받들어 추종하였습니다 바로 이들이 동유럽의 민중적 의식을 출발시킨 ‘후스파’(Hussites)입니다. 이들은 ‘얀 후스’의 처형에 분노하여 1419년 독일 황제이며 보헤미아를 통치하던 왕의 군대와 충돌하여 ‘후스전쟁’(Hussite Wars)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당시 온건한 지식인 계층에 의하여 프라하 교회의 주체성과 지도권이 쟁점이 되어 시작된 전쟁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프라하에서부터 독일 여러 지역에서 극렬한 투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에 당시 ‘마르티노 5세 교황’(Pope Martin V. 1369~1431)과 신성로마 황제이며 ‘보헤미아’왕이었던 ‘지기스문트’(Sigismund. 1368~1437)는 강력한 십자군을 투입하여 진압하려 하였지만, 분노의 물결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후스전쟁은 ‘보헤미아’의 내전과 이웃 나라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까지 개입되면서 1434년까지 지속하여 ‘보헤미아’의 종교적 주체를 인정하는 협상으로 끝이 났습니다.
당시, 프라하의 ‘예로니모’(Jerome of Prague. 1379~1416)는 ‘얀 후스’가 체포되어 1415년 제16차 ‘콘스탄츠 공의회’(Constance)에서 재판에 회부 되었을 때 ‘얀 후스’와 그의 동료들은 ‘예로니모’의 참석을 강력하게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얀 후스’를 변호하려는 뜻을 가지고 1515년 4월 콘스탄츠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예로니모’의 지인들은 그를 설득하여 되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어 콘스탄츠로 압송되어 기소되었습니다.
당시 ‘콘스탄츠 공의회’는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이단에 대한 ‘예로니모’의 공개적인 발언을 통하여 판결의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이를 인정하는 발언을 조건으로 ‘예로니모’를 석방하는 협상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에 ‘얀 후스’가 1415년 7월 6일 처형당한 이후 ‘예로니모’는 1415년 9월 11일 콘츠탄츠 공의회에서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이단에 대한 증거들이 작성된 문서를 읽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는 변절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어 그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발언과 함께 그동안 주장한 이단설에 대하여 영원한 폐기를 선언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콘츠탄츠 공의회는 ‘예로니모’의 선언에 대한 진실성을 거론하며 1416년 5월 다시 재판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예로니모’는 자신이 주장한 이단설의 폐기 선언을 취소하면서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이단에 대하여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대반전의 행동을 거침없이 드러내었습니다. 이에 당황한 콘스탄츠 공의회는 그를 설득하였으나 ‘예로니모’는 자신의 발언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화형의 처벌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는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최초의 순교자라는 평가를 역사에 남긴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많은 혼란을 겪게 되는 ‘보헤미아’(Bohemia)로 불렀던 ‘체코’(Czech)의 역사와 그 명칭에 대하여 정리해 봅니다. 이러한 체코는 서쪽은 독일과 남쪽은 오스트리아 그리고 동쪽은 슬로바키아와 동북쪽의 폴란드와 접경을 이룬 나라입니다. 체코(Czech)는 크게 동과 서로 나누어 동부의 ‘모라비아’(Moravia) 또는 체코어로 ‘모라바’(Morava)로 부르고 서부는 ‘체히’(Cechy)로 불렀습니다.
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켈트어 언어학자인 ‘줄리어스 포코르니’(Julius Pokorny. 1887~1970)의 연구로 고대의 켈트족을 조상으로 하는 ‘보이족’(Boii)에서 유래된 것임을 밝혔습니다. 이는 고대 켈트어에서 전사를 뜻하였던 명사 ‘보이오’(boio)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에 ‘게르만 조어’(roto-Germanic)인 집을 뜻하는 ‘하이마즈’(haimaz)와 결합하여 고대 라틴어 ‘보헤뮴’(Boohhaemum)을 낳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독일어 ‘뵈멘’(Böhmen)과 영어 ‘보헤미아’(Bohemia)가 유래된 것입니다.
이러한 라틴어 ‘보헤뮴’(Boohhaemum)이 기록된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 BC. 63~AD. 21?)가 저술한 ‘지리지’(Geography)에 최초로 언급되었습니다. 이후 고대 로마 시대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Velleius Paterculus. BC. 19~AD. 31)의 저서 ‘로마의 역사’와 로마 시대 역사가인 ‘타키투스’(Tacitus. 55~117)가 서기 98년에 펴낸 저서 ‘게르만족의 기원과 현황’(De Origine et situ Germanorum)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헤아려 보면 고대 청동기 시대에 독일의 라인강과 독일과 체코를 흐르는 엘베강 그리고 독일 남부에서 발원하여 흑해로 흘러드는 유럽 동쪽을 흐르는 도나우강 유역에 정주하던 ‘켈트족’(Celts)을 살피게 됩니다.
이와 같은 ‘켈트족’이 BC. 1200년에서 BC. 800년 기간부터 이동을 시작하면서 세력이 나뉘어 그중 일파는 프랑스 마르세유 지방으로 또 다른 세력은 BC. 400년경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소아시아 지역에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러한 프랑스 지방으로 이동한 켈트족은 이후 스페인과 잉글랜드에 진출하였으며 이탈리아에 진출한 세력은 당시 로마제국을 침공한 후 이탈리아 북부의 ‘포강’(Po R.) 유역에 고대 로마의 기록에 전해오는 ‘갈리아 족’(Gauls)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이러한 고대의 켈트족이 오랫동안 동화하면서 ‘갈리아 족’(Gauls)문화를 낳았고 이러한 갈리아 족 세력에서 바로 ‘보이족’(Boii)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후 ‘보이족’(Boii)은 로마제국의 강력한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BC. 44)에게 정복당하여 오늘날의 폴란드와 체코지역에 정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가야하는 부분이 ‘슬라브족’(Slavs)에 대한 내용입니다. ‘슬라브족’은 오늘날 동유럽을 중심으로 중앙 유럽과 발칸반도 그리고 러시아 일부 지역의 ‘슬라브어’( Slavic languages)를 사용하는 민족을 말합니다. 이러한 ‘슬라브어’는 ‘인도 유럽어족’의 ‘리투아니아어’ ‘라트비아어’ 그리고 사멸되어버린 ‘고대 프로이센어’와 같은 ‘발트어파’(Baltic languages)에서 파생하였습니다.
![]() ▲ (좌로부터) Charles University/ ‘얀 후스’(Jan hus)/ 1369~1415)/ ‘예로니모’(Jerome of Prague)/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후 ‘고대 발트 슬라브어’로 발전하여 중세시대에 ‘고대 슬라브어’(Proto-Slavic)로 변화하면서 동유럽의 ‘동슬라브어군’으로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우크라이나어’와 중앙 유럽의 ‘서슬라브어군’으로 ‘폴란드어’, ‘소르브어’, ‘체코어’,‘슬로바키아어’, ‘실레지아어’, 그리고 발칸반도의 발트 슬라브어군’으로 동부의 ‘마케도니아어’, ‘불가리아어’, ‘교회 슬라브어’와 서부의 ‘세르보어’,‘크로아티아어’, ‘슬로베니아어’ 에 이르는 많은 언어를 낳았습니다. 여기서 살펴 가는 부분은 동유럽의 ‘헝가리어’는 우랄어족에서 파생된 언어이며 발칸반도의 ‘루마니아어’는 ‘로망스어’에서 파생된 언어라는 사실을 참고할 부분입니다.
여기서 정리하고 가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고대 켈트족의 이동으로 ‘갈리아족’(Gauls)문화가 생겨났고 이러한 ‘갈리아족’에서 ‘보이족’(Boii)이 탄생하였으나 로마제국에 정복되어 오늘날 폴란드와 체코지역에 정주하게 되었다는 ‘보헤미아’(Bohemia) 즉 체코의 역사에서 ‘슬라브족’(Slavs)과 다시 겹치게 되는 부분에 대한 정리입니다.
이를 헤아려 보면 이와 같은 오랜 역사 속에서 주체적인 세력을 다져온 ‘보이족’(Boii)이 ‘슬라브족’(Slavs)으로 변화한 배경을 살피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를 살펴보면 로마제국에 정복된 ‘보이족’(Boii)이 독일 남부에서 동쪽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대평원을 흐르는 다뉴브강 지역과 불가리아를 가로질러 동서로 뻗은 발칸산맥 지역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오랜 역사를 안고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시기에 등장하는 이들이 바로 ‘슬라브족’(Slavs)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공백을 살피기 위하여 너무나 복잡하지만, 유럽을 중심으로 펼쳐진 역사의 흐름을 간략하게 짚고 가야 합니다.
BC. 8세기 무렵 오늘날 이탈리아반도에 로마제국이 건국된 이후 고대 켈트족(Celts)이 BC. 6세기경부터 프랑스 남부와 브리타니아(영국) 지역에서 고대 로마의 일부를 점령합니다. 이후 BC. 3세기경 서남아시아 지역까지 지배하는 세력으로 확장하면서 BC. 1세기경 우리가 시저로 부르는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정복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기 150년경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고 3세기에 게르만인 프랑크족이 들어옵니다.
이후 서기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사망으로 로마 제정 시대가 막을 내리고 동서 로마 시대로 분할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반달족’, ‘수에비족’, ‘알란족’과 같은 여러 종족이 이주하면서 동게르만의 ‘동고트족’은 흑해의 서북지역에 루마니아와 헝가리지역에는 ‘서고트족’이 자리합니다. 이어 ‘부르군트족’이 443년 제네바에 왕국을 세웁니다. 한편 네덜란드 해안에 프랑크족 중 하나인 살리카법전으로 잘 알려진 ‘살리족’은 427년 로마와 동맹 관계를 갖고 세력을 확장 시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동양의 ‘훈족’이라는 용맹한 나라의 왕 ‘아틸라’가 무적의 로마를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보이족’(Boii)이 훈족을 피하여 이동하면서 벨로루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 중심지역으로 이동한 세력이 ‘동슬라브’입니다. 이어 오늘날의 폴란드와 체코지역으로 이동한 세력이 ‘서슬라브’입니다. 이때 훈족이 폴란드 지역에까지 밀고 들어와 이를 피하여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보스니아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였던 세력이 ‘남슬라브’입니다.
이후 ‘서고트’의 ‘테오도리쿠스’와 서로마제국의 ‘아이티우스’가 연합하여 451년 ‘훈족’ ‘아틸라’를 물리쳤으나 476년 서로마제국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 433~493)의 반란으로 서로마제국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에 동로마제국 황제 제노(Zeno. 425~491) 와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Theodoric, 454~526)가 연합하여 493년 ‘오도아케르’를 정복하면서 서로마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이후 동로마 제국(비잔틴 국)과 함께 에스파냐지역의 ‘서고트국’과 이탈리아 지역의 ‘동고트 국’ 그리고 북아프리카 지역의 ‘반달 국’이 세력을 형성하면서 영국지역의 ‘앵글로색슨 국’과 더불어 라인강 유역 프랑크족의 연합에 따라 유럽 역사에 격변의 원인이 되었던 프랑크 왕국이 태동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아바르족’(Avar)에 대한 부분도 반드시 살펴 가야 할 숙제입니다. 558년 세워진 아바르제국은 훈족의 멸망 후에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 ‘아바르 족’이 헝가리의 ‘판노니아’(Pannonia) 평원지대에 세운 나라입니다. 이들은 당시 이 지역에 정주하던 슬라브족을 거느리고 이란의 ‘사산 왕조’(Sasan)와 연합하여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을 위협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때 폴란드와 체코 그리고 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 지역의 서슬라브족은 이들과 대립하여 크고 작은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오늘날 벨기에의 ‘수아니’(Soignies) 출신의 프랑크왕국의 상인 ‘사모’(Samo. 600~658)입니다.
그는 ‘아바르족’과 싸우는 서슬라브족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상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슬라브족을 모아 631년 세웠던 나라가 바람과 같은 짧은 역사를 가진 ‘사모 제국’(Samo's Empire)입니다. 20년이라는 극히 짧은 역사로 사라진 제국이지만 ‘슬라브족’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나라입니다. 이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사모 제국은 사라지고 ‘아바르족’이 다시 서슬라브족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프랑크 왕국의 전설적인 수장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에 의하여 아바르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아바르제국이 ‘판노니아 아바르’(Pannonian Avars)로 불린 이유가 이후 카스피해 연안의 다게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진 ‘캅카스 아바르’(Caucasus Avars)와 구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과 같은 사모 제국의 역사를 안고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중앙을 흐르는 모라바강 유역에 833년 탄생한 나라가 ‘대모라바 공국’(Great Moravia)으로도 부르는 ‘모라비아 공국’(Moravia)입니다. 이러한 ‘모라비아 공국’은 서슬라브족을 통합하여 거대한 세력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문자의 초서를 바탕으로 최초의 슬라브 문자인 ‘글라골 문자’(Glagolitic Alphabet)를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이어 863년경부터 비잔틴 제국과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이러한 ‘글라골 문자’로 더욱 빠르게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라비아 공국이 906년 무렵 ‘마자르족’(Magyars)으로 부르는 ‘헝가리’인 세력에 정복되어 멸망하면서 오늘날의 체코국가인 ‘보헤미아 왕국’(Kingdom of Bohemia)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슬로바키아 지역은 이후에도 헝가리의 지배를 받아 결국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는 역사를 낳은 것입니다.
![]() ▲ (좌로부터) 체코/ ‘글라골 문자’/ 체코지도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러한 역사를 안고 보헤미아 지역에서 가장 탄탄한 기반을 가졌던 가문의 딸 ‘리부슈’(Libuše)와 결혼하였던 ‘프르제미슬 플로먼’(Přemysl the Plowman)에 의하여 10세기 무렵 전설적인 프르제미슬리드 왕조(Přemyslid dynasty)가 세워져 마침내 오늘날의 ‘체코국가인 군주제 ‘보헤미아 왕국’(Kingdom of Bohemia)이 세워진 후 1029년 모라비아 지역을 완전하게 통치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많은 이야기를 통하여 ‘보헤미아’(Bohemia)로 불렀던 ‘체코’(Czech)의 역사와 그 명칭에 대한 이해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이와 같은 장황한 이야기를 통하여 살피게 되는 중심은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이라는 선구적인 의식에 대해서입니다. 이는 영국의 선구적인 종교 개혁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에 의하여 1382년 라틴어를 영어로 직역한 최초의 영어 성서 ‘위클리프 성경’(Wycliffe Bible)이 탄생한 이후 동유럽 체코의 종교 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69~1415)와 ‘예로니모’(Jerome of Prague. 1379~1416)가 선구적인 등불을 밝힌 사실의 확인입니다. 이는 유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뒤늦게 그리스도교를 접하였지만, 선구적인 의식이 가장 먼저 행동으로 이루어진 사실의 중요성이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동부 유럽에서 이루어진 선구적인 종교개혁의 의식을 바탕으로 향후 현대사에서 실로 많은 이야기가 탄생한 사실입니다. 필자는 이와 같은 내용과 더불어 오늘날 가장 침체한 경제 여건을 가지고 있는 동유럽이지만 역사의 교훈으로 볼 때 반드시 새로운 물결이 출렁이는 시점이 올 것이라는 확신으로 동유럽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였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눈과 귀가 한반도에 몰려있습니다.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우리의 열차가 한반도에[서 출발하여 중국과 러시아를 관통하고,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가로질러 동유럽에 닿게 되는 새로운 실크로드 고속철 시대가 열리게 된다면 세계의 지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전환적인 변화를 맞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전개된 성경 번역의 역사를 이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아울러 이야기가 길어져 성경 번역의 역사는 다음 편까지 계속됩니다. 다음 칼럼은 (186) 갤러리 관장이 쓰는 성경 번역의 역사(下-2)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