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2년 최초의 영어 성서 ‘위클리프 성경을 탄생시킨 영국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는 죽음 이후에 이단의 처벌을 받았으며 그의 선구적인 의식을 추종한 체코의 종교 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69~1415)와 ‘예로니모’(Jerome of Prague. 1379~1416)는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거두어간 목숨을 종교개혁의 등불로 바쳤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요약하여 보면 교회라는 실질적인 형태가 정립된 시기는 예수가 처형당한 30년 후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후 구원의 약속을 담은 신약 성서와 유대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를 품은 인간이 지켜야 하는 율법에 중심을 둔 유대교 경전을 구약성서로 하여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립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서의 해석이 오랜 역사 동안 다양한 민족이 추구한 의식의 차이로 종교의 분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살펴봅니다.
거대한 로마제국을 사분치제(四分治制)로 다스리면서 오랫동안 기독교를 박해한 역사를 청산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를 통치하던 지도자 서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Constantinus I, 272~337)와 동로마의 ‘리키니우스 황제’(Valerius Licinianus Licinius. 270~325)가 313년 2월 종교의 자유를 포함한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발표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합의를 이루었지만, 로마제국을 둘러싼 권력 싸움이 재개되어 324년 분열된 로마를 통일하여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330년 수도를 비잔티움(Byzantium)을 옮겨 새로운 로마로 선포하였습니다. 자신의 임종 직전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로마의 황제로는 최초로 기독교도가 되었던 그가 337년 세상을 떠난 이후 그를 기리는 뜻으로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후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사망으로 로마 제정 시대가 마감되면서 동과 서로 나뉜 로마 분할시대가 되었습니다. 당시 서로마제국은 로마의 정통성을 이유로 교황이 모든 기독교의 대표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 황제는 로마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임을 내세워 그 대표 또한 동로마제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서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기독교회가 동서로 극명하게 나뉘어 정통성을 주장하는 대립이 깊어진 흐름에서 동서 교회의 전례 의식 또한 서로 다르게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 ▲ (좌로부터)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리키니우스 황제’ 금화/ 요한 12세 교황/ 밀라노 칙령/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러한 혼란기에 486년 서게르만 부족 살리족을 이끌던 ‘클로비스 1세’(Clovis I. 446~511)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프랑크왕국이 등장합니다. 그는 당시 동로마 제국(비잔틴 국)의 회유를 물리치고 로마 가톨릭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497년 프랑스 북동부 레옹의 랭스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후 프랑크족 개종에 앞장섰습니다. 이에 유럽 전역에 로마 가톨릭이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프랑크 왕국이 유럽을 지배한 오랜 역사 속에서 가톨릭을 통한 통치의 활로를 찾게 되었던 사실과 맞닿은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빛나는 프랑크 왕국시대를 펼쳤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742~814)시대이었던 서기 800년 그의 세력을 활용하여 교황령을 고수하였던 ‘레오 3세 교황’(Leo III. 795~816)이 ‘샤를마뉴 대제’를 서로마 제국의 계승과 부활이라는 권위적인 신성로마 황제로 즉위시키는 새로운 역사를 열었습니다. 이와 같은 종교와 정치의 동행이라는 시대적 산물은 결국 교황과 황제의 동상이몽으로 상대적 서열에 대한 분쟁으로 치달아 결국 막강한 세력을 가진 황제의 권위에 가려진 교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국가적 세력이 더욱 결정적으로 드러난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는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어 프랑크 왕국 출신 이탈리아의 귀족이자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베렝가리오 2세’(Berengar II, 900~966)가 로마 교황청의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당시 ‘요한 12세 교황’(Ioannes PP. XII, 937~964)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프랑크 왕국의 작센(독일)의 ‘오토 1세 왕’(Otto I. 912~973)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베렝가리오 2세’를 정복하고 962년 신성로마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과 이탈리아를 통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차마 글로도 담기 거북할 만큼 부패하였던 ‘요한 12세 교황’은 ‘오토 1세 왕’의 구원 이후 더욱 부패한 특권을 남발하며 ‘오토 1세 왕’을 전복하려 한 음모혐의로 신성로마 황제 ‘오토 1세 ’에 의하여 폐위되었습니다. 이는 로마교황의 역사에서 권력에 의하여 폐위된 최초의 사례를 낳았습니다. 이처럼 종교와 정치의 동행이 낳은 역사는 로마제국과 신성제국 또는 신성로마제국으로 근대 독일제국이 세워진 1806년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에서 신성로마 황제 ‘오토 1세’ 가 성직자의 서임권한까지 쥐락펴락하였던 사실은 그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후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왕조’가 쇠락하면서 교황청의 권위가 강화되어 성직자 서임에 관한 권한이 교황에게로 다시 환원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을 요약하면 ‘스테파노 9세 교황’(Stephanus IX. 1020~1058) 재임 시기에 교황청의 독립된 주권을 확립한 배경이 먼저 살펴집니다. 또한, 로마 가톨릭과 비잔틴 교회의 친교가 무너져 동, 서방 교회의 분열을 제공한 프랑스 북동부 도시 ‘툴’(Toul) 교구의 주교이었던 ‘훔베르트 추기경’(Humbert of Moyenmoutier. 1009~1061)에 대하여 짚고 가야 합니다. 그가 1058년 발표한 '대적자 성직 매매자들'(Adversus Simoniacos)이라는 논문이 역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논문을 통하여 성직 매매의 정의에서 금품의 수수 이외에도 평신도의 사제 임명도 성직매매로 정의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교회와 세속의 권력을 분립하여 세속권력의 기독교 지배라는 관행을 지적한 혁명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훔베르트 추기경’의 주장을 바탕으로 교황청과 왕권 사이의 오랜 대립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훗날 신성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던 ‘하인리히 4세’(Heinrichs IV. 1050~1106)가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어머니 ‘아그네스’(Agnes von Poitou. 1025~1077)가 섭정하였습니다. 당시 교황의 선출을 두고 극심하게 대립하였던 시기에 그의 후원으로 ‘니콜라스 2세 교황’(Nikolaus II. Pope. 990~1058)이 선출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니콜라스 2세 교황’이 ‘훔베르트 추기경’이 주장한 내용을 바탕으로 교황선출에 대한 규칙을 입법화하여 오늘날까지 시행되는 교황청 공인 제도가 되었던 사실입니다.
이러한 교황선출의 주요한 원칙을 잠시 살펴보면 (1) 교황의 유고 또는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추기경들은 그 후계자를 선출한다. 선출된 후계자는 성직자들과 로마 시민들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2) 로마 성직자 중 적합한 인물이 있으면 그를 선출한다. (3) 교황 선거 장소는 추기경단의 결정에 의한 어느 장소에서도 가능하다. (4) 선출된 교황은 취임식 이전에도 그 권한과 기능을 완전하게 행사한다. (5)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한다.
이와 같은 교황권의 회복이 이루어진 시대 상황에서 ‘오토 왕조’를 이은 ‘살리 왕조’(Salian Dynasty)의 세 번째 신성로마 황제가 되었던 ‘하인리히 4세’(Heinrichs IV. 1050~1106)는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Gregorius Ⅶ. 1020~1085)과 성직자 서임 권한으로 충돌하여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1076년 독일주교 회의에서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였습니다. 이에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은 그해 2월 교황청 법령에 의하여 ‘하인리히 4세 황제’를 즉시 파문하여 폐위해버리는 강경책을 고수하였습니다.
이때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의 관할권에 있던 대표적인 주교를 비롯한 주요한 영주세력이 1076년 10월 교황의 선언을 지지하면서 ‘하인리히 4세 황제’가 1년의 기간인 1077년 2월까지 교황의 파문을 회복하지 못하면 새로운 왕을 선출한다는 결의를 내놓았던 것입니다. 이에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 직접적인 해결책을 담판하기 위하여 1076년 겨울 눈 내리는 설원의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갔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교황은 자신을 지지한 ‘토스카나의 마틸다’(Mathilde von Tuszien. 1046~1115)가 있는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의 아펜니노 산맥 기슭의 카노사성(Canossa)으로 가버렸습니다.
![]() ▲ (좌로부터) ‘하인리히 4세’/ Gregorius Ⅶ. 교황/ 카노사성/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러한 소식을 받은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성(Canossa)으로 찾아가 1077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눈이 쌓인 성문 밖에서 맨발로 기다렸습니다. 당시 클뤼니 수도원장(Cluny Abbey) ‘휴고’(Hugo)와 ‘토스카나의 마틸다’의 중재로 ‘하인리히 4세 황제’가 맨발로 눈밭에서 기다린 지 3일 만인 1월 28일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은 파문을 해제하고 그를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이른바 역사의 눈길을 걸어온 이야기 ‘카노사의 굴욕’’(Gang nach Canossar)입니다.
이후 ‘하인리히 4세 황제’는 왕권을 정비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의 입지를 강하게 견제하였습니다. 이에 교황을 지지하였던 독일의 영주들은 1077년 3월 슈바벤(Schwaben)의 ‘루돌프 폰 라인펠덴 공작’(Rudolf von Rheinfelden. 1025~1080)을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하여 이른바 대립 국왕을 세웠으며 교황은 1080년 새로운 국왕을 승인하면서 ‘하인리히 4세 황제’를 다시 파문하였습니다.
결국 ‘하인리히 4세 황제’와 영주들의 전쟁이 벌어져 영주들의 반란을 진압한 ‘하인리히 4세 황제’는 브릭센 종교회의에서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의 파문과 함께 이탈리아 라벤나 대주교이었던 ‘클레멘스 3세(’Clemens III. 1030~1100)를 새로운 대립 교황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이어 로마로 쳐들어가 오랜 전쟁 끝에 승리하여 1084년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은 남부 캄파냐의 살레르노로 도피하였으며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Clemens III. 1030~1100)의 집전으로 신성로마 황제 자리에 즉위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는 로마 추기경들을 비롯한 반대세력의 거부로 완전한 교황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로마 추기경들을 비롯한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의 세력은 1088년 클뤼니의 수도원장 ’우르바노 2세‘(Urbanus II. 1035~1099)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여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를 나누어 담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인리히 4세 황제’가 지원한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와 함께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의 세력이 선출한 ’우르바노 2세 교황‘은 성직 매매를 강력하게 단죄하는 개혁 운동을 펴면서 교황권과 대립하였던 프랑스 카페왕조의 ‘필리프 1세 왕’(Philip I. 1052~1108)까지 파문해 버리는 강경책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수중에서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정 참가자에게는 면죄를 약속하였던 십자군 운동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와 같은 왕권과 교황권의 극렬한 대립의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1122년 오랜 대립을 매듭짓는 ‘보름스 협약’(Wormser Konkordat)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는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뒤를 이은 ‘하인리히 5세’(Henry V. 1086~1125)와 당시 ‘갈리토스 2세 교황’(Calixt II. 1060~1124)이 오랜 분열과 대립을 종식하는 합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에 주교와 대 수도원장의 선출과 임명의 권리를 교황청에 두는 교황권의 존재를 황제가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안고 1382년 최초의 영어 성서 ‘위클리프 성경이 탄생하였으며 이후 체코의 종교 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69~1415)와 ‘예로니모’(Jerome of Prague. 1379~1416)의 선구적인 종교개혁의 등불이 역사의 바람 앞에 가물거렸습니다.
![]() ▲ (좌로부터) ‘보름스 협약문’/ 마르틴 루터/ 루터 성경/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러한 역사를 안고 탄생한 개신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물결을 낳은 독일의 성직자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가 1522년 독일어판 신약 성서 번역본을 출판하였습니다. 이후 구약성서가 번역되어 1534년 ‘루터 성경’(Luther Bible)이 출판되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 게르만어로 번역된 복음서이거나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Chalemagne, 742~814)시대에 번역된 시편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안고 영국의 ‘위클리프 성서’와 같은 단어의 단순한 직역으로 이루어진 독일어 번역본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 성경’(Luther Bible)은 히브리어 성서와 라틴어 ‘벌게잇’역을 바탕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되는 민중의 성경으로 번역된 성경이었습니다. 특히 에라스뮈스의 ‘그리스어 성서’의 주요한 부분이 참조되어 번역된 ‘루터 성경’은 이후에 많은 성경 번역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에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1536)이 목숨을 바쳐 빚어낸 ‘틴델역 성경’(Tyndale's Version)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다음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음 칼럼은 (187) 갤러리 관장이 쓰는 성경 번역의 역사(下-3)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