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헤아려 가다 보면 시대 상황을 품은 역사적인 배경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실체적인 종교개혁이 나타나기까지 중세라는 긴 터널의 역사를 달려온 많은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이에 오늘은 문예 부흥 운동 르네상스의 역사적 맥락에서 학문적 부흥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중세시대의 터널을 지나는 유럽의 시대 상황에서 도시 공국으로 분할된 이탈리아의 선구적인 흔적을 헤아리면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질곡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더 나은 삶의 추구라는 목적이 종교와 학문에서 정치에 이르는 여러 분야에 물결처럼 일렁인 인류의 지혜가 바로 르네상스임을 쉽게 파악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천년의 역사를 품은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몰락에서 그 정점을 달려온 내용을 살피게 됩니다. 이는 오랜 역사 속에서 깊은 학문의 역량을 키워온 동로마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하여 쇠락하면서 인류의 보고와 같은 진귀한 도서들이 반출되고 이를 공부한 학자들이 이탈리아에 진출하였던 사실이 분명하게 살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당시 이탈리아 도시 공국의 경쟁적인 문예 부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인문주의 바탕을 일구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 살펴지는 인물이 이탈리아의 저명한 문법학자 베르가모의 ‘가스파리노’(Gasparino da Barizizza, 1360~1431)입니다.
그는 1403년 ‘파비아’(Pavia)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한 이후 1407년 베네치아로 갔습니다. 그는 소금무역으로 부를 일으킨 베네치아의 귀족 ‘바르바로 가문’(Barbaro family)의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파도바(Padova)로 이주하여 조기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설파하여 소년 인문학교를 세웠습니다. 당시 이 학교를 졸업하였던 학생 중 대표적 인물을 살펴보면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 조각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교육의 선구자로 체육 교육에 대한 교육과정(curriculum)을 최초로 정립한 펠트레의 ‘비토리노’(Vittorino da Feltre. 1373~1446)가 살펴집니다.
알베르티는 이와 같은 소년 인문학교에서 고전의 바탕을 공부한 이후 문학과 수학, 음악에서부터 천문과 지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와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1450년 르네상스 최초의 건축에 대한 논문‘건축론’(De re aedificatoria) 10권이 탄생하였습니다. 원근법을 정립하여 미학적인 원리를 세웠던 그의 예술은 바로크 건축에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하였던 그는 예술의 관념적인 미학을 자연과 함께 고대 예술가들의 아름다움을 헤아렸던 열정에서 찾아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함축하면 모든 예술은 역사라는 선생에게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알베르티’보다 훨씬 더 많은 연구와 경험적인 바탕이 있었던 세기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스스로 자신은 가르침을 받지 않는 예술가라고 단언하였지만, 알베르티의 과학적인 예술관에 가장 깊게 동행한 작가였다는 사실을 짚고 갑니다.
이와 같은 선구적인 교육을 편 ‘가스파리노’는 그 후 페라라 공국의 초청을 거쳐 밀라노 공국의 비스콘티가의 마지막 대공이었던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Filippo Maria Visconti:1392~1447)의 초청으로 밀라노로 이주하여 마지막 삶을 바쳤습니다. 당시 페라라 공국과 밀라노 공국에도 파도바의 소년 인문학교와 같은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가스파리노’가 학생들의 라틴어 작문법을 위하여 저술한 ‘서간서’(Liber epistolarum)는 필사본으로 당시 유럽 여러 나라에 경쟁적으로 번역되었던 책이었습니다. 인쇄 문화 시대가 열리면서 1470년 프랑스 소르본 대학 도서관에 최초의 인쇄소가 만들어졌을 때 바로 ‘가스파리노’의 라틴어 작문법을 위한 지침서가 최초로 인쇄되었던 사실에서 조기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운 선구적인 정신과 함께 그의 학문적 역량을 역사에서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이와 같은 ‘가스파리노’의 이름이 ‘베르가모의 가스파리노’(Gasparinus de Bergamo. 1360~1431) 또는 ‘바르지짜의 가스파리노’(Gasparino da Barizizza)로 함께 기록되는 혼란은 그가 밀라노 북동쪽의 도시 ‘베르가모’(Bergamo)의 ‘바르지짜’(Barizizza)마을에서 태어난 사실에서 생겨난 이름임을 짚고 갑니다)
또한, 이와 같은 선구적인 교육학자 ‘가스파리노’에게서 공부한 ‘펠트레의 ‘비토리노’(Vittorino da Feltre. 1373~1446)는 학교를 졸업하고 ‘가스파리노’의 추천으로 만투아의 후작 ‘잔프란체스코 1세’(Gianfrancesco I Gonzaga. 1395~1444)의 아들 ‘루도비코 3세 곤자가’(Ludovico III Gonzaga. 1412~1478)와 여동생 ‘세실리아 곤자가’(Cecilia Gonzaga. 1426~1451) 남매의 개인 교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에게 교육받던 자녀들이 너무나 공부를 즐거워하는 사실에 감동하여 만토바 후작은 ‘비토리노’에게 학교 설립의 권한을 일임하였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학교가 바로 선구적인 교육의 지평을 밝힌 기쁨을 주는 학교로도 알려진 ‘즐거운 학교’(La Giocosa)입니다. 당시 ‘비토리노’는 귀족 자녀들의 교육과 함께 가난한 아이들이 동등한 조건으로 공부 할 수 있는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열린 학교를 추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교육 과목을 인본주의 학문은 물론 다양한 체육 과목을 함께 공부시키는 선구적인 교육의 지평을 열어 최초의 체육교육 커리큘럼이 정립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선구적인 교육부흥의 등불을 켠 베르가모의 ‘가스파리노’(Gasparino da Barizizza, 1360~1431)의 숭고한 숨결이 세상을 떠나갈 즈음 1430년 오스만 제국에 의하여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이 무너지면서 많은 학자가 이탈리아로 도피하였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학자 중 한 명이었던 ‘테오도루스 가자’(Theodorus Gaza. 1398~1475)가 이탈리아 여러 곳을 거쳐 1440년경 파비아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칠 적에 ‘펠트레의 ‘비토리노’(Vittorino da Feltre. 1373~1446)가 세운 ‘즐거운 학교’(La Giocosa)에서 공부하였던 ‘야코보 다 산 카시아노’(Iacopo da San Cassiano. 1395~1454)가 파비아 대학에서 예술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며 만투아 후작 ‘잔프란체스코 1세’(Gianfrancesco I Gonzaga. 1395~1444)의 아들 ‘루도비코 3세 곤자가’(Ludovico III Gonzaga. 1412~1478)도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야코보 다 산 카시아노’가 ‘테오도루스 가자’의 깊은 학문을 헤아려 ‘비토리노’에게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테오도루스 가자’가 만투아의 즐거운 학교(La Giocosa)에 교수로 재직하게 됩니다. 당시 그는 고대의 정통한 사본을 바탕으로 그리스어를 배우게 하여 제자들이 정통한 라틴어를 빠르게 익힐 방법을 교육했던 것입니다.
깊은 학문을 가졌던 그는 1447년 페라라 대학(University of Ferrara)이 세워지면서 그리스어 교수로 초빙되어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1450년 '니콜라스 5세 교황’(Nikolaus v. 1397~1455)의 초청으로 로마에 가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번역과 함께 고대 그리스 작가의 사본 번역에 참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테오도루스 가자’(Theodorus Gaza. 1398~1475)는 당대 최고의 그리스어 학자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번역에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발휘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테오도루스 가자’ 의 말년이었던 1471년 교황에 즉위한 ‘식스투스 4세 교황(’Sixtus IV’ 1414~1484)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사본에 대한 라틴어 번역을 요청하였습니다. 그가 번역을 완료하였을 때 받았던 너무나 굴욕적인 번역료를 로마를 가로지르는 티베리나 강에 던져버렸던 그는 나폴리로 이동하여 생을 마쳤습니다.
이와 같은 ‘테오도루스 가자’에게 공부하여 고대 그리스 학문을 널리 알린 제자의 이야기도 빠트릴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그의 제자 ‘데메트리오스 칼콘디레스’(Demetrios Chalcondyles. 1423~1511)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1449년 로마로 이주하여 ‘테오도루스 가자’에게 공부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명석한 지혜와 반듯한 인품을 지켜본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메디치가의 가장 정점의 인물이었던 위대한 ‘로렌조 드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입니다.
위대한 ‘로렌조 드 메디치’는 ‘데메트리오스 칼콘디레스’를 자녀의 가정교사로 초빙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훗날 '레오 10세 교황'(Pope Leo X. 1475~1521)이 ‘데메트리오스 칼콘디레스’에게서 공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1463년 파도바대학 교수가 되어 그리스 문학부장의 자리에 올랐으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1479년 ‘로렌조 드 메디치’가 피렌체로 초빙하여 메디치 가문이 설립한 ‘플라톤 아카데미’를 이끌었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와 함께 플라톤 학문의 라틴어 번역 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Homeros, BC. 800?~BC750)의 시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를 편집 번역하여 1488년 출판하였습니다. 이는 피렌체에서 최초로 인쇄된 초판본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서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오랜 역사 동안 2000여 종의 다양한 사본이 전해져 왔습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주요한 내용을 함축한 라틴어 요약본이 교재용으로 쓰였습니다. 이에 ‘데메트리오스 칼콘디레스’가 다양한 그리스어 정통 사본을 바탕으로 편집한 최초의 그리스어 인쇄본 책이 출판되었다는 말입니다.
![]() ▲ 좌로부터) Demetrios Chalcondyles‘ /‘산드로 보티첼리’/ ‘프리마베라’(Primavera) / Birth of Venus/ 출처: https://en.wikipedia.org/ © 한국미술센터 |
또한, ‘데메트리오스 칼콘디레스’는 출판과 편집과정에서 비잔틴 제국의 인문주의자이었던 ‘마누엘 크리솔로라스’(Manuel Chrysoloras. 1355~1415)가 펴낸 ‘그리스어 문법’체계를 바탕으로 편집하였던 내용도 참고사항입니다. 이와 같은 ‘마누엘 크리솔로라스’는 비잔틴 제국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나 유럽에 주요한 나라를 순회하며 그리스어를 가르치면서 그리스 문학을 소개한 선구적인 인물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어 문법’을 저술하여 가장 쉽고 정통한 그리스어 문법체계를 정립한 것입니다. 그의 많은 제자 중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초기 공화주의를 지지한 인문주의 정치 철학자로 시민적 인문주의를 발전시킨 ‘레오나르도 부르니’(Leonardo Bruni. 1370~1444)가 그에게 공부한 인물입니다.
이와 같은 ‘데메트리오스 칼콘디레스’가 펴낸 ‘호메로스’의 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바탕이 되어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세기의 걸작 ‘비너스의 탄생’(Birth of Venus)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메디치 가문이 주문하여 1478년 제작된 ‘보티첼리’의 첫 작품인 봄을 뜻하는 ‘프리마베라’(Primavera)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이야기로 함께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그 내용이 많은 논란과 추정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채 아직도 끝없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는 작품으로 기회가 되면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보기로 합니다.
이와 같은 ‘데메트리오스 칼콘디레스’(Demetrios Chalcondyles. 1423~1511)는 비잔틴 제국의 몰락을 고대 도시 트로이의 역사에 견주어 150년간의 치열한 역사를 담아낸 ‘역사의 증명’(Proofs of Histories)을 펴낸 저자인 ‘라오니코스 칼콘디레스’(Laonikos Chalkokondyles. 1430~1470)가 그의 친동생입니다. 또한 그의 학문을 전수 받은 독일의 인문학자‘ 요하네스 로이힐린’(Johann Reuchlin. 1455~1522)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정통한 학자가 되어 독일에 관련 학문의 보급과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독일이 유대인의 그리스도교 개종의 목적으로 유대 서적을 말살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였던 학자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이와 같은 ‘보티첼리’가 탄생시킨 인류의 걸작 비너스의 탄생이 그려진 근원이었던 ‘데메트리오스 칼콘디레스’와 독일의 인문학자‘ 요하네스 로이힐린’의 스승이었던 ‘테오도루스 가자’(Theodorus Gaza. 1398~1475)가 1447년 페라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의 학문을 전수한 북유럽의 인문주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루돌프 아그리콜라’(Rudolf Agricola. 1444~1485)를 짚고 가야 합니다.
그는 네덜란드 북부 ‘흐로닝언’(Groningen)의 작은 도시 바플로(Baflo)에서 태어나 ‘에르푸르트 대학’(University of Erfurt)을 졸업한 이후 1460년 이탈리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파비아 대학에서 민법을 전공하고 1475년 페라라 대학에 입학하여 ‘테오도루스 가자’에게 수학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깊은 학문적 역량을 키워 심미적인 고전 번역과 해석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순수한 이성적 성경해석에 중점을 두는 스콜라학파에 반대하여 ‘변증학 발견론’(De inventione Dialectica) 을 펴냈습니다.
이와 같은 ‘루돌프 아그리콜라’의 심미적인 인문학의 바탕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에 가장 주요한 인물이었던 제자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의 수사학적 성경 해석이 가능하였습니다. 또한, 제자인 독일 뮌터(Münster)에 인접한 오늘날 슈타인푸르트(Steinfurt) 출신의 ‘알렉산더 헤지우스’(Alexander Hegius. 1433~1498)에 대한 이야기도 짚고 가야 하는 내용입니다.
그가 로마 가톨릭 경건주의자 단체인 ‘공동생활의 형제회’에서 활동하면서 운영하였던 네덜란드 중부도시 ‘데벤테르’(Deventer)의 형제학교 교장이었을 때 그리스어를 교과과목으로 지정하여 인문학의 바탕인 그리스어의 조기교육에 문을 열었습니다. 바로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가 어려서 이곳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러한 바탕에서 훗날 역사에 영원한 성경으로 남은 ‘그리스어 신약성경’이 탄생하였던 것입니다.
나아가 독일의 종교개혁가 ‘루터’ 또한 독일 작센의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있었던 형제학교에서 공부하였던 사실까지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알렉산더 헤지우스’는 낡은 중세교육 방식과 비합리적인 교과서를 버리고 고전 언어의 습득으로 학생 스스로 고대의 작가와 저술을 공부하게 하는 교육방법을 혁신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는 가난한 학생들의 교육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은 것은 책과 몇 벌의 옷뿐 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오랜 역사를 헤아려 성경 번역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이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의 이주 정착촌으로 알려진 비잔틴 제국의 자치도시 스파르타 출신의 ‘조지 헤라스무스’(George Hermonymus)와 프랑스 신학자로 프랑스 개신교 운동의 선구자로 살펴지는 ‘자크 르페브르 데타블’(Jacques Lefèvre d'Éptples. 1455~1536)입니다, ‘조지 헤라스무스’는 그리스 ‘필레폰네소스’(Peloponnese) 남동쪽의 라코니아(Laconia)지역에 오랜 전설을 안고 조성된 비잔틴 제국의 자치도시 스파르타에서 태어나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탈리아로 갔습니다. 이후 프랑스로 건너와 소르본 대학 전신인 콜레주 드 소르본에 최초의 그리스어 강사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파리도서관의 고대 그리스 도서를 연구하며 당대 가장 명성을 가진 그리스어 학자였습니다. 당시 그에게 그리스 학문을 공부한 인물이 에라스뮈스와 ‘자크 르페브르 데타블’입니다.
![]() ▲ (좌로부터) Vittorino da Feltre / Johann Reuchlin/ Jacques Lefèvre d'Éptples/ Pierre Robert Olivetan./ 출처: https://en.wikipedia.org/ © 한국미술센터 |
‘자크 르페브르 데타블’(Jacques Lefèvre d'Éptples. 1455~1536)은 성직자가 되어 콜레주 드 소르본에 입학하여 ‘조지 헤라스무스’에게서 공부하였습니다. 이후 1486년 무렵 이탈리아에 건너가 10여년간 머무르면서 피렌체와 로마 그리고 베네치아의 주요한 학자들과 교유하였습니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콜레주 드 소르본의 부속대학인 ‘라모앙 추기경 대학’(Collège du cardinal Lemoine)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비로 이러한 시기에 ‘장 칼뱅’을 종교개혁의 운명적인 험로로 인도한 종교 개혁가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 1865~1565)이 ‘자크 르페브르 데타블’의 제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당시 ‘프랑수아 1세 왕’(François I. France. 1494~1547)과 왕의 누나인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Marguerite de Navarre. 1492~1549)의 헌신적인 후원에 힘입어 고전 연구와 성서연구에 열중하여 1522년 독일의 루터가 독일어판 신약성서 번역본을 출판한 다음 해 1523년 프랑스어 신약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이후 1530년 프랑스어의 완전한 성서 번역이 이루어져 출판된 이후 1534년 히브리어와 헬라어 본문의 대조가 이루어진 개정판이 독일 앤트워프의 프랑스 출판업자 ‘메르텐 드 케이세르’(Merten de Keyser. ?~1536)에 의하여 출판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을 바탕으로 바로 다음해인 1535년 그의 제자이며 장 칼뱅의 사촌인 ‘삐에르 로버트 올리베땅’(Pierre Robert Olivetan. 1506~1538)에 의하여 '올리베땅 성경‘(Olivétan Bible)이 출판되어 프랑스의 종교개혁에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어 경쟁적으로 이루어진 성경 번역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음 칼럼은 (192) 겔러리 관장이 쓰는 역사의 의미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