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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195) - 갤러리 관장이 쓰는 대중음악의 역사(2)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5/31 [15:46]

팝(Pop)과 록(rock), 그리고  재즈(jazz)와 블루스(Blues)로 대표되는 서양 대중음악이 아메리카에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대를 이은 뜨거운 눈물의 외침과 몸짓에서 탄생한 음악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류의 가장 잔인한 노예제도의 사슬에 묶여 살면서 가슴에 젖어 들고 뼈에 사무쳐오는 울음을 삼킨 외침과 몸짓이 다양한 음악으로 발전된 역사적 배경과 시대 상황을 상세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에 대중음악이 다양한 예술 장르 중에서도 가장 긴밀하게 소통하는 언어이며 생활 속의 감성이라는 사실을 중시하여 이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와 같은 서양 대중음악의 역사를 헤아리려면 음악에 대한 감성이거나 이해의 수준이 기본적인 바탕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에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가 대중음악의 역사에 대하여 헤아리게 된 배경을 잠시 소개합니다. 필자는 우리나라에 상업용 컴퓨터가 출시되기 전 민간 경제연구소에서 증권분석 일을 하면서 늘 컴퓨터와 함께 생활하였던 우리나라 컴퓨터 1세대로 컴퓨터를 통하여 음악에 입문하였습니다.

 

컴퓨터를 통하여 음악에 입문하였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1993년 미국의 코넬 대학교에서 개발한 최초의 화상회의 프로그램 ‘쿠 씨미’(CU-SeeMe)가 매킨토시용으로 개발되어 윈도우 웹 기반의 프로그램 버전이 출시되었습니다. 당시 1993년 영국의 한 방송사에서 이를 기반으로 최초의 디지털 TV 방송을 시작합니다. 이후 1995년 미국 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생들이 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최초의 인터넷 라디오 방송이었던 ‘WXYC’(89.3 FM)방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에 ‘쿠 씨미’(CU-SeeMe) 프로그램을 통하여 전 세계의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개인 화상방송과 인터넷 라디오방송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쿠 씨미’(CU-SeeMe) 프로그램은 세계 최초의 인터넷 화상 회의 클라이언트 서버(client server)를 제시한 것입니다. 클라이언트 서버란 기술적으로 서비스 사용자가 서버(server) 즉, 통신 네트워크를 자신의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원리입니다. 이는 IT 기술 초기에는 획기적인 기술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프로그램이 공개되면서 필자는 한국에서는 선구적으로 ‘쿠 씨미’(CU-SeeMe) 멤버십 버전을 구매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천리안이거나 하이텔과 나우누리와 같은 텍스트 바탕의 인터넷 채팅 개념인 커뮤니티 사이트가 존재하였지만, 글로벌 커뮤니티 화상프로그램 ‘쿠 씨미’(CU-SeeMe)의 세계는 신천지였습니다. 단순하게 텍스트로만 소통하는 것이 아닌 전 세계의 다양한 분야의 고수들이 자신의 특기와 전문성을 실제 화상과 음성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안고 화상채팅이 생겨났으며 이후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개인방송으로 대표되는 생방송 플랫폼 아프리카TV가 탄생한 것입니다. 아프리카TV는 P2P라는 한층 발전된 기술 기반의 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P2P란 인터넷에서 개인과 개인이 직접 파일을 공유하는 기술로 앞에서 언급한 클라이언트 서버의 개념에서 발전된 기술입니다. 이는 개인 컴퓨터들이 직접 연결되어 모든 컴퓨터가 다양한 콘텐츠를 공급하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 (좌로부터 ) ‘알라 파카 투어레’(Ali Farka Touré)/ ‘라이 쿠더’(Ry Cooder) / Talking Timbuktu 앨범/ 출처: https://en.wikipedia.org/     ©한국미술센터

 

 

당시 필자는 화상프로그램 ‘쿠 씨미’(CU-SeeMe)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음악인들이 진행하는 방송을 통하여 실로 많은 음악을 접하였습니다. 이후 영상 압축 기술인 MPEG에서 오디오 부분을 분리한 데이터 압축 기술로 탄생한 MP3 파일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오디오 테이프와 CD기기를 무력하게 만든 대 전환을 가져온 음악의 역사가 열리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1997년 미국의 널소프트사(Nullsoft)에 의하여 컴퓨터 기반에서 MP3 음악을 재생하는 프로그램 ‘윈엠프’(winamp)가 출시되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에 최초의 인터넷 라디오 서비스와 인터넷 음악방송을 지원하는 사이트 ‘인라이브’(Inlive)가 생겨나면서 음악방송을 지원하는 다양한 사이트들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에 필자는 20여 년간 틈틈이 취미 생활로 음악방송을 해오면서 클래식에서 대중음악은 물론 뉴에이지와 우리나라 가요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음악을 소개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서양의 대중 음악사를 공부하였습니다.

 

이에 음악이라는 드넓은 바다를 표류하여온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음악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 헤아려 볼 생각입니다. 이에 다양한 음악이 탄생한 시대가 품었던 정신과 함께 여러 이야기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서양 대중음악의 역사가 과학 문명의 발전사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컴퓨터로 대표되는 IT 기술의 변화와 놀라울 만큼 동행하여온 내용이 많은 사실을 헤아렸습니다. 이는 대중음악이 노래를 말하는 표현 언어는 다르지만, 그 감성은 국경이 없는 사실에서 바로 인터넷이 세계를 하나로 묶어버린 문명의 감성과 맞닿은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대표적인 내용으로 들려오는 음악이 있습니다. 닫혀버린 남미의 땅 쿠바의 음악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입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 대하여 이해하려면 쿠바의 역사를 요약하여 짚고 가야 합니다. 쿠바는 1492년 아메리카를 탐험 중이었던 스페인의 콜럼버스가 쿠바섬을 발견하기까지 소수의 종족을 유지하며 살아가던 평화로운 섬이었습니다. 이후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어 100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끌려가 담배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에서 피와 눈물을 흘린 땅입니다. 1898년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4년간 미국 군정에 의하여 통치되었다가 1902년 독립하였습니다. 이후 1959년 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하면서 자유 진영과 단절되었습니다.

 

이러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16세기 초 자신들의 기약이 없는 고단한 운명을 함께 어루만지는 모임 ‘카빌도 공동체’(Cabildos de nación)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오랜 조상의 모임이었던 ‘카빌도 공동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흑인사회를 이끌어 갔습니다. 이러한 기반에서 만들어진 흑인사회의 휴식 공간이며 소통 공간이었던 회원 전용 사교 클럽이 바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친목 클럽이 서로 춤과 음악을 공유하고 교환하는 문화를 일구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랜 노예 생활에서 구전으로 전해온 서글픈 애환의 가락이 스페인의 강렬한 음악에 녹아들면서 어느 시기에서부터 특유의 음악이 생성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흑인의 춤과 노래가 늘 존재하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많은 클럽이 성황을 이루었으나 1959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퇴폐적이라는 비판에 밀려 문을 닫아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1961년 미국과 외교 관계가 단절되면서 오랜 역사를 품은 음악이 흐르던 사교 클럽 공간은 물론 그 음악과 이를 노래하던 가수들도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습니다.

 

이러한 쿠바의 재즈 음악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미국의 기타리스트인 ‘라이 쿠더’(Ry Cooder. 1947~)에 의해서입니다. 그는 지난 1995년 영국의 음반회사 ‘월드 서킷’(World Circuit) 사의 설립자인 ‘닉 골드’(Nick Gold)에게 이러한 내용을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반드시 짚고 가야 하는 가수가 있습니다. 서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서부에 나라 말리공화국의 가수 ‘알라 파카 투어레’(Ali Farka Touré. 1939~2006)입니다. 그는 오랜 역사를 가진 부족 ‘송가이족’(Songhay)의 후예로 서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종족 ‘풀라인’(Fula people)입니다. 그는 이와 같은 ‘송가이 어’(Songhay)와 ‘풀라인 어’(Fula)에서부터 이슬람 유목민 계열의 ‘투아레그 어’(Tuareg)와 밤바라 어(Bambara) 와 같은 서아프리카의 다양한 언어로 노래한 가수입니다. 그의 노래가 말리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서 그에게는 아프리카의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라는 별명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알라 파카 투어레’의 뛰어난 기타의 리듬감이거나 노래에 담긴 호소력이 미국의 ‘일렉트릭 블루스’(Electric Blues)의 선구자인 ‘존 리 후커’를 연상케 하는 요소가 많았던 것입니다.

 

나중 필자가 살펴 갈 블루스 편에서 ‘존 리 후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다시 살펴지겠지만 간략하게 그를 요약합니다. 그는 미국의 블루스 뮤지션이며 기타리스트로 음악 초기에 기타와 하모니카로 연주하는 ‘델타 블루스’(delta blues) 음악을 추구하다가 ‘일렉트릭 블루스’(Electric Blues) 음악을 개척한 선구자입니다. 그는 손가락에 강철관을 끼워 현에 문지르는 슬라이드 기타 주법(slide guitar)의 선구자로 이러한 주법이 훗날 록(Rock) 음악을 탄생시킨 주요한 주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은 트롬본이나 관악기의 높이가 다른 2음의 연주에서 음을 옮겨 갈 때 음 사이를 뛰어넘는 주법인 ‘포르타멘토’(portamento)와 같은 것으로 강철 피크로 현을 문질러 미끄러지는 음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블루스 리듬을 개척한 뮤지션으로 블루스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부기 칠렌’(Boogie Chillen) 이거나 ‘아임 인 더 무드’(I'm In The Mood) 그리고 ‘붐 붐’(Boom Boom)과 같은 그의 대표곡은 널리 알려진 음악입니다,
 
이와 같은 ‘존 리 후커’와 비교된 ‘알라 파카 투어레’(Ali Farka Touré. 1939~2006)의 음악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그의 라디오 녹음 음악을 들었던 미국의 기타리스트이며 프로듀서인 ‘라이 쿠더’에 의해서였습니다. 당시 ‘라이 쿠더’는 ‘알라 파카 투어레’의 음악을 접하고 놀라운 충격을 받게 됩니다. 자신의 귀가 의심스러워 동료들과 함께 다시 검토한 결과 ‘알라 파카 투어레’의 음악이 블루스와 너무나 정통하게 맞닿아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미국의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와 ‘알라 파카 투어레’가 만나게 되어 영국의 음반회사 ‘월드 서킷’(World Circuit) 사에서 함께 협업한 월드뮤직 앨범 ‘팀북투를 말하다’(Talking Timbuktu)가 1994년 탄생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세계 대중 음악계는 이 앨범이 세상에 나오면서 블루스가 미국에서 탄생하여 아프리카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는 잘못된 관념에 대하여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알라 파카 투어레’가 다양한 아프리카 언어로 10곡을 노래한 ‘팀북투를 말하다’(Talking Timbuktu)는 그가 블루스를 노래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블루스가 아니라고 평가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는 그의 노래에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오랜 슬픔을 주고받은 ‘콜 앤드 리스폰스’와 같은 블루스의 가장 고유한 양식은 물론 아프리카의 향토적 서정성을 품은 노래들이 마치 아프리카 강물에서 건져 올린 신성한 블루스처럼 눈부시게 빛났던 것입니다. 당시 이 앨범은 전 세계에 월드뮤직의 새로운 인상을 주었으며 그해 1994년 그래미상 ‘최고의 세계음악 앨범 부문’(Best World Music Album)을 수상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안고 쿠바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 대하여 다시 살펴봅니다. 당시 영국의 음반회사 ‘월드 서킷’(World Circuit) 사의 설립자인 ‘닉 골드’(Nick Gold)대표는 말리의 가수 ‘알라 파카 투어레’(Ali Farka Touré. 1939~2006)의 앨범제작으로 대성공을 거둔 이후 프로듀서 ‘라이 쿠더’와 말리의 뮤지션 2명과 쿠바의 뮤지션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구상하였습니다. 당시 월드뮤직 음반제작에 주력하였던 ‘월드 서킷’ 음반사의 아프리카 음악 제작에 참여하였던 경력이 있는 쿠바의 아바나 출신의 음악가 ‘후안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Juan de Marcos González. 1954~ )가 쿠바 현지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지휘와 현대 화성학을 공부하고 쿠바에 돌아와 ‘시에라 마에 스트라’(Sierra Maestra) 라는 1976년에 조직되어 쿠바의 전통음악을 이어가는 쿠바밴드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밴드를 ‘아프리카 쿠바 올스타’(Afro-Cuban All Stars)란 이름으로 개명하여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녹음 세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 (좌로부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 카네기홀 공연/ 출처: https://en.wikipedia.org/     ©한국미술센터


이후 1996년 ‘월드 서킷’ 사의 ‘닉 골드’ 대표와 프로듀서 ‘라이 쿠더’가 쿠바에 모였으나 구상한 쿠바음악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난항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외교 관계가 없었던 말리의 뮤지션 2명의 입국이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현지 감독을 맡고 있었던 ‘후안 데 마르코스 곤잘레스’ 의 노력으로 쿠바에 오랫동안 음악 활동을 중단한 뮤지션들을 찾아 쿠바 국영 음반제작업체 ‘EGREM’의 스튜디오에서 6일 만에 녹음한 앨범이 바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입니다.

 

1997 년 9월에 발표된 이 앨범은 온 세계를 흔들었습니다. 또한, 독일의 영화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 1945~ )가 클럽의 노래장면과 인터뷰를 포함하여 음반 발표 이후 기획 되었던 카네기홀 공연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1999년 6월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이 영화는 음악과 함께 세계인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시 평균연령 70세의 뮤지션들이 보여준 감동은 음악의 위대함을 절감하게 하는 그 자체였습니다. ‘프란씨스코 레필라도’(Francisco Repilado)라는 본명을 가진 ‘꼼빠이 세군도’(Compay Segundo. 1907~2003)의 ‘CHAN CHAN’ 이거나, 볼레로 가수 ‘이브라힘 페레르’(Ibrahim Ferrer. 1927~2005)의 지울 수 없는 음색의 깊은 울림과 함께 유일한 여성 멤버이었던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 1930~)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그들은 우리의 가슴에 따뜻한 음악의 온기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러한 대중음악의 역사를 헤아리면서 당시 MP3 파일이 등장하였던 시대적 상황과 1997년 컴퓨터 기반에서 MP3 음악을 재생하는 프로그램 ‘윈엠프’(winamp)가 출시되었던 내용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미국과 국교가 단절된 쿠바의 음악이 온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1998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이 이루어져 모든 관객이 기립박수로 찬사를 보낸 내용이 엄밀하게 인터넷이라는 국경이 없는 문명의 감성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부족한 글을 써가면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와 같은 역사의 행간에 담긴 시대정신을 헤아려 드넓은 지구촌의 국경을 휘도는 인터넷 시대의 지혜를 살려 세계 속에 우뚝 서는 비전의 역량을 키워가기를 기대합니다. 다음 칼럼은 예술혼을 위하여 연재 칼럼 (196) 갤러리 관장이 쓰는 대중음악의 역사(3)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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