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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6/03 [17:05]

미국 LA 세리토스(Cerritos)시 최초의 한인 시장을 지낸 조재길(趙在吉-Joseph Cho) 전 시장이 캘리포니아주 29지구 상원의원 특별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오는 6월 5일(현지시간) 투표가 시작된다. 또한, LA 카운티 검사로 17년째 근무하고 있는 조 전 시장의 둘째 아들 ‘토니 조’(Tony Cho)가 LA 카운티 수퍼리어코트 60지구 판사 선거에 출마하였다, 이에 한국인 부자(父子)의 선거구가 겹친 지역의 투표용지에 조 전 시장과 아들이 함께 오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알려지면서 한인 사회의 깊은 관심은 물론 현지의 큰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투표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조재길(趙在吉-Joseph Cho) 전 시장이 출마한 캘리포니아주 29지구 상원의원 특별 선거는 내용이 좀 복잡하다. 이러한 선거가 열리게 된 배경을 보면 2017년 4월 캘리포니아주 에너지소비세 인상 법안에 ‘조시 뉴먼’(Josh Newman) 민주당 주 상원의원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이를 반대하는 공화당 유권자들이 소환(Recall) 청원에 들어가 충족된 서명을 받아 치루는 특별선거인 것이다.
 
투표에서 ‘조시 뉴먼’ 상원의원이 소환(recall)되면, 최다 득표를 획득한 후보가 상원의원에 오르게 된다. 중간선거는 11월에 다시 결선을 치르지만, 이번 6월 5일 특별선거는 소환(recall)이 확정되면 의원직을 이을 후보의 당선이 결정되는 까닭으로 결선 투표 절차가 없다. 

 

 

▲ (좌로부터) 조재길(趙在吉-Joseph Cho) 상원의원 후보와 ‘토니 조’(Tony Cho) 수퍼리어코트 60지구 판사 후보 / ‘코리안스트릿저널’(Korean Street Journal) 원본 / 출처: 미주한국일보 / 518 기념재단     © 브레이크뉴스

 

 

이에 공화당 후보 3명과 민주당 후보 3명이 출마한 이번 특별선거는 이 지역 공화당 유권자 투표율이 높은 통계와 소환 청원을 얻어낸 결과로 보아 ‘조시 뉴먼’(Josh Newman) 의원의 소환(recall)이 거의 유력하다. 이에 최종 1인의 당선자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전통적으로 특별선거의 투표율이 낮은 점에서 당선 가능 표가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에 해당 선거구인 오렌지카운티 북부지역에 거주하는 17,000여 명의 한인 유권자의 적극적인 지지가 더욱 절실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공화당 민주당 각 3명의 후보가 경쟁하고 있지만, 민주당은 조재길 후보 이외에는 별다른 선거운동을 펼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공화당 3명의 후보는 경쟁적인 선거운동으로 표가 나뉘게 되어 승산이 있는 선거라는 조 후보 측의 설명이다. 특히, 이번 선거는 정원 40명인 캘리포니아주 상원이 민주당 의원 27명, 공화당 의원 13명으로 현재 구성된 의석수의 변동을 가져오게 된다. 결과에 따라 의회 주요법안의 결정권을 가졌던 민주당 3분의 2석이 무너지게 되어 현지에 관심이 더욱 큰 것이다.  

 

이와 같은 캘리포니아주 상원 특별선거에 출마한 조재길(趙在吉-Joseph Cho)은 필자의 절친한 친구인 조원석(趙源奭)의 큰형이다, 조 전시장은 일본 규슈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성장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충북 단양출신 아버지 조용환이 결혼하자마자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하여 친척의 주선으로 1940년 부인과 함께 일본 규슈로 건너갔다, 1942년 태어난 누나 조향숙에 이어 1943년 일본 규슈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후 일본이 패망할 무렵 한국에 돌아와 태어난 여동생 조연숙과 두 남동생 조재설, 조원석에 이르는 3남 2녀와 함께 충북 단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단양초등학교 출신으로 안동사범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오산고등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 중 1963년 공군 학사 장교로 임관하여 복무하였다. 그는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공군참모총장 연설문 등을 작성하는 서한 장교로 복무하였다. 군에서 전역한 이후 결혼하여 보성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장남 엔디 조(Andy Cho)를 낳은 후 1974년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급하게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러한 배경에는 사연이 있었다, 필자가 파악한 내용으로는 1972년 10월 17일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목표로 내려진 비상조치 10월 유신이 원인이었다.

 

당시 모든 학교에는 10월 유신에 대한 교육지침이 내려졌다. 이러한 지침에 따라 의무적으로 학생 교육을 시켜야 했다. 그러나 당시 보성고 사회교사 조재길은 이러한 지침을 일체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알려지면서 수사선상에 오르게 되자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급하게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이후 그는 환경미화원과 주유소 종업원으로 일하며 캘리포니아 주립대(CSU) 노스리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76년 세리토스(Cerritos)시로 이주한 그는 LA 카운티 전산국 공무원을 거쳐 부동산업과 인쇄업으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당시 그는 1980년 조국에서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시민 학살에 대한 참상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1981년 2월 2일 주간지 ‘코리안스트릿저널’(Korean Street Journal)을 창간하였다,

 

당시 군부 독재의 언론 통폐합 조치로 사실 보도가 이루어지지 못한 국내와 달리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사실 보도를 통하여 미주 교포의 여론과 미국 주요 단체의 관심은 물론 세계 주요나라의 여론을 끌어냈다, 당시 그는 주간지 ‘코리안스트릿저널’의 많은 부수를 사비로 제작하여 미국 여러 지역에 배포하면서 1984년에는 일간지 ‘라성일보’를 추가로 발행하여 연간 40만 달러에 이르는 비용을 사비로 충당하여 한때 파산 위기에까지 내몰렷다. 2015년 조재길 전시장은 1981년 2월 2일 창간되어 1991년 2월 28일 제517호로 폐간된 '코리안스트릿저널' 모든 호(517호) 원판을 5·18기념재단에 기증하였다. 재단 측은 역사적인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를 영구히 보존하는 디지털 작업을 추진하였다,  
 

▲ (좌로부터) 조재길 후보와 부친 조용환 / 조재길 저서/ 조 후보 동생 조원석과 가수 미녀와 야수/ 출처: 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조 전 시장은 1981년 전두환 대통령 방미 반대시위에 앞장서면서, '코리안스트릿저널'을 통하여 5·18민주화운동 위령탑 건립 모금 운동에서부터 민주화운동 수감자 가족과 단체 지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1986년에는 직선제개헌을 위한 미주 동포양심선언대회와 직선제개헌 서명운동과 같은 군부 독재체제 반대와 민주화 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당시 군부 독재의 입국 불허 인사로 분류되어 조 전 시장은 한국 땅을 밟지 못하였다, 1987년 어머니 전경애 여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 측의 인도적 주선으로 15일 체류 자격을 얻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당시 그가 입국한 공항에서부터 2명의 수사관이 동행하여 미국으로 돌아가는 출국장까지 줄곧 동행하였던 것이다. 

     

조 전 시장은 1990년 언론인 자격으로 2번의 방북을 통하여 취재한 내용을 담은 ‘북한은 변하고 있는가’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이후 남북한 통일과 평화에 대한 연구를 통한 운동을 펼치면서 북한 문제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특히, 1993년 출판한 저서 ‘한반도 핵 문제 해결방안’과 1994년 출판한 ‘한반도 핵 문제와 통일’ 그리고 1998년 ‘통일로 가는 길이 달라진다’와 2006년 ‘북핵 위기와 한반도 평화의 길’을 출판하면서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 대한 연구에 전념했다, 이후 조 전 시장은 현지 정치에 뛰어들어 2007년 2전 3기 끝에 시의원에 선출되어 재선되었으며 2010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르토스 시장에 취임하였다. 

 

필자는 80년대 초반 미국에서 광주민주화 운동을 보도하는 조재길의 동생이라며 친구가 소개하는 조 전 시장의 막냇동생 조원석을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오늘날 교통대학교의 전신인 철도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와 교우하면서 그의 큰형 조재길 전 시장의 많은 활동을 알게 되었고, 이와 같은 큰형의 활동으로 그의 작은 형이 모처에 끌려가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언제나 형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전남 해남이 고향인 필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간에 광주에서 실로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참상과 아픔을 직접 보고 경험하였다, 이에 먼 미국에서 활동하는 조 전 시장의 이야기를 친구를 통하여 전해 들으면서 늘 마음에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렇듯 질곡의 역사를 관통한 진정한 민주 투사들의 아련한 얼굴들이 스쳐 간다. 오늘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연구로 숨겨진 많은 이야기가 공개되고 정리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연장선이었던 목포의 5월 항쟁 또한 빠트릴 수 없는 역사이다. 당시 필자는 5월 21일 역사의 현장인 광주와 목포에 있었다, 당시 화정동에서 시민들이 운영하던 버스를 타고 유동사거리에서 내려 낮 1시 직전 광주 금남로 끝에 도착해 있었다. 석가 탄신일로 공휴일이었던 그날 금남로는 남녀노소 모두가 대로를 가득 메워 앞으로 쉽게 나갈 수가 없었다. 이어 도청 앞 광장 쪽에서 무차별 총소리가 들려오면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바로 오후 1시경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이었다.

 

실제로 그 상황을 목격하지 않은 사람은 그 충격을 가늠하기 어렵다, 5월의 부신 햇빛 아래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당시 너무나 젊은 나이의 필자는 오직 아!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가 보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2시쯤이었을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금남로 대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틈을 뚫고 들어오는 끝이 없는 트럭들이 있었다. 트럭에는 LPG 가스를 모두 가득 싣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운전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얀 띠로 핸들과 몸을 묶어놓고 있었다. 도청을 지키는 공수부대원들을 향하여 그대로 돌진하여 자폭하겠다는 것이었다,

 

끝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욱 기막힌 일은 총상을 입고 메어 나오는 부상자들이 속출하는데 그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고 금남로 대로에 가득차 더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피가 흐르는 부상자를 들쳐메고 나오면 주변에 그것이 치과이든 피부과이던 어느 병원에서나 먼저 응급치료를 하고 있었다, 석가탄신일로 휴일이었지만 치과까지도 문을 닫지 않고 피 흘리는 부상자를 빨리 데려오라고 급하게 손짓하던 치과 간호사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슨 일이 생겨나는지도 모른 채 아무런 생각도 없이 분노한 시민의 외침에 섞여 그렇게 밀고 밀리며 분노하고 있었다, 도저히 앞으로 헤쳐 나가기 어려운 인파를 피해 전일빌딩 뒤편으로 돌아 당시 도청 옆에 있었던 광주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그때였다, 누군가 ‘여러분’ ‘이 엄청난 사실을 모든 지역에 빨리 알려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지역별 버스에 타세요, 타세요’! ‘여러분’! 하고 외쳐대는 고함에 누구라 할 것 없이 도시별 팻말이 그대로 붙어있는 버스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목포행 팻말이 붙어 있는 버스에 탑승하여 몇 대의 버스가 목포역 광장에 도착한 시간은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오후의 끝 무렵이었다,    
   
이어 목포역 광장에 운집한 목포 시민들은 무고한 광주 시민 학살에 대해 규탄대회를 밤낮으로 연일 열었다, 당시 무고한 광주 시민의 무차별 학살에 대한 실상이 목포에 전해지면서 목포는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하여 진압이 이루어진 27일 밤 마지막 규탄대회가 열릴 때까지 모든 일상을 접어두고 광주와 함께 투쟁하였다,   

      

당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군부정권의 만행에 저항하여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였다, 훗날 민주화 인사라는 역사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슬픈 역사의 숨결을 안고 조용히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진 필자의 기억을 스쳐 가는 많은 인물 중에 유난히 아픈 삶과 청춘을 바친 두 명의 진정한 민주투사가 기억난다.      

 

먼저 목포에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 장로이었던 그는 중앙대 약학대를 졸업하고 고향 목포에서 약국을 운영하며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진정한 재야 민주인사 안철(安哲)이다, 그는 목포를 대표하는 재야인사로 기독교장로청년연합회 회장과 목포 엠네스티 지부장을 맡아오면서 군사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다,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목포 시민 민주투쟁 위원회 위원장으로 시민 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극형이 구형된 그는 1심에서 징역 8년과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광주 교도소에 면회도 허용되지 않은 채 수감되었다, 이를 단식으로 저항하다 당시 보안사에 불려가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81년 12월 특사로 석방되었으나 당시 고문 후유증으로 2003년 세상을 떠났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전남 함평에서 조용히 은거하고 있는 안철 형의 동생 '안성'과 통화하면서 언제나 그랫듯이 형의 이야기가 나오면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의 모습이 여전히 음성에 녹아있었다.       
 

▲ (좌로부터) 광주 민주 항쟁 당시 금남로/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와 함께 목포 출신으로 서강대 경영학과 재학 중에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된 박태율이 있었다, 그는 1977년 신촌 로터리에서 시위하던 연대생 1백여 명이 전경에 쫓겨 서강대로 피하여 당시 교련 검열 중이던 서강대 3학년생 대열에 합류하였다, 당시 교내에 진입한 전경이 이들을 무차별 체포하면서 이에 분노한 서강대 학생들의 극렬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른바 서강대 교련시위 사건이다, 당시 박태율은 시위 주동자로 구속되어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 받고 수감 중 연속된 옥중 시위를 주도하여 추가형량을 받고 복역 중에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특사로 석방된 그는 고향 목포에 내려가 야학 활동 중에 광주민주화항쟁 때에 목포 시민 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수감되었다. 

 

그릇된 역사의 저항에 청춘을 바친 진정한 민주투사이었던 그는 전언에 의하면 당시 군부독재의 조처로 멕시코로 추방되어 멕시코에 정착하여 살고있다고 한다, 고운 얼굴에 귀한 집 자식쯤으로 기억되던 그가 굴절된 역사의 모진 바람을 비켜서지 않고 청춘을 바쳐 저항하던 결연한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도 이제는 이순의 나이가 되어 먼 이국에서 바라보는 조국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역사의 바람에 몸과 마음을 바친 정신이 헛되지 않은 ‘나라다운 나라’가 열리기를 기대한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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