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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199) - 가왕 조용필을 헤아린 PD 이야기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8/03 [13:10]

지난 8월 1일 KBS 1TV 방송의 국민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아침마당 '도전 꿈의 무대'에 출연한 목비라는 가수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오래전 어느 라이브 카페에서 깊은 울림을 가진 성량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가수의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들었던 가수의 목소리는 글자 그대로 로커였다. 그러한 가수가 어느 날 성인가요를 부르고 있었다, 현실이라는 상황이 만들어낸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가수의 방송을 보면서 생명과 같은 소리를 잃어버린 사연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가수에게 다가왔던 아픔과 시련의 이야기만큼 어쩔 수 없는 소외와 아픔을 가진 많은 사람이 존재하는 세상에 그 통증을 품어주는 노래를 들려주는 가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속으로 우리나라 현대 가요사의 주요한 페이지와 같은 오랜 기억이 밀려든다.

 

▲ (좌) 가수 남진 목포 생가 (우) 가수 남진이 즐겨 들었던 전축 자료제공 - 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나는 어린 시절 목포에서 우리나라 가요계의 한 시대를 종횡한 남진 가수와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당시 목포 부둣가로 가는 길목인 영해동에 자리한 ‘안성’이라는 친구 집에 아주 귀한 전축이 있었다, 당시 소문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수입된 몇 개 중 하나라는 전축이었다, 당시 거대한 도서 지역 상권을 품고 있던 목포항에 백제약국과 동아약국 그리고 구세약국으로 제약과 화공약품 상권을 나누고 있었던 시절에 동아약국을 운영하였던 친구네 집의 장남이었던 안철(安哲) 형은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전남 목포민주화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안철 형과 목포고 동창으로 절친하였던 남진 가수가 학창시절 축음기가 아닌 최신 전축이 있던 친구 집에 자주 왔었다, 당시 남진 가수의 집안 또한 목포의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으로 축음기가 있었지만, 최신 스테레오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의 매력에 끌려 춤추고 노래하며 훗날 가수의 꿈을 키웠다. 지금은 전남 함평에 정착하여 자연공간에서 화초와 동물을 벗 삼으며 생활하는 친구에게 전축의 소재를 물었더니 자연공간에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전축의 사진을 보내왔다,    
    
이후 나는 서울로 올라와 그 시절에는 불모지와 같았던 TV 방송 예능프로그램 구성작가로 활동하던 숙부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숙부님의 절친이었던 MBC TV 공모 1기 PD로 많은 이야기를 남긴 김행신 PD 곁에서 당시 세상을 들썩이게 하던 많은 연예인을 직접 보고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니 강물과 같은 우리나라 예능의 역사와 같은 이야기들이 스쳐 간다. 이제는 아득한 전설처럼 묻혀버린 MBC TV의 김행신 PD는 MBC 공모 1기로 입사하여 폭풍과 같은 일화를 남기며 동기회 회장으로 MBC 예능프로그램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다가 1980년 군부정권에 의하여 해직되어 미국으로 떠났다, 1989년 복직되어 돌아왔으나 오랜 공백 동안 너무나 변해버린 환경을 바라보다 1993년 퇴직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흑인 강도의 총격에 2003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1969년 8월 오늘날에도 경향신문이 자리하고 있는 정동 사옥이 세워지면서 MBC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어 제1기 사원이 공모되었던 때는 당시 경향신문과 MBC가 함께 동거하던 시절이다. 이 시절 MBC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필자의 이야기가 꿈처럼 아득하게 기억 날 것이다. 김행신 PD는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MBC 공모 1기 PD 시험에 합격하여 첫 출근 날 고무신을 신고 출근하였다는 흥미로운 일화를 몇 번이고 들으면서 뒤를 잇는 여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렇게 들었던 이야기는 당시 국장님의 신입사원 훈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 된다, 의례적인 긴 훈시가 끝나자마자 신입 김행신 PD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대뜸 ‘국장님은 제 이름을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신입사원 이름을 일일이 알 수 없던 국장님의 당황한 표정 앞에 신입 PD의 목소리는 '자기 부하의 이름도 모르시면서 어떻게 훈시를 하신다는 것입니까?' 였다, 

 

예나 지금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돌발적인 사건 이후 신입 김행신 PD는 자동으로 동기회 회장이 되었으며 당시 노조가 없던 시대 상황에 모든 사원의 입이 되었다, 당시 필자의 기억으로 김행신 PD는 정부에서 지원하였던 해외 방송 견학과 연수프로그램에 유일하게 선발되어 싱가포르에서부터 몇 개국을 다녀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김행신 PD가 우리나라 가요사에 남긴 흔적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왕으로 평가하는 조용필 가수에 대한 이야기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단순하게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닌 필자가 직접 숙부님과 김행신 PD가 몇 번이고 언성을 높이던 현장을 목격한 이야기다. 그 내용을 살피게 되면 조용필 가수의 대표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얽힌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 (좌) 1970년 김해일 돌아와요 충무항에 발표앨범 (중) 조용필 1972년 돌아와요 부산항에 발표 앨범 (하) 1976년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 앨범 자료제공 - 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는 그 원곡이 따로 있었다, 그 원곡은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노래이다. 이는 오늘날 통영인 항구 도시 충무의 가수 지망생 김성술이 예명 김해일이라는 이름으로 작사한 곡에 작곡가 황선우가 곡을 만들어 1970년 12월 '돌아와요 충무항에' 라는 노래를 발표하였다. 1970년 유니버샬레코드사에서 임희숙, 김해일, 이장용, 김국환, 남미성과 같은 가수의 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12곡을 발표하면서 김해일의 '돌아와요 충무항에' 노래가 발표된 것이다. 음반 발매 이후 가수는 군에 입대하였다. 이러한 가수가 휴가를 나와 투숙하였던 대연각 호텔에서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최대의 화재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1층 호텔 커피숍에서 프로판 가스통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대연각 호텔 화재는 163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 참사로 가수 김해일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후 1972년 가수 조용필이 첫 싱글 앨범을 발표하면서 원곡 김해일의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제목과 가사를 바꾸어 발표하였지만, 당시에 쉽게 묻히고 말았다, 당시 발표한 노래는 오늘날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전혀 다른 버전으로 통기타 2대의 연주로 이루어진 곡이었다. 이후 1976년 가수 조용필이 새롭게 편곡하여 발표한 곡이 바로 오늘날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다, 이렇게 탄생한 노래는 당시 부산지역 음악다방에서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당시 일본 조선총련계의 한국 방문과 맞물리는 시대 상황을 맞아 인기 가요로 떠올랐다,

 

오랜 무명생활을 거쳤던 가수 조용필이 이렇게 떠오를 즈음 문제가 생겨났다, 그것은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이 가요계를 강타하였을 때에는 무명이었던 가수에 대하여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약식 기소되어 벌금형이 부과되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가 인기를 얻게 되자 1977년 1월 대마초 흡연에 대한 투서가 방송국에 연이어 날아들면서 논란이 커지자 1977년 5월 6일 가수 조용필이 장충체육관 공연을 마치면서 스스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물론 모든 방송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렇게 약 3년 가까이 다시 무명으로 돌아갔던 가수 조용필은 당시 정동 MBC 건너편 빌딩 당구장에 심심치 않게 모습을 보이면서도 자신의 음악에 대한 깊은 수련기를 가지게 된다. 가수가 훗날 경향 신문사 연재물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낚시를 떠났던 어느 시골 숙소에서 들려오는 전통민요 한오백년의 가락을 들으며 크게 일깨운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여러 사찰을 전전하며 우리의 국악과 민요에 담긴 감성을 인식하여 새로운 창법의 득음을 오래도록 연마하였다.

 

또한, 가수는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에 사운드 트랙으로 사용되었던 영국 출신 3형제 그룹 ‘비지스’(Bee Gees)의 'Stayin alive'와 ‘You Should Be Dencing'곡 등에 담긴 가성 창법에 견줄 수 있는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창법을 터득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과 유럽의 백인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감성으로 추구한 ’블루 아이드 쏘울‘(blue-eyed soul)이 엄밀하게 흑인 영가의 감성에서 의도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서 조용필 가수 또한 흑인 영가를 깊게 인식하면서도 우리의 전통 민요와 국악에 담긴 감성까지 헤아려 가성으로 승화시킨 노력이었다.

 

이와 같은 흑인 영가의 리듬 앤드 블루스 적인 쏘울에서부터 백인 뮤지션들이 추구한 ’블루 아이드 소울‘(blue-eyed soul)은 물론 우리 민요와 국악에 담긴 전통적인 감성을 깊게 헤아린 가수의 노력은 그가 1979년 활동을 재개하면서 발표한 곡에 흥건하게 녹아내렸다. 그는 1979년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사운드로 활동을 재개하면서 4월 5일부터 9일까지 서울 대한극장에서 대형 리사이틀을 마친 이후 14일 부산 공연을 시작으로 20여 일간 전국 순회공연을 하였다. 당시 리사이틀 공연에서 가수가 오늘날 강남 송파지역으로 옛 상업 요충지 송파장에서 전해 내려온 송파산대놀이 길잡이인 ‘해산 어멈’ 역을 맡아 열연하였던 사실에서 우리의 가락에 담긴 서민의 애환은 물론 전통에 담긴 음악적 기량들을 깊게 인식한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당시 상황을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면 리사이틀과 전국 순회공연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던 조용필 가수에게 1979년 10, 26 사건 이후 12월 6일 규제가 풀리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이에 방송 활동이 가능해지자 동아방송 안평선 PD로부터 연속극 공모당선작인 ‘창밖의 여자’ 주제가 요청을 받게 된다. 배명숙 당선 작가가 작사한 노랫말에 가수 자신이 작곡한 ‘창밖의 여자’가 바로 가수가 오랫동안 갈고 닦은 감성의 창법이 절절하게 배어있었다. 당시 동아방송에서 1980년 1월 1일부터 1월 31일까지 31회 방송하였던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창밖의 여자’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 몇 년 전 큰바람을 몰고 왔었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가수의 노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가수에 대한 새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라디오 연속극에서 주제가 ‘창밖의 여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지구레코드사에서 음반발매를 서둘렀다. 이에 1980년 3월 20일 ‘창밖의 여자’를 주제곡으로 조용필 1집 LP 음반이 발표되었다. 당시 음반의 A면에는 ‘창밖의 여자’. ‘돌아와요 부산항에’. ‘잊혀진 사랑’. ‘돌아오지 않는 강’.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순으로 수록되었고. B면에는 ‘단발머리’. ‘한오백년’. ‘대전 블루스’. ‘너무 짧아요’. ‘슬픈 미소’. ‘너와 나(군가)’가 수록되었다, 당시 음반은 발라드와 트로트와 디스코 그리고 록과 민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실린 음반으로 발매 3개월 후인 6월 무렵에 50만 장의 음반이 팔려나갔으며 이후 100만 장을 넘어서는 단일 음반 사상 한국의 최초 판매 기록을 세웠다, 

 

여기서 당시 필자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내용이 있다, 12월 6일 규제 조치가 풀린 직후 MBC 김행신 PD가 가수 조용필의 노래를 자신이 맡았던 프로에 연속적으로 소개하였다, 처음엔 한 달 4주 프로에서 2번씩 소개하더니 두 달 즈음 지난 후에는 4주 모두 조용필 가수의 노래를 소개하는 강수를 두고 있었다, 이때 조직의 윗선이었던 아마도 장두원 부장과 김포천 국장으로 기억되는 라인에서 형평성을 벗어난 프로그램 운영에 대한 우려와 질책이 연이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숙부와 김행신 PD가 이에 대하여 언성을 높여가며 이야기하던 상황을 몇 번이고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이어 1980년 3월 ‘창밖의 여자’ 앨범이 발표된 이후 김행신 PD 프로그램에 조용필 가수의 더욱 강력한 소개가 있었던 기억은 김행신 PD가 숙부에게 몇 번이고 ‘아!’ ‘넌 음치라 노래를 몰라서 그래!’ ‘두고 봐!’ ‘알게 될 거야!’라고 소리치던 기억에서 단호한 확신과 아집으로 가수 조용필의 등장을 예고하던 김행신 PD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 1980년 6월 조용필 가수는 미국으로 해외공연을 떠났다. 아마도 당시 7월 9일 미국 카네기홀에서 한국인 최초의 공연이 있었던 역사적인 일이었지만 당시 국내 정세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하여 모든 언론이 통제되던 때라 당시엔 보도가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수는 이렇게 카네기홀 공연에서부터 미국과 캐나다공연을 마치고 귀국길에 일본에 들러 공연을 마치고 7월 중순경 귀국하였을 무렵에 ‘창밖의 여자’ 음반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당시 지구레코드사에서 그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또한 그해 9월에는 일본의 매일 방송국(MBS)이 선정한 세계의 히트송 28곡에 조용필 가수의 창밖의 여자가 선정되었다는 특보가 날아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언론인 해직사태가 일어나면서 김행신 PD는 해직되고 말았다, 어느 날이었다, 두 삼촌이 나누는 대화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결론은 미국으로 가야겠으니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숙부는 동분서주하더니 필자의 기억에 ‘흙에 살리라’를 부른 홍세민 가수의 작은 아버지 되는 분으로 기억된다. 당시 일본에서 제작된 가라오케 기계의 한국판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던 회사라고 들었다, 이후 김행신 PD는 그 회사의 직원으로 입사하여 미국으로 떠났다,

 

주변의 걱정과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특유의 감성과 혜안으로 조용필 가수의 소개에 전념하던 PD 김행신 삼촌은 역사의 격랑에 희생되어 미국으로 떠났다. 그해가 저물던 때 가수 조용필은 1980년 ‘창밖의 여자’로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인기가수상과 최고인기 가요 상을 받았으며TBS 가요대상 등을 수상하면서 일약 최고의 스타로 비상하였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아득하게 묻혔던 기억들이 마치 현실처럼 생생하게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가슴에 품었던 푸른 꿈을 안고 10여 년 동안 라이브 무대를 뛰어다니며 가수의 길을 나섰다가 소리를 잃고 방황하다가 다시 꿈을 키우는 목비라는 가수의 아픈 이야기를 접하면서 지난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어려운 시대 상황에서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려오는 가수의 기량과 능력을 확신하며 저돌적인 아집으로 몰아붙이던 김행신 PD 삼촌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 (좌) 그룹 김트리오 시절의 조용필(이남이,김대환,조용필) (중) 1986년 창밖의 여자 발표 앨범 (우) 김행신 PD 와 타계 기사 자료제공 - 한국미술센터  © 브레이크뉴스  

 

지난 봄이었다, 만해 문학 박물관장을 지낸 오랜 지인 유정염 대표가 무조건 가야 한다며 끌고 가는 발길을 따라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는 인사동 거리를 따라갔었다, 바로 우리 갤러리와 지척에 있는 공간이었다, 옛 한옥을 개조한 독립군 아지트 같은 2층에 들어서니 우리나라 대중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흑우 김대환 박물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음악가 김대환에게 30년간 연습실을 후원한 유재만 대표가 그 현장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고인의 유품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기억마저 아득한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바로 전설적인 음악가 흑우 김대환과 가왕 조용필이 만났던 이야기는 조용필이라는 가수에 대한 음악적인 전환과 가왕 조용필이 존재하는 사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어 이와 같은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한다.  다음 칼럼은 (200) ‘전설의 음악가 김대환과 가왕 조용필 이야기’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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