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12월 1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키티 호크’(Kitty Hawk)에서 동력 비행기로 하늘을 날았던 ’라이트형제’(Wright brothers)는 인류 최초의 비행사가 되었다, 당시 라이트형제의 행적을 알게 되면 자신들의 비행에 앞서 하늘을 나는 꿈을 매만졌던 선구자들의 정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형제의 마음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이는 ’라이트형제’(Wright brothers)가 비행 실험을 준비하고 있었던 당시 최적의 기상조건을 가졌던 날은 1903년 12월 13일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형제는 그날 종일 맑은 하늘만 바라보며 비행을 하루 미루었다, 인류 최초의 기록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진 날을 맞아 하늘만 바라보며 그냥 흘려보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음날인 12월 14일이 프랑스 ‘몽골피에 형제’(Montgolfier brothers)가 1782년 12월 14일 최초의 열기구를 하늘에 띄웠던 121주년이 되는 날이었기에 선구자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선구적인 정신을 소중하게 품고 비행에 나선 다음 날 12월 14일은 전날 최적의 기상조건과는 다른 날씨였다. 그러나 ‘라이트형제’(Wright brothers)는 비행을 강행하여 완벽한 성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엔진 성능을 완전하게 숙지하지 못한 작은 실수로 비행기가 부서졌다. 이틀간 수리한 후에 12월 17일 다시 비행에 도전하여 인류 최초의 비행에 성공하였다.
![]() ▲ (좌로부터) 1969년 최초로 달을 밟은 Neil Armstrong /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 비행기 / ‘몽골피에 형제’/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미국 국회 도서관) © 브레이크뉴스 |
여기서 살펴 가야 하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최초로 달을 밟은 ‘닐 암스트롱’ 이야기다, 1969년 7월 16일 오전 9시 32분 우주선 ‘아폴로 11호’를 타고 지구를 떠난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1930~2012)은 1969년 7월 21일 2시 56분 우주의 달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암스트롱 선장‘의 우주복 주머니에는 내용물이 훤히 비치는 부드러운 ‘모슬린’(muslin])천으로 정성스럽게 포장한 작은 물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1903년 최초의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왼쪽 프로펠러 나무 조각이었다, 인류 최초의 유인 비행에 성공한 형제의 정신을 품고 달을 밟았다,
이처럼 인류 최초의 열기구를 띄운 ‘몽골피에 형제’(Montgolfier brothers)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최적의 기상조건을 가진 하늘을 바라보며 소중한 비행 일을 늦춘 ‘라이트 형제’이거나 최초의 유인 비행을 기록한 ‘라이트형제’가 탔던 비행기 조각을 품고 최초로 달을 밟은 ‘암스트롱’은 역사를 걸어간 정신을 이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다.
여기서 잠시 ’라이트형제’(Wright brothers)가 그처럼 중대한 거사를 앞두고 비행 일을 미루었던 ‘몽골피에 형제’(Montgolfier brothers)에 대하여 살펴본다, ‘몽골피에 형제’는 형 ‘조제프 미셸 몽골피에’(Joseph-Michel Montgolfier, 1740~1810) 와 동생 ‘자크 에티엔 몽골피에’(Jacques-Etienne Montgolfier, 1745~1799) 이다, 형제는 프랑스 남부의 아르데슈(Ardèche)에서 제지회사를 가업으로 이어오던 부모의 무려 16명이나 되는 자식 중 12번째와 15번째 아들이었다.
형 ‘미셸 몽골피에’는 어려서부터 발명가 기질을 가진 호기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동생 ‘에티엔 몽골피에’는 건축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공부를 떠났으나 제지회사를 이끌던 큰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1772년 집으로 돌아왔다, 형 ‘미셸 몽골피에’는 1775년 무렵 하늘을 나는 낙하산연구에 빠져있었다.
이와 같은 낙하산(parachute-落下傘)의 역사를 서양에서는 최초 기록을 중국의 전한 시대(前漢時代)의 역사가인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의 사기(史記) 기록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는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으로 5제(五帝)의 한 사람인 순(舜)임금이 어려서 어머니가 죽고 난 후 새로운 계모가 동생 상(象)을 낳았다, 이에 순(舜)을 죽이려는 음모가 연이었다. 어느 날 순(舜)이 곡물창고 지붕을 수리하자 계모가 불을 질러 순(舜)이 삿갓(笠) 두 개를 들고 뛰어내려 목숨을 구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정리된 것이다.
기록을 중시하는 서양에서 비록 설화이지만 높은 곳에서 탈출의 용도로 들고 뛰어내린 삿갓(笠)의 기능을 낙하산의 기능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낙하산에 대한 기록은 세계 여러 나라의 설화에서부터 다양한 기록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이슬람 왕국의 우마야드 왕조(Umayyad)와 아바스 왕조(Abbasids)가 교차하던 시대에 오늘날 스페인 지역인 안달루시아의 시인이며 수학자와 발명가이었던 ‘아바스 이븐 피르나스’(Abbas Ibn Firnas, 810~887)가 깃털로 된 날개를 달고 종탑에서 뛰어내린 이야기는 인류 역사에서 선구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훗날 알제리의 역사학자 ‘아메드 무하마드 알 마카리’(Ahmed Mohammed al-Maqqari. 1578~1632)의 저술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전해진 이 기록은 인류의 비행과 낙하의 역사에 공통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와 함께 영국 잉글랜드 남부의 윌트셔(Wiltshire)에 자리한 ‘맘즈버리 대 수도원’(Malmesbury abbey)은 베네딕토회가 설립한 수도원으로 10세기경 이곳 수도사이었던 ‘맘즈버리의 에일머’(Eilmer of Malmesbury)는 손과 발에 날개를 달고 수도원 탑 꼭대기에서 비행하였던 기록이 오랜 역사 동안 끝없이 전해져 왔다, 이와 같은 내용은 이곳에서 일생을 보낸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맘즈버리의 윌리엄’(William of Malmesbury. 1080~1143)이 이러한 기록을 오늘에 전한 장본인이다.
이와 같은 10세기의 수도사 ‘맘즈버리의 에일머’가 하늘을 날았다는 기록은 이후 성 요한의 계시록으로 알려진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인 묵시록 주석 본을 저술하여 유럽 중세사회에 널리 알려진 작가 ‘프라우드몽의 엘리낭’(Hélinand of Froidmont. 1150~1229)의 연대기 ‘크로니콘’(Chronicon)에 전해졌다, 이와 같은 ‘엘리낭’의 연대기 ‘크로니콘’에 담긴 ‘맘즈버리의 에일머’ 이야기는 트루아 퐁테인의 수도사 알베릭(Alberic of Trois-Fontaines. ?~1252)이 1241년 저술한 연대기 ‘크로니콘’(Chronicon)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이러한 기록은 다시 프랑스 ‘르와요몽 대수도원’(Royaumont Abbey)의 수도사였던 중세 의학자 보베의 ‘뱅상’(Vincent of Beauvais. 1184~1264)이 펴낸 백과사전이었던 역사의 거울(Speculum Historiale)에 그 내용이 온전하게 기록되었다. 이후 영국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인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14~1294)이 ‘클레멘스 4세 교황’(Pope Clement IV. 1190~1268)의 요청으로 1267년 저술한 자연과학의 총서 ‘더 위대한 작품’(Opus Majus)에도 하늘을 날았던 ‘맘즈버리의 에일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이와 같은 중세의 터널을 달려온 전설과 같은 기록은 인류문명의 새로운 부흥을 일깨운 르네상스의 물결을 품고 이어져 왔다, 이는 독일의 인문주의자이며 사학자로 1477년 튀빙겐대학교 설립의 주역이었던 ‘요하네스 나우클레루스’(Johannes Nauclerus. 1425~1510)가 1516년에 펴낸 ‘세계 연대기’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어 영국의 자연 철학자이며 왕립협회를 창시한 ‘존 윌킨스’(John Wilkins. 1614~1672) 주교는 자연신학의 선구적 지평을 열었던 인물이다. 그가 1648년 펴낸 ‘수학의 마술’(Mathematical Magick)에서 비행체와 잠수함에 이르는 선구적인 혜안을 제시하며 ‘맘즈버리의 에일머’가 하늘을 날았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처럼 오랜 역사 동안 전설처럼 전해온 과정을 살펴보면 신성한 하늘을 나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경이로운 사건이었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이와 같은 낙하산에 대하여 전설과 같은 기록이 아닌 더욱 구체적인 기록은 미술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것은 세기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1483년 스케치 수첩에 낙하산 그림과 함께 이에 대한 작가 메모가 정리되어 있다. 또한, 이보다 약간 앞선 1470년 무렵의 작가 미상의 낙하산 스케치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명확한 기록으로 정리한 ‘다빈치’의 낙하산과는 실증이라는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은 다빈치의 낙하산스케치를 바탕으로 낙하산을 제작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파우스토 베란치오’(Fausto Veranzio. 1555~1617)주교였다.
‘파우스토 베란치오’(Fausto Veranzio. 1555~1617)는 어려서부터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법학을 공부하면서 물리학과 기계 공학에 더욱 열중하였다, 그는 ‘다빈치’의 낙하산 그림을 보고 1593년 ‘비행하는 인간’(Homo Volans)으로 명명한 최초의 낙하산을 제작하였다. 이와 함께 많은 기록에서 98.6m 높이를 가진 베네치아 산마르코 종탑(St Mark's Campanile)에서 그의 나이 65세에 이와 같은 낙하산으로 직접 낙하를 시범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러나 필자의 자료에는 이러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1555년에 태어난 그는 1617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 ▲ (좌로부터) ‘맘즈버리의 에일머’(Eilmer of Malmesbury) 벽화 / 1470년 익명의 낙하산 스케치 / 레오나르도 다빈치 스케치 노트 /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러한 사실은 영국의 학자 ‘존 윌킨스’(John Wilkins. 1614~1672)가 1648년에 펴낸 ‘수학의 마술’(Mathematical Magick)에서 10세기의 ‘맘즈버리의 에일머’가 하늘을 날았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파우스토 베란치오’에 대한 내용은 언급된 내용이 없다, 상식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 위치한 산 마르코 대성당의 종탑(St Mark's Campanile)은 유럽 일원의 인파가 모여드는 곳이다, 98.6m의 경이로운 높이를 가진 종탑에서 인간이 뛰어내리는 광경은 유럽 사회의 세기의 뉴스이다, 이러한 광경을 전하는 실체의 기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짚고 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기의 천재 ‘다빈치’가 1483년 스케치 수첩에 그려 전해진 낙하산은 선구적인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엄밀하게 그 실체의 실용성은 부적합하였다.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파우스토 베란치오’가 제작하였다는 낙하산은 기록의 자료로 전해지는 내용에서 그 실체가 매우 논리적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파우스토 베란치오’(Fausto Veranzio. 1555~1617)와 비슷한 나이로 ‘파우스토 베란치오’가 낙하산을 제작하였다는 1593년 무렵 하늘에서 뛰어내린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미술가 ‘파올로 귀도띠’(Paolo Guidotti. 1559~1629)이다. ‘파올로 귀도띠’는 ‘카발리에 보르게세’(Cavalier Borghese)로도 불린 화가이며 건축가이다, ‘바오로 5세 교황’(Papa Paolo V. 1552~1621)재임 기간에 많은 건축물과 회화 작업을 남긴 그는 인간의 비행에 유난히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고래 뼈에 깃털로 만든 도구를 입고 몇 번의 실험을 거듭하였다,
이후 공개적으로 1590년 토스카나 루카(Lucca)의 종탑에서 뛰어내리다 지붕을 뚫고 방으로 떨어지면서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였다, 1700년대의 건축가이며 미술비평가인 ‘프란체스코 밀리치아’(Francesco Milizia. 1725~1798)의 저술 ‘고대와 현대의 유명 건축가의 삶’에 담긴 기록에서‘파올로 귀도띠’에 대하여 기록된 내용을 보면 그는 작품을 위하여 밤에 묘지에 가서 직접 시신을 조사한 일화를 담고 있다,
이처럼 오랜 역사의 바람으로 전해온 인간 비행과 낙하의 이야기는 역사의 변천을 따라 오스만 제국 이야기로 이어진다, 오스만 제국의 작가 ‘에울리야 첼레비’(Evliya Çelebi. 1611~1682)는 오늘날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 40여 동안 아시아에서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여행하며 많은 전쟁에 종군하였던 그는 이와 같은 견문을 담은 ‘여행의 책’(Seyahatname)을 저술하여 사후 1834년 출판되었다, 책에 쓰인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1630년 무렵 오스만 제국의 17대 술탄 무라드 4세(Murad IV. 1612~1640)의 통치시대에 ‘하제르펜 아흐멧 첼레비’(Hezarfen Ahmet Celebi. 1609~1640)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양 날개가 달린 도구를 착용하고 높은 곳에서 새처럼 날아 앉는 재주를 보여 그 소문이 자자하였다,
1632년 제국의 축일을 맞아 ‘무라드 4세’ 국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세워진 갈라타 타워(Galata Tower)를 날아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나톨리아 해안의 우스크다르(Üsküdar)언덕에 착륙하였다. 이에 술탄은 금화를 포상하였지만 ‘이 사람은 무서운 인물이다.’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를 지키는 것은 좋지 않다.’며 알제리로 추방하였다, 이후 그는 술탄과 같은 해에 죽었다는 기록이다. 이와 같은 작가 ‘에울리야 첼레비’의 책에 담긴 내용이 작가의 개인적 주장이 상당 부분 가미된 맥락에서 참작해야 할 내용은 많지만, 비행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여러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오랜 역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을 향하여 오르고 아득한 공중에서 내리는 비행과 낙하의 꿈은 시대와 국경이 없는 인류의 꿈이었다, 무모한 도전과 실험에 부서진 꿈이 있었는가 하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소망의 꿈을 남긴 역사도 많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려낸 비행의 꿈이 담긴 ‘공중 프로펠러’와 ‘낙하산 스케치’는 소망의 꿈을 남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그 실체는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그 연구의 업적은 ‘비행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이탈리아 브레시아 출신의 수도사로 수학자이며 비행의 선구자인 ‘프란체스코 라나 데 테르지’(Francesco Lana de Terzi, 1631~1687)이다, 그는 ‘진공비행선’(Vacuum airship)이라는 선구적인 비행체를 설계하였으며 항공과 항법 이론을 제시하여 과학적인 비행 시대를 예고하였다, 그가 제시한 ‘진공 비행선’의 설계를 보면 얇은 구리로 된 진공상태의 구체가 부착된 돛대가 있었다. 즉 공기를 제거한 진공상태의 가벼운 구체의 양력을 이용한다는 개념이었다, 이는 엄밀하게 당시의 기술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미래의 비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선구적인 발상임에는 분명하였다, 또한 이와 같은 제안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가 이어졌다,
먼저 이러한 발상의 근원이 당시 진공(Vacuum)에 대한 학자들의 연이은 연구가 바탕이었음을 헤아려 이에 대하여 살펴본다. 이탈리아 물리학자 토리첼리(Evangelista Torricelli, 1608~1647)는 대기압을 연구하면서 수은을 채운 유리관을 거꾸로 세우다가 위의 공간이 진공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이른바 '토리첼리의 진공'(Torricellian vacuum)이 탄생하였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기압계가 발명되었다, 이와 함께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폰 괴리케’(Otto von Guericke, 1602-1686)는 1654년 진공 펌프를 만들어 진공 상태의 현상과 대기압에 대해 연구하면서 진공상태의 힘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프란체스코 라나 데 테르지’(Francesco Lana de Terzi, 1631~1687)가 ‘진공 비행선’(Vacuum airship)을 제안한 이후 이러한 진공 상태의 구형에 들어갈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가스와 같은 기체가 발견되면서 비행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아일랜드의 화학자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5)은 1662년 가스의 절대 압력과 부피 간의 반비례 관계를 설명한 ‘보일의 법칙’(Boyle's law)을 정립하였다, 이어 1666년 ‘질료(재료)와 형상(모양)에 관한 기원’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정립된 물질로 기하학적이며 기계적인 성질을 가진 입자는 외적인 작용에 의하여 단독으로 움직인다는 입자 철학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로버트 보일’은 1671년 철(iron)과 산(acid)의 반응에서 생겨나는 수소기체를 발견하였다. 이러한 기체를 수소로 증명한 인물이 프랑스 출신의 영국 물리학자이며 화학자인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1731~1810)이다, 그는 1766년 수소(Hydrogen)를 발견하였다, 또한 산소 가스와 수소가스의 전기불꽃 화합으로 물이 화합물임을 규명한 그는 전류와 그 전류를 생성하는 전위차는 전류와 정비례하는 사실도 정리하는 등 셀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프랑스의 비운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 1743~1794)다, 그는 크게 1772년 발표한 연소 이론(combustion theory)과 1782년 원소표로 표기되는 ‘화학물 명명법’(Chemical nomenclature)의 제안자이다, 그는 물체가 불에 탄다는 것이 곧 산소와 결합하는 것임을 규명하여 오랜 플로지스톤 설(phlogiston )을 벗어나 근대 화학의 혁명을 이루었다. 또한. 오랫동안 지속하여온 두서없는 화학 용어를 화학물질의 성분을 바탕으로 33종의 원소를 체계적인 원소표로 정리하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옛날의 세금청부와 불법 담배 제조에 대한 혐의로 고발되어 처형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수학자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Joseph Louis Lagrange. 1736~1813) 는 그의 처형에 대하여 ‘이 사람의 머리를 베는 것은 순간이지만 이와 같은 두뇌를 만들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 속에서 ‘프란체스코 라나 데 테르지’(Francesco Lana de Terzi, 1631~1687)가 제안하였던 기록 속의 ‘진공 비행선’(Vacuum airship)과 같은 구조에 영국 물리학자이며 화학자인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1731~1810)가 규명한 수소를 채우려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프랑스 발명가 ‘쟈크 알렉산더 세자르 샤를’(Jacques Alexandre César Charles. 1746~1823)이다. 1782년 그는 대형 수소가스 풍선에 대한 설계를 마치고 ‘로베르 형제’(Robert brothers)로 부르는 공학도인 ‘안 장 로베르’(Anne-Jean Robert. 1758~1820)와 ‘니콜라스 루이스 로베르’(Nicolas-Louis Robert. 1760~1820)형제와 함께 풍선 제작에 들어갔다,
여기서 칼럼의 앞부분에서 이야기하였던 ’라이트형제’(Wright brothers)가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Montgolfier brothers)가 1782년 12월 14일 최초의 열기구를 하늘에 띄웠던 121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행 날짜를 하루 미루었던 ‘몽골피에 형제’ 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몽골피에 형제’는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쳐 열기구를 만들어 1782년 12월 14일 최초의 열기구를 하늘에 띄웠다, 이후 형제는 1783년 4월 25일 다시 이를 확인하는 실험 비행을 마친 후에 특허권을 신청하기 위하여 1783년 6월 4일 제지공장이 위치한 리용(Lyon) 남부의 앙노네(Annonay)에서 지역의 유지들과 많은 주민이 구경하는 가운데 열기구를 날려 10분 동안 2,000여 미터 높이의 하늘을 약 2km를 성공적으로 날아갔다,
이와 같은 ‘몽골피에 형제’(Montgolfier brothers)의 열기구가 하늘을 날았던 소식이 프랑스 전역에 전해지면서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루이 16세 왕’(Louis XVI of France. 1754~1793)의 부름을 받고 동생 ‘자크 에티엔 몽골피에’(Jacques-Etienne Montgolfier, 1745~1799) 혼자서 파리를 다녀간 내용이 확인된다. 이후 1783년 9월 19일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국왕과 왕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 비행 행사가 있게 된다는 뉴스가 퍼지면서 파리가 온통 술렁거렸다,
이때 이러한 소식을 들은 수소 열기구를 제작하던 프랑스 발명가 ‘쟈크 알렉산더 세자르 샤를’(Jacques Alexandre César Charles. 1746~1823)과 ‘로베르 형제’(Robert brothers)는 열기구를 완성하고 비행 날짜를 서둘렀다, 1783년 8월 27일로 비행 날짜가 정해졌다, 당시 프랑스 ‘국립 자연사 박물관’(Muséum national d' histoire naturelle)부관장을 맡고 있던 지질학자 ‘바세레미 포저 드 생퐁’(Bathelemy Faujas de Saint-Fond. 1741~1819)이 행사 후원을 맡아 모금을 독려하였다. 당시 너무나 큰 호응에 예정되어 있던 ‘빅뜨와르 광장’(Place des Victoires)에서 거대한 ‘샹 드 마르스 광장’(Champ de Mars)으로 장소를 변경하였다. (이후 1889년 이곳에 에펠탑이 세워졌다)
1783년 8월 27일 ‘샹 드 마르스 광장’에는 400,000명이 군중이 몰려들었다, 당시 미국 대사로 있었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 을 비롯한 수많은 유명인사들도 열기구가 하늘로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열기구는 ‘몽골피에 형제’가 띄웠던 열기구에 비하여 그 크기는 작았지만, 수소로 채워진 열기구의 비행은 구경꾼들에게 또 다른 움직임의 신비감을 느끼게 하였다, 인류 최초의 수소 열기구의 비행은 성공이었다. 특히 오래도록 날아가는 열기구의 비행은 구경꾼들의 다양한 상상에서 쏟아지는 입담이 끝이 없었으며 거리마다 모든 시선이 하늘에 있었다. 열기구는 40분을 넘게 비행하며 파리 북동쪽 ‘콩네스’(Gonesse) 마을에서 21km 떨어진 곳에 하강하였다, 당시 뉴스와 기록에 의하면 열기구가 착륙한 시골 마을 주민들은 생전에 처음 보는 괴물에 놀라 교회로 피신하여 세상의 종말까지 거론하며 대책회의를 가졌다, 마침내 마을 주민들은 돌과 갈퀴로 풍선을 공격하여 만신창이로 누워버린 풍선을 치웠다,
![]() ▲ 1632년 ‘하제르펜 아흐멧 첼레비’ 상상도/ 1783년 ‘로베르 형제’(Robert brothers) 삽화/ 1783년 ‘몽골피에 형제’(Montgolfier brothers)삽화 /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
이와 같은 ‘로베르 형제’의 수소 열기구 비행에 이어 3주 후에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 비행 행사가 열리며 국왕과 왕비가 직접 관람한다는 뉴스와 소문이 퍼지면서 파리는 온통 축제처럼 들떠 있었다,
이후 1783년 9월 19일 베르사유 궁전 광장에는 ‘레보용 비행선’(Aérostat Réveillon)이라는 이름을 가진 화려한 디자인의 열기구가 하늘로 비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열기구에는 오리와 닭 그리고 양이 차례로 태워지고 ‘루이 16세 왕’(Louis XVI of France. 1754~1793)과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주요 귀족과 관리들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열기구는 하늘로 오르고 모든 관람객은 손뼉을 치며 환호하였다. 열기구는 460m까지 오르면서 약 8분간 8km를 비행하였다, 기구는 열이 서서히 식으며 천천히 착륙했고 동물들은 어떠한 문제도 없이 무사히 돌아왔다. 광장은 다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대성공이었다.
당시 열기구의 비행에서 안전성이 완벽하게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체를 태우는 극적인 기획을 준비하면서 죄수 두 명을 태우는 문제가 제안되었으나 오리와 닭 그리고 양을 태웠다. 이후 두 달 후인 11월 21일 인류 최초의 사람을 태운 열기구의 비행을 예고하면서 파리는 이의 성공과 실패를 점치는 도박사들이 대흥행을 이루는 등 하늘을 날아가는 열기구의 뜨거운 열풍이 파리를 덮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에 담긴 시대의 감성과 변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 갈럼은 (209) 하늘을 정복한 역사이야기(下)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