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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 (215) 추락한 역사의 눈물(上)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9/23 [16:28]

프랑스 루이 15세 왕(Louis XV, 1710~1774)의 아들 루이 도팽(Louis, Dauphin. 1729~1765)은 에스파냐(스페인)의 펠리페 5세 왕(Philip V of Spain. 1683~1746)의‘딸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공주’(Maria Teresa Rafaela of Spain. 1726~1746)와 1745년 결혼하였다. 결혼 1년 후 1746년 7월 친정아버지인 에스파냐(스페인) 펠리페 5세 왕이 세상을 떠났다. 10일 후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도 7월 19일 딸을 사산하고 나서 3일 후인 7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첫 부인을 잃은 루이 도팽(Louis, Dauphin. 1729~1765)은 1747년 1월 폴란드의 아우구스트 3세 왕(Augustus III of Poland. 1696~1763)과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왕비(Maria Josepha of Austria. 1699~1757)의 딸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 of Saxony. 1731~1767)와 재혼하였다, 여기서 낳은 아들이 프랑스 ‘루이 16세 왕’(Louis XVI of France. 1754~1793)이다.

 

‘루이 15세 왕’(Louis XV, 1710~1774)의 손자인 ‘루이 16세’는 아버지 ‘루이 도팽’(Louis, Dauphin. 1729~1765)이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1765년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후 1770년 5월 ‘프란츠 1세 신성로마 황제’(Francis I, Holy Roman Emperor. 1708~1765)와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리지아’(Maria Theresa. 1717~1780)막내 딸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Marie Antoinette. 1755~1793)와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파리 서쪽의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에 있는 ‘뮈에트 성’(Château de la Muette)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1774년 ‘루이 15세 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5월 10일 프랑스 왕이 되어 다음 해 1775년 6월 11일 랭스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루이 16세 왕 부부는 ‘뮈에트 성’에서 베르사유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루이 16세 왕은 루이 15세 왕이 애인이었던 ‘퐁파두르 부인’(Madame de Pompadour. 1721~1764)을 위하여 1768년 건축을 완성한 베르사유 궁전의 북서쪽에 떨어져 있는 작은 성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선물하였다. 이에 새롭게 거처를 옮긴 궁전 인테리어를 지휘하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튈르리 궁전(Tuileries Palace)이 있는 센강 오른편 길에 고급 벽지 가게를 운영하던 ‘장 밥티스트 레베용’(Jean-Baptiste Reveillon. 1725~1811)의 상점을 둘러보고 인테리어를 의뢰하였다.

 

▲ (좌로부터) ‘루이 15세 왕’/ ‘퐁파두르 부인’/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당시 ‘레베용’은 1759년 파리의 ‘포부르 생 앙투안’(Faubourg Saint-Antoine)에서 벽지 가게를 시작하여 탄탄하게 기반을 잡은 후 1775년부터 벽지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후 1776년 센강 길에 고급 벽지 가게를 하나 더 오픈하였다. 이는 1763년경 영국에서 특허를 얻어 개발하였던 후로킹(flocking) 기법의 벽지가 유럽에서 크게 인기를 얻은 이후 ‘레베용’은 이를 더욱 정교하게 고급화시킨 새로운 후로킹 벽지를 개발하였기 때문이었다. 후로킹이란 당시 귀족사회의 상징이었던 고급직물 ‘벨벳’(VELVET)과 같은 효과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당시로는 첨단 기법이었다. 특수한 접착제로 고급 직물 벨벳과 같은 인공섬유를 접착한 벽지에 실크스크린 인쇄로 자카드 자수와 같은 제한된 무늬가 아닌 풍부한 색상과 무늬를 넣은 입체감이 돋보이는 벽지였다.

 

‘레베용’은 이러한 후로킹 벽지에 프랑스 조각가이며 화가이었던 ‘장 밥티스 필르망’(Jean-Baptiste Pillement. 1728~1808)의 선구적인 실크스크린 기법의 화려한 색상의 그림과 문양을 도입하여 후로킹 벽지와 벨벳 벽지를 생산하면서 프랑스 귀족사회에 가장 인기가 있는 벽지 가게로 알려졌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1756년부터 1763년까지 벌어진 7년 전쟁(Seven Years' War)의 와중에서 오랜 적대관계에 있었던 프랑스와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게 되면서 그 실체를 더욱 돈독하게 하려는 정략결혼으로 15살 나이에 프랑스 루이 16세 왕과 결혼하였다. 아버지 ‘프란츠 1세 신성로마 황제’(Francis I, Holy Roman Emperor. 1708~1765)가 1765년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 ‘마리아 테리지아’(Maria Theresa. 1717~1780)의 통치체제에서 프로이센과의 치열한 전쟁 중에 프랑스로 건너와 남편 루이 16세 왕이 1774년 왕에 오른 시기에는 지난 루이 14세 왕과 루이 15세 왕의 연속된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프랑스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당시 일반 국민들은 오랜 적대국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았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루이 16세 왕은 역대 선왕과 달리 왕비 이외에 다른 여자와의 관계도 없었으며 왕비 또한 선대의 왕비와 비교하여 엄청난 사치를 하였거나 크게 지탄받아야 할 내용도 없었다. 문제는 왕비가 외국 출신으로 먼 이국 생활에서 오는 외로움을 주변의 몇 안 되는 긴밀한 친구와 함께 은둔형으로 보냈던 생활에서 오는 여론이 부풀려져 훗날 고난의 삶을 맞게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삶에서는 매우 친밀한 여인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사부아 공작 랑발 부인’(Savoy, Princesse de Lamballe. 1749~1792)으로 불리는 마리 테레즈 루이즈(Marie Thérèse Louise)가 있다, 그는 프랑스 남동부의 사부아 가문(Savoy)의 딸로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Torino)에서 태어나 루이 14세 왕의 증손자인 랑발 왕자(Louis Alexandre, Prince of Lamballe. 1747~1768)와 1766년 결혼하였다. 그러나 2년 후 1768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재산을 상속받아 파리에 거주하면서 루이 15세 왕이 가장 총애하였던 시집가지 않은 딸 ‘아델라이드 공주’(Adélaïde of France. 1732~1800)와 궁전에서 함께 지냈다. 

 

이후 ‘아델라이드 공주’ 조카인 루이 16세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결혼하면서 ‘아델라이드 공주’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프랑스 왕실의 안내자로 ‘랑발 부인’을 지정하였다. 이때부터 ‘랑발 부인’과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자매와 같은 긴밀한 친교가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인이 바로 ‘폴리냑 공작부인’으로 알려진 ‘욜랑드 마르틴 가브리엘’(Yolande Martine Gabrielle. 1749~1793)이다. ‘폴리냑 공작부인’은 프랑스 귀족 백작의 딸로 1767년 폴리냑의 쥘 공작(Jules, 1st Duke of Polignac. 1746~1817)과 결혼하였다. 쥘 공작의 여동생 폴리냑의 다이애나(Diane de Polignac. 1746~1818)는 루이 16세 왕의 여동생 프랑스의 엘리자베스 공주(Élisabeth of France. 1764~1794)의 심복이었다. 이러한 시누이 ‘다이애나’의 초청으로 1775년 베르사유 궁전 공식 만찬에 참석한 ‘폴리냑 공작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만났다.

 

이와 같은 만남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폴리냑 공작부인’의 너무나 상냥한 자세와 재치가 있는 화술은 물론 격조를 갖춘 태도에 반하였다. 또한 ‘폴리냑 공작부인’이 3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수녀원에 위탁되어 자라면서 교육을 받았을 때 익혔던 독일어가 왕비와의 친숙한 소통에 크게 작용하였다. 이에 왕비는 ‘폴리냑 공작 부부’에게 베르사유궁으로 이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많은 빚이 있었던 부부는 작은 연금으로 생활하던 처지라 이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다음 만찬에 초대되어 베르사유궁에 갔을 때 이러한 사실을 왕비에게 털어놓았다, 이에 왕비는 루이 16세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왕은 왕비가 원하는 친구 부부의 부채를 청산해주면서 베르사유궁에서의 생활을 허락하였다.

 

만찬장에서 공개적으로 알려진 이와 같은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 대한 곱지 않은 여론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의 무려 13개의 방을 사용하였던 ‘폴리냑 공작부인’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이러한 혜성과 같은 새로운 실세가 등장하여 왕비의 권유로 ‘장 밥티스트 레베용’에게 인테리어를 의뢰하게 되면서 ‘레베용’은 날개를 하나 더 달고 날아가는 듯한 행운이 찾아왔다, 이에 타고난 장사꾼이었던 ‘레베용’은 ‘폴리냑 공작부인’에게 최선을 다하여 돈독한 신임을 얻었다. 이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왕비와 달리 언제든 만날 수 있는 ‘폴리냑 공작부인’과의 소통은 그 자체가 바로 권력과 같았기 때문이다.     

 

▲ (좌로부터) ‘사부아 공작 랑발 부인’(Savoy, Princesse de Lamballe)/ ‘마담 구메네’(Madame de Guéméné)/ ‘폴리냑 공작부인’/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여기서 잠시 살펴 가야 하는 인물이 있다. 그는 프랑스 귀족 로한(Rohan)가문의 딸로 ‘마담 구메네’(Madame de Guéméné)로 알려진 ‘빅투아르 드 로한’(Victoire de Rohan. 1743~1807)부인이다. ‘마담 구메네’는 1774년 루이 15세 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1775년 왕실 자녀의 교육을 전담하는 부서의 가장 높은 지위인 왕실 교사(Royal Governess)가 되었다. 루이 15세 왕 시대에 왕실 교사는 ‘마담 구메네’의 고모인 로한가의 마리 루이스(Marie Louise de Rohan. 1720~1803)였다. 그는 루이 16세 왕이 어려서부터 교육을 전담하였다.   

 

이후 1770년 루이 16세 왕이 결혼하여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궁전에 왔을 때 궁전 예절교육을 가르쳤다. 당시 매우 엄격하였던 마리 루이스 부인에게 프랑스 궁전 예절을 깔보는 듯한 태도를 자주 내비친 왕비와 루이스 부인은 서로 좋은 감정을 갖지 못하였다. 루이 15세 왕이 세상을 떠나자 루이스 부인 스스로 떠나야 할 시기임을 알고 후임에 조카인 ‘마담 구메네’를 선정하고 물러난 것이다. 이러한 고모에서 조카로 이어진 로한 가의 왕실 교사에 대한 역사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 부분은 반드시 짚고 가야 한다.

 

루이 14세 왕(Louis X. 1638~1715) 시대였다. 1704년 왕실의 가정부가 되었던 마담 방타두르(Madame de Ventadour)로 부르는 ‘살롯 드 라 모트 우당쿠루’(Charlotte de La Mothe-Houdancourt. 1654~1744)는 1710년 루이 14세 왕의 아들 ‘루이 그랑 도팽’(Louis, Grand Dauphin. 1661~1711)의 아들 부르고뉴 공작 루이(Louis, Duke of Burgundy. 1682~1712)와 사부아의 마리 아델라이드(Marie Adélaïde of Savoy. 1685~1712)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의 양육을 맡고 있었다.

 

1년 후 1711년 ‘루이 그랑 도팽’이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면서 1712년 그의 아들 부르고뉴 공작 루이와 사부아의 마리 아델라이드 부부가 홍역으로 30살과 2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함께 죽어가는 2살 나이의 어린 왕자가 있었다, 마담 방타두르가 그 곁을 지켜 살려낸 아이가 바로 훗날 루이 15세 왕(Louis XV. 1710~1774)이다. 그 후 3년 뒤에 루이 14세 왕(Louis X. 1638~1715)이 세상을 떠나면서 죽음의 곁에서 돌아온 손자 루이 15세가 다섯 살 나이에 왕에 올랐다. 이후 1727년 루이 15세 왕의 아이가 태어나면서 왕실 교사(Royal Governess)가 되어 1735년까지 근무하였다.

 

마담 방타두르(Madame de Ventadour. 1654~1744)는 자리를 물러나면서 외손녀인 로한 가문의 마리 이사벨(Marie Isabelle de Rohan, 1699~1754)에게 후계를 물려주었다, 마리 이사벨은 외할머니의 뒤를 이어 루이 15세 왕의 아들과 손자들의 교육을 맡았다. 마리 이사벨은 1754년 삶을 마칠 때까지 왕실 자손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후계를 남동생의 딸이었던 조카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천연두로 인하여 27살과 26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남동생 수비즈의 쥘(Jules, Prince of Soubise. 1697~1724)과 그의 부인 믈룅의 안느 줄리(Anne Julie de Melun. 1698~1724)가 낳은 로한 가의 마리 루이스(Marie Louise de Rohan. 1720~1803)였다.

 

바로 이러한 로한 가의 마리 루이스가 루이 16세 왕의 교육을 맡았으며 마리 앙투안느 왕비가 프랑스 궁전에 왔을 때 궁전 예절 교육을 가르치다가 루이 15세 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오빠의 딸 ‘마담 구메네’(Madame de Guéméné)로 알려진 ‘빅투아르 드 로한’(Victoire de Rohan. 1743~1807)에게 후계를 물려주었다.

 

이러한 ‘마담 구메네’는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심경을 잘 헤아린 인물이었다. 세상이 바뀌어 지난 루이 15세 시대에 루이 15세의 가장 측근에 있었던 여인 ‘바리 부인’(Madame du Barry. 1743~1793)에게 받았던 억압의 그늘을 대신 콕콕 찌르는가 하면 자신의 세상이 열린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권세를 실감케 하는 일들을 앞장서서 해결하였다. 또한, 경마장과 도박 살롱의 출입을 안내하면서 왕실의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는 흥미를 충족시켜 주며 왕비와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이러한 ‘마담 구메네’가 1782년 남편의 과도한 부채로 파산하면서 왕실 교사(Royal Governess)에서 물러나면서 ‘폴리냑 공작부인’이 왕실 교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마담 방타두르(Madame de Ventadour. 1654~1744)가 1704년 왕실 가정부로 들어와 4대로 이어진 로한 가문의 왕실 가정부와 왕실 교사의 역사가 막을 내린 것이다. 당시 프랑스 일반 여론은 이러한 사실마저 외국 출신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독선적인 권력이라며 비판하였다.     
 
‘폴리냑 공작부인’이 100여 명의 하인을 거느리는 왕실 교사에 오르면서 그의 지위는 하늘로 치솟았다, 이와 같은 1982년 한 해가 저물어 가던 어느 날 ‘폴리냑 공작부인’을 급하게 찾아온 인물이 있었다. 고급 벽지 가게와 공장을 운영하던 ‘장 밥티스트 레베용’(Jean-Baptiste Reveillon. 1725~1811)이었다. ‘몽골피에 형제’(Montgolfier brothers)가 1782년 12월 14일 최초로 하늘에 열기구를 띄운 직후였다. ‘레베용’의 계획을 들은 ‘폴리냑 공작부인’은 무료한 왕실에 큰 흥미를 가져다줄 기대감에 즉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이 사실을 알려 마침내 루이 16세 왕의 허가를 받았다.

 

1783년 9월 19일 베르사유 궁전 광장에서 국왕과 왕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오리와 닭과 양을 태운 열기구 ‘레보용 비행선’(Aérostat Réveillon)이 성공적으로 하늘을 날았다. 이후 11월 21일 파리 서쪽의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에 있는 ‘뮈에트 성’(Château de la Muette)에서 왕과 왕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인류 최초의 사람이 비행하는 열기구가 하늘로 떠올랐다. 이러한 공로로 ‘레보용’의 벽지공장은 왕실 벽지제조의 인가를 받은 ‘왕립제조소’(Manufacture Royale)로 선정되었다. 이후 ‘레보용’의 사업은 크게 번성하여 당시 벽지공장이 있었던 파리의 ‘포부르 생 앙투안’(Faubourg Saint-Antoine)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포부르 생 앙투안 가는 당시 파리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놓은 지역으로 각 분야의 장인 자격(mastership)을 소지한 공장과 상점들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1785년 세기의 사건이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이 일어났다. 이는 많은 문학작품과 연극,영화에서 다루었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괴테와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의 근원으로 해석하였던 세기의 사기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목걸이 사건에 대하여 살펴보면 1772년 루이 15세 왕이 연인이었던 바리 부인(Madame du Barry. 1743~1793)에게 선물하려던 엄청난 가격의 목걸이였다. 당시 파리 최대의 보석상 보에메르와 바상쥬(Boehmer et Bassenge)가 연합하여 만든 목걸이로 제작 도중 구매자인 루이 15세 왕(Louis XV, 1710~1774)이 1774년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이에 파산 위기에 몰린 보석상이 1778년 루이 16세 왕에게 접근하여 이와 같은 세기의 보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왕비뿐이라며 구매를 현혹하였으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이를 거부하였다.

 

1781년 10월 루이 16세 왕의 두 번째 자녀이자 첫아들인 ‘루이 조제프 도팽’(Louis Joseph, Dauphin of France, 1781~1789)이 태어나자 그해 말 보석상은 다시 루이 16세 왕에게 접근하여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선물로 구매를 건의하였으나 왕비는 역시 이를 거절하였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스트라스부르 주교인 추기경 드 로한(Cardinal de Rohan. 1734~1803)이다. 그는 왕실 교사로 근무 중 폴리냑 부인에게 자리를 물려준 ‘마담 구메네’(Madame de Guéméné)로 알려진 ‘빅투아르 드 로한’(Victoire de Rohan. 1743~1807)의 삼촌이다. 추기경은 1772년 빈에 프랑스 대사로 재임 중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리지아’에게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음해성 정보를 자꾸 전달하였던 사실을 ‘마리 앙투아네트’가 알고 있었다.

 

이후 1774년 왕비에 오르게 되면서 추기경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왕실 교사로 있었던 조카 ‘마담 구메네’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에 왕비와의 화해를 모색하던 중 조카 ‘마담 구메네’마저 1782년 왕실 교사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만나게 된 인물이 계획적으로 추기경에게 접근한 정부 발루이가의 드 라 모트 부인(Comtesse de La Motte. 1756~1791)이었다. 궁전의 소식통이었던 조카 ‘마담 구메네’의 정보통이 없어진 추기경은 왕비와 가장 친밀한 사이라는 ‘라 모트 부인’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거액의 목걸이를 왕비가 구매하려 하지만 왕실 재정과 세간의 이목으로 직접 사들일 수 없는 이유로 추기경이 이를 구매하면 나누어 갚겠다는 정교하게 위조된 왕비의 편지를 받아 들고 1885년 목걸이를 사서 ‘라 모트 부인’에게 건넨 것이다.

 

그러나 의당 왕비의 감사 표시가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전갈이 없는 가운데 엄청난 목걸이 대금의 독촉이 심해지면서 화가 난 추기경은 보석상에게 왕비가 전한 위조된 편지를 공개하고 말았다, 이에 보석상은 세간에 쏟아지는 왕비의 여론을 상기하며 몹시 나쁜 왕비라는 생각으로 국왕에게 편지의 사본과 함께 목걸이 대금을 청구하면서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추기경은 즉시 투옥되었고 발루이가의 라 모트 부부와 연관된 사기범 일당이 모두 체포되었다. 문제는 재판 과정이었다. 추기경은 사기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또한 ‘라 모트 부부’를 포함한 사기범 일당들은 죄를 조금이라도 면해 보려고 왕비에 대해 음해성 소문들을 부풀려 쏟아내면서 세간의 여론은 마치 사치에 놀아난 왕비와 존엄한 추기경의 대결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외국인 왕비에 대한 비난과 질타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 (좌로부터)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 추기경 드 로한(Cardinal de Rohan)/ 드 라 모트 부인(Comtesse de La Motte)/ 라모트의 비망록 여왕 폐하(Mémoires Justificatifs)/ 목걸이사건 신문기사/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1786년 5월 31일 추기경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라모트 부인은 태형과 함께 이마에 도둑이라는 낙인을 새기는 벌을 받고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탈옥하여 영국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영국에서 1788년 라모트의 비망록 여왕 폐하(Mémoires Justificatifs)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출판하여 프랑스 국민들에게 비망록이 소개되면서 허구의 내용이 마치 사실인 듯 세간의 여론을 증폭시켰다, 여기서 살피게 되는 사실이 영국과 프랑스의 적대적인 관계가 크게 한몫을 거든 사실이다.

 

필자는 역사라는 관점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오랫동안 헤아려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존재하는 인물과 그가 남긴 회고록을 소개한다. ‘앙리에트 캉팡’(Henriette Campan. 1752~1822)이라는 프랑스 왕실 궁전에 일급 시녀(Première femme de Chambre)가 있었다, 그는 루이 15세 왕의 궁전에서 루이 15세 왕 딸들의 교육을 맡았다. 이후 루이 15세 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일급 시녀(Première femme de Chambre)가 되었다. 여기서 일급 시녀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침상에서 일어나고 잠자리에 들 때 옷을 입히고 벗기는 왕비의 침전에 유일하게 출입이 가능한 가장 주요한 직책이다. 그는 왕비의 가장 진솔한 모습을 늘상 대하게 되는 그 누구보다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모든 것을 가장 소상하게 알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앙리에트 캉팡’이 역사에 남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 대한 기록은 프랑스 혁명으로 타오른 분노한 군중심리와는 전혀 달랐다.  

 

이어서 이와 같은 내용과 함께 프랑스 혁명으로 타오른 민심의 실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 칼럼은  (216) 추락한 역사의 눈물(下)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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