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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227) 반가사유상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구한 일본의 비밀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12/07 [20:19]

필자는 민간경제 연구소에서 증권 분석 일을 하다가 미술 분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후 우리나라 전통 공예 중에서 세계에서 유일한 기법으로 제작된 합죽선 부채에 깊은 관심을 가져오면서 어느 일본인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매만졌다. 그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선의 문화와 예술에 깊은 애정과 연구의 삶을 살았던 일본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이다. 보편적으로 그에 대하여 우리의 공예와 예술을 연구한 학자이며 우리의 미(美)를 ‘비애의 예술’로 평가한 민예연구가 정도로 알고 있다.
 

▲ 일본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와 그의 저서/ 1910년 로댕 특집 ‘시라카바파’(白樺)/ 출처: https://ja.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비애의 예술’로 헤아린 그의 평가는 우리나라 미술사학자의 많은 비판을 거쳐 그의 개인적인 감성에서 발아된 단편적인 견해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예술에 대한 폄하와 훼손의 뜻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표현한 슬픔을 품은 ‘애상미’(哀傷美) 이거나 한(恨)의 정서와 같은 표현은 그의 연구와 삶에 대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면 바로 그의 개인적인 감성에서 살펴진 여러 요인이 헤아려진다.

 

또한, 이와 같은 일본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는 그와 연관된 아직 공개되지 않은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인도주의와 개인주의를 지향한 문인과 화가의 동인 그룹 ‘시라카바파’(白樺派) 의 일원이었다. 당시 ‘시라카바파’ 동인들은 신문물의 가장 상징적 실체인 서양미술관 건립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서양미술 작품 수집을 추진하였으나 재정난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당시 ‘시라카바파’ 일원이었던 일본의 소설가 ‘시가 나오야’(志賀 直哉. 1883~1971)는 1905년 서양 미술잡지에서 처음으로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을 접하였다. 이후 1910년 로댕의 70주년 생일을 맞는 해에 동인지 ‘시라카바’(白樺) 는 로댕의 특집을 기획하였다.

 

당시 8월 무렵 ‘시가 나오야’와 ‘야나기 무네요시’는 로댕에게 특집을 기획하는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어 이들은 당시 유럽에 인기가 있었던 일본의 전통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絵) 20점을 구매하여 자신들이 애장하였던 10점과 함께 30점의 ‘우키요에’를 로댕에게 보냈다. 이어 로댕에게 세계미술관 건립을 준비 중인 자신들의 뜻을 전달하며 작은 작품을 기증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훗날 이들이 회고한 내용에 의하면 세계적인 작가 ‘로댕’이 이러한 정성을 인식하여 단 한 점의 드로잉 작품이라도 보내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전한 편지였음을 밝혔다. 이후 11월 14일 동인지가 출판되었으나 아무런 답신이 없었던 로댕에게 특집 동인지를 다시 우송하였다. 그렇게 해가 지나고 다음 해 1911년 가을까지 아무런 답신이 오지 않아 이들은 어떤 기대마저 하지 않았다. 그런데 11월 로댕의 친필서신이 도착한 것이었다. 편지에는 로댕의 조각 작품 3점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1911년 12월 22일 도착한 로댕의 조각 작품은 ‘로댕 부인’(25.3cm)과 ‘무뢰한의 목’(8.8cm) 그리고 ‘어떤 작은 그림자’(31.5cm)의 소품 3점이었다. 일본에 최초로 로댕의 작품이 소장된 이야기이다. 현재 이 작품들은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岡山県 倉敷市)에 소재한 일본 최초의 사설미술관인 ‘오하라미술관’(大原美術館)에 소장되어있다. 여러 기록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에 대하여 일본의 전통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絵)와 로댕의 조각 작품이 교환된 것으로 정리되는 내용은 엄밀하게 그 정신과 내용의 실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와 같은 로댕의 조각 작품을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의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로댕의 작품을 보러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일본의 조각가로 조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 1884~1964)이다. 바로 우리나라 도자기 연구의 신으로 평가받은 인물이다. 그는 1913년 한국으로 건너와 남대문 초등학교(南大門 公立 小學校)교사로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도자기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그가 한국에 왔던 1913년 당시 경복궁 근정전과 현재 광화문 사이에 조선총독부 건물공사와 함께 다양한 공사들이 한창이었다. 그는 우연히 공사 현장에 갔다가 사방에 너부러진 도자기 파편을 모았다. 이후 각 궁전의 사료들을 모아 현장을 답사하면서 사방에 아무렇게나 산재한 다양한 도편들을 모아 도자기 연구에 입문하였다.  

 

이와 함께 살펴지는 인물이 그의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1891~1931)이다. 그는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조선으로 건너온 다음 해인 1914년 조선 총독부 산림과 직원으로 조선에 와서 임업 시험장에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의 수목과 임업에 대한 연구가 업무이었던 관계로 전국의 산야를 다니면서 산재한 옛 도자기 가마터의 자료와 다양한 파편들을 수집하여 형의 연구를 도왔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집에 보관하고 있던 로댕의 조각 작품을 구경하러 가면서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조선의 백자 한 점을 선물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백자의 미에 심취한 ‘야나기 무네요시’가 1916년 북경으로 가는 길에 처음 조선을 찾게 된다. 그는 당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에서부터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문화유적을 두루 살펴보았다. 바로 이때 그가 묵었던 집이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동생 산림과 직원 ‘아사카와 다쿠미’의 집이었다. 이후 그는 조선을 오가며 조선의 공예품 수집과 함께 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 조선의 독립을 외친 대한독립 만세 사건이 일어나면서 당시 일본이 자행한 무자비한 총칼의 탄압에 대하여 특히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 교회에 주민을 가두고 학살한 만행에 대하여 이를 통렬하게 질타하는 지성의 양심을 가진 학자였다. 아울러 그는 일제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철거하려 할 때 일본이 조선의 예술을 파괴한 많은 사례를 들어 이를 반대하여 광화문을 지켜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당시 일본의 신문과 우리의 민족지 동아일보에 그가 게재한 수많은 기록과 함께 존재한다.  

 

▲ 좌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 우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형제 사진/ 망우리의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묘/ 출처: https://ja.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후 그는 조선 도자기연구가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수집한 도자기와 노리타카의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가 수집한 조선의 소반과 목 공예품, 그리고 ‘야나기 무네요시’ 자신이 수집한 많은 공예품을 모아 1924년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을 설립하였다. 당시 성악가인 그의 부인 ‘야나기 가네코’(柳 兼子. 1892~1984)는 일본과 조선을 순회하며 음악회를 열어 미술관 건립자금을 모았으며 민족지사 백남훈, 김준연, 백관수, 장덕수, 조만식 등이 이를 후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와 함께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와 같은 우리 도자예술의 소중한 연구서를 남긴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 1884~1964)와 그의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1891~1931)형제에 이르는 우리의 것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역사를 기억하여야 한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의 임업 시험장에서 근무하며 조선의 수목(樹木)연구와 함께 우리의 목공예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많은 공예품을 수집하였다.

 

그는 이러한 바탕에서 1929년 ‘조선의 소반’을 펴냈으며 1931년 4월 급성폐렴으로 40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 당시 서울 교외이었던 청량리에 묻혔다가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지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는 묘비가 서 있다.

 

이들은 일본인이었지만 일본이 강점한 조선의 오랜 역사가 품은 예술을 아끼고 사랑한 문화인이었다. 이들의 열정으로 세운 조선민족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의 소장품은 훗날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 민속 박물관에 계승되었다. 우리 정부는 이와 같은 일본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의 삶에서 품은 우리의 문화와 예술에 담긴 사랑과 연구의 공적을 인정하여 1984년 9월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필자는 조각가 출신의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 1884~1964)가 조선에서 근무 중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의 집에 로댕의 작품을 찾아갔었던 이후에 우리나라의 소중한 유산 ‘반가사유상’과 인도의 불상 그리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일련의 비밀스러운 연구가 있었음을 필자의 부친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는 필자가 121번째 칼럼으로 쓴 ‘산스크리트어로 써 내려간 기억’에서 언급한 부친의 절친한 친구였던 산스크리트어의 대가 박건배(朴建培) 박사가 부친에게 전해준 이야기로 필자가 훗날 이의 소중함을 일깨웠을 때는 세상에 그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요약하면 필자의 부친과 박건배(朴建培) 박사는 동향의 절친한 친구로 일본에 유학하였다.

 

산스크리트어와 다양한 어학에 뛰어났던 박건배(朴建培) 박사는 주일 영국대사관 무관이 영국으로 데려가 공부한 이후 한국에 돌아왔다. 이때 전남 목포에서 필자의 부친과 합류한 박건배 박사는 일본 학자그룹이 연구한 반가사유상과 인도의 불상 그리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으로 연계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도의 불상에 대한 기록을 검토해 달라는 요청으로 영국의 저명한 산스크리트어 학자에게 전달한 자료였다. 스승이었던 영국의 학자가 한국인 제자인 박건배 박사에게 건넨 것이다.

 

이후 박건배 박사는 1956년 11월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세계 불교대회에 참석한 스님 대표들의 통역으로 참가하여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주저앉았다. 이후 박건배 박사의 행적은 1964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26차 국제 동양 학자회의에서였다. 당시 한국대표단’이었던 역사학자 유홍열 박사, 서울대 언어학 이숭녕 박사, 고병익 박사, 그리고 고고학의 김정학 고대 박물관장은 인도 대표로 참석한 한국인 박건배 박사의 등장에 놀라고 말았다. 당시 국제 동양학자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학자의 인터뷰기록에 의하면 박건배 박사는 당시 인도 포나 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종합하여보면 우리의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1912년 일제 강점기 당시 이왕가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에게 사들인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유물 입수기록에 기재되어 있다. 또한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본인 골동품상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초대 조선 총독에게 선물한 것으로 1915년 12월 경복궁 2층에 개설한 조선총독부박물관에 기증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것이다.

 

우리의 예술 중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가장 승화된 예술로 평가받는 ‘반가사유상’에 대한 이야기는 유물의 출토지에 대한 명확한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많은 연구 과제를 남겨놓고 있다. 이는 일본의 국보 1호인 일본 교토에 소재한 ‘고류지’(廣隆寺) 에 보존된 목조불상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과 얽힌 문제로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반가사유상과 인도의 고대 불상 그리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의 연구가 극비리에 이루어진 사실은 그것이 학술적인 내용이든 어떠한 목적이든 간에 많은 연구과제가 있는 점은 사실이다
 

▲ (좌로부터)대한민국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대한민국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일본 국보 1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     © 브레이크뉴스


 
필자는 본 칼럼을 써가면서 오늘날 일본이 벌이고 있는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역사적 진실의 은폐와 독도의 자국 영토 주장과 같은 그릇된 역사 인식의 망언에 대하여 우리가 대처해야 하는 점에 대하여 잠시 덧붙이고 싶다.

 

역사는 진실이다. 인류사에서 역사를 부정한 민족과 세력은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을 자초하였다. 이에 오늘날 일본이 역사를 호도하는 행동과 특히 그릇된 교육은 훗날 이와 같은 교육을 받은 후손이 갈 길은 역사의 교훈으로 보면 두 갈래다, 하나는 선조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한 역사의 왜곡을 지속하여 언제인가 후손들이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스스로 파멸하는 길이다.

 

또 하나는 그릇된 조상의 역사 왜곡에 대하여 더욱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역사의 진실을 맞게 될 것이다. 이에 우리는 백년대계의 자세로 시대 상황에서 빚어진 그들의 그릇된 역사 인식의 망언과 행동들을 사실대로 자료화하여 보존하여야 한다. 때가 되면 역사의 진실은 그 빛을 발하게 되고 이와 같은 감출 수 없는 진실 앞에 한·일 양국의 후손들이 마주 섰을 때 무릎을 꿇어야 할 이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그 정당한 삶과 참된 지성의 연구 업적까지도 간과하는 자세는 절대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문화가 일본에 미친 영향이 크고 높았듯이 우리 또한 일본인의 역사에서 배우고 가다듬어야 할 내용이 많음은 인류사의 교훈이다.

 

특히 우리가 이웃 나라 일본의 역사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치욕적인 일제 강점의 피해 의식에서 우리의 문화가 전파된 야만의 섬나라로 뭉개려는 의식이 은연중 팽배하였음도 부정하지 못한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 생활하였거나 일본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은 무서운 나라라는 평가 또한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알면서도 바로 이와 같은 일본의 문화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과 특히 근대 역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각 분야의 주요한 인물에 대한 연구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세세한 연구는 거의 없다. 바로 일본을 바르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그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의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白戰不殆)를 달달 외우면서도 상처의 흔적만 매만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후손들이 운명적으로 맞아야 할 결전의 그날이 오면 슬기롭게 빼들어야 할 지혜의 칼날이 녹슬어가는 사실과 같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우리의 민예 연구에 열정을 바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와 함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이야기에 대하여 연속하여 이를 살펴보려 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워낙 방대한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는 관계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점이다.) 다음 칼럼은 (228) ‘일본역사에 담긴 비밀들’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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