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칼럼을 쓰면서 칼럼의 이해를 위하여 일본의 역사를 요약할 필요를 절감하였다. 이에 써가던 칼럼을 멈추고 필요한 내용의 일본 역사를 정리한다. 불가피하게 설명되어야 할 많은 역사가 거론되는 점의 이해를 바란다.
일본의 역사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이 두 권의 책에서 시작된다. 이 책은 40대 천황인 ‘덴무 천황’(天武天皇. 673~686) 시대에 편찬이 시작되어 ‘고사기’(古事記)는 43대 여성 천황인 겐메이 천황(元明天皇. 707~715) 시대에 완성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기존에 존재하였던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연대기와 계보를 기록한 ‘데이키’(帝記)와 주요한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규우지’(旧辞)를 바탕으로 편찬된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데이키’(帝記)와 ‘규우지’(旧辞)의 문헌은 오늘날 그 어떠한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 ▲ 일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판본 출처: http://www.bunka.pref.mie.lg.jp © 브레이크뉴스 |
또한, 일본이 정사로 자랑하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제40대 ‘덴무 천황’(天武天皇. 673~686)이 막내아들 ‘도네리친왕’(舍人親王 . 676~735)에게 편찬을 지시하여 일본의 역사에서 독신으로 즉위한 사례로는 첫 여성 천황인 44대 ‘겐쇼 천황’(元正天皇. 680`748) 시대인 720년에 완성된 책이다, 이와 같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고사기’(古事記)와 같이 일본의 전설적인 문헌 ‘데이키’(帝記)와 ‘규우지’(旧辞)를 바탕으로 백제본기(百濟本記)와 같은 우리의 역사서와 ‘위서’(魏書)와 ‘진서’(晉書)에 이르는 중국 사서(史書) 기록을 병용하였다. 이를 일본은 객관적인 정사(正史)로 자랑하지만, 우리나라와 연관된 기록에서 유독 왜곡된 내용이 많은 일본의 가장 오랜 역사서이다.
이러한 역사서에 기록으로 기원전 7세기 무렵의 신화와 같은 일본의 제1대 천황 ‘진무 천황’(神武天皇. BC. 660~BC. 585)으로부터 이어온 역사는 43대 여성 천황인 ‘겐메이 천황’(元明天皇. 707~715)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일본의 역사서가 편찬된 시기가 바로 나라 시대(奈良 時代)이다. 이는 ‘겐메이 천황’이 710년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을 모방하여 긴키(近畿) 지방의 나라(奈良)에 수도를 건설하여 794년까지 84년간 유지된 짧은 시대이다. 일본사에서 이와 같은 나라 시대(奈良 時代)는 중앙 귀족 세력들의 끝없는 권력투쟁으로 날이 새면 지역의 주인이 바뀌는 내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당나라와 백제 문화의 도입으로 불교문화의 융성과 함께 한자 문학의 발달이 이루어졌으며 황제의 칭호인 천황(天皇)이 처음 사용되었다.
이를 이어 제50대 천황인 ‘간무 천황’(桓武天皇. 737~806) 시대에 이르러 도읍을 나라(奈良)에서 교토(京都)에 헤이안쿄(平安京) 도성을 조성하여 794년 천도하면서 이른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를 열었다.
이와 같은 제50대 ‘간무 천황’(桓武天皇)은 49대 ‘고닌 천황’(光仁天皇. 709~782)과 부인 ‘다카노 니이가사’(高野 新笠)의 아들이다. 바로 어머니 ‘다카노 니이가사’(高野 新笠)가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501~523)의 직계 후손이다. 지난 2001년 12월 23일 일본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기사에는 68번째 생일을 맞은 ‘아키히토 일왕’(明仁, 1933~)의 기자회견 내용이 보도되었다. ‘아카히토 일왕’은 회견에서 ‘제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501~523)의 후손이라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나의 몸에는 한국인 피가 흐르는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던 역사적 배경이다.
이와 같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가 막을 내린 것은 1185년이었다. 무장 출신의 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가 정권을 거머쥐어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쇼군(將軍) 시대의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가 탄생한 것이다. 가마쿠라 막부는 1333년까지 약 15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여기서 반드시 살펴 가야 하는 역사가 있다. 서역의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과 연결되어 남쪽의 중국과 북쪽의 러시아와 접경해 있는 몽골고원(Mongolian Plat)은 역사적으로 기원전 7세기 경의 전설적인 스키타이(Scythai) 세력과 흉노(匈奴)에서부터 수많은 유목민 세력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투가 끝이 없었던 고원이었다, 특히 러시아에서 몽골로 흐르는 오논강(Onon River)과 몽골 동부의 헨티산맥(Hentiynn Mts)에서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으로 흐르는 케룰렌강(Kerulen River) 유역에는 무수한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세력을 바람처럼 쓸어 세력화시킨 인물이 ‘테무친’(鐵木眞)이다. 그는 1206년 몽골고원을 통일하여 ‘칭기즈칸’(Chingiz Khan. 1162~1227)의 칭호와 함께 몽골제국을 탄생시켰다. 이후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흐르는 아무다리야 강(Amu Darya) 유역에 세워졌던 호라즘 왕조(Khorazm)를 1219년 정복하면서 세계적인 정복자가 되었다.
1227년 ‘칭기즈칸’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러 아들에게 분할된 몽골제국은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1294)에 이르러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쿠빌라이 칸’은 1234년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나라를 정복하고 1260년 대칸(大汗)의 자리에 올라 1271년 원(元)나라를 세운 이후 1279년 ‘남송’(南宋)을 정복하여 이민족이 최초의 통일된 중국을 통치하는 역사를 열었다. 이른바 대원대몽고국(大元大蒙古国)이다.
이와 같은 몽고군이 당시 우리 고려(高麗)를 가만두었을 리가 없다, 대대로 대국의 전투에 이골이 난 몽고군은 남송과 고려의 연합에 대한 다양한 전략적 대비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이는 말갈족으로도 부르는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나라를 정벌할 당시인 1231년 몽고군이 고려를 처음 침략한 사실에서 그들이 얼마나 주도면밀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는지 역사를 대략 헤아리는 사람이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몽고군이 당시 우리의 고려를 침략한 역사는 참혹하였다. 1231년 몽고의 침략에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여 1260년 몽고군이 철군하고 1270년 개경으로 환도 하기까지 몽고군이 벌인 살육의 만행은 실로 잔혹하였다. 당시 고려는 무신정권 100년의 역사에서 ‘최충헌’(崔忠獻. 1149~1219)과 그의 아들 최우(崔瑀. ?~1249)와 그의 후손 최항(崔沆. ?~1257)에서 다시 최의(崔竩. 1233~1258)에 이르는 4 대 60년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무한한 폐단을 낳았던 무신정권의 전횡은 익히 알려진 역사이다. 그러나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 ?~1249)의 무신정권 시대에 강화도 천도가 이루어지면서 몽고군의 침략에 항거하여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절대 불복의 정신은 많은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이는 특히 1219년 아버지 최충헌의 무신정권을 계승한 아들 최우(崔瑀)가 특수한 선발군이라는 뜻의 사병 야별초(夜別抄) 군을 양성하여 치안을 유지하였다. 이후 군의 목표를 가진 사병 육성에 따라 그 수가 늘어나면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편제를 나누었다. 이와 같은 별초군이 몽고군의 침략으로 전투에 나서면서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돌아온 병사의 수가 많아지면서 이를 신의군(神義軍)으로 분류하여 삼별초(三別抄)가 구성된 것이다.
당시 고려 제24대 왕 원종(元宗. 1219~1274)이 1260년 왕위에 오른 이후 몽고군과 결탁하여 1270년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林惟茂. 1248~1270년)를 제거하면서 100년 역사의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고 왕정시대가 열리면서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며 개경 환도를 결정하였다. 이에 삼별초(三別抄)는 이미 개경에 대규모의 몽고군이 입성한 상태에서 해산은 곧 파멸임을 직감한 장군 배중손(裵仲孫. ?~1271)과 야별초(夜別抄) 지휘관 관직의 지유(指諭)이었던 노영희(盧永禧)는 1270년 6월 1일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1271)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온’(王溫)은 고려 8대 왕 현종(顯宗. 992~1031)의 후손이었다. 여러 기록에서 삼별초의 ‘왕온’(王溫)의 옹립에 대하여 협박설과 마땅한 왕족이 없었던 상황의 대안 설 등 많은 내용이 존재한다. 필자는 고려 8대 왕 현종 재임 시에 거란족의 침입에 참패하였으나 온갖 굴욕적인 요구를 묵살하여 다시 쳐들어온 거란을 강감찬(姜邯贊. 948~1031) 장군이 섬멸하여 이후 거란과의 우호관계가 회복되었던 역사를 헤아려 현종의 후손 왕온을 옹립한 것인지에 대한 연구 또한 ‘삼별초의 난’에 대한 연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역사의 행간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또한 이와 같은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1271)의 이야기와 함께 그의 친동생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 1223~1283)이 1241년 왕명에 의하여 왕자로 신분을 바꾸어 18세에 몽고에 볼모로 가서 황족의 딸과 결혼하였다. 물론 오랜 시일이 지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었지만 어려서부터 왕실에서 성장한 이유로 왕자와 다름없으나 그 진실은 감출 수 없어 모든 문서에 애자(愛子)로 표기하였다는 지혜로운 대처로 무마되었다, 이러한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은 몽고에서 희대의 역신 홍복원(洪福源. 1206~1258)과 대립하여 역사에 남긴 운명적인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역신 홍복원(洪福源)의 아버지 홍대순(洪大純)은 평안북도 의주 지역의 옛 지명인 인주(麟州)의 군 지휘관 도령(都領) 이었다. 이를 ‘인주도령’(麟州都領)으로 표현한다. 그는 1218년 평양 동쪽의 강동성(江東城) 전투 때에 몽고군에 투항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몽고군이 금(金) 나라를 공격하면서 그들의 지배를 받던 거란 세력이 난을 일으키면서 몽고군을 피하여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군은 이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이들을 물리쳤으나 1216년 만주지역의 여진 세력과 합류하여 다시 쳐들어왔다. 이에 고려군의 총공세에 밀린 이들은 평양 동쪽의 강동성(江東城)을 점거하고 대치하였다, 이때 몽고군이 이들의 토벌을 빌미로 대군을 끌고 고려에 진입하면서 평북 인주(麟州)의 군 지휘관 도령(都領)이었던 홍대순(洪大純)이 1218년 몽고군에 투항하여 앞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다음 해 1219년 강동성을 점거하여 항거하던 거란 세력은 몽고군과 고려군에게 소탕되었다.
이와 같은 역신 홍대순(洪大純)의 아들 홍복원(洪福源)은 평양지역의 행정구역인 서경(西京)의 군 지휘관 낭장(郎將) 이었다. 이른바 서경유수(西京留守)의 서경랑장(西京郎將)이다, 그는 아버지인 역신 홍대순(洪大純)이 몽고에 투항한 이후 몽고의 지원 아래 일단의 내통이 있었다. 이에 1231년 몽고 장군 살리타이(撒禮塔. ?~1232)가 고려를 쳐들어왔을 때 배후에서 협력하였으며 다음 해 1232년 강화도 천도가 이루어진 보복으로 살리타이 장군(撒禮塔. ?~1232))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에도 배후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살리타이장군이 용인의 토성 처인성(處仁城) 전투에서 사살당한 이후 몽고군이 철수하였지만, 그는 평안도 북계(北界) 지역에 1233년 난을 일으킨 후 몽고로 망명하여 동경 총관(東京惣管)이 되었다.
![]() ▲ 몽골제국 ‘쿠빌라이 칸’ 초상/ 전남 진도 용장성 터/ 전남 진도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의 묘/출처 https://wikipedia.org/ : http://www.wawa105suj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76 © 브레이크뉴스 |
이후 홍복원(洪福源. 1206~1258)은 1235년부터 1258년까지 5차례에 걸쳐 몽고군이 고려를 침략할 때마다 선봉장이 되었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1241년 왕자의 신분으로 바꾸어 볼모로 몽고에 갔던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 1223~1283) 과의 대립으로 그가 죽게 된 배경은 여러 기록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보편적으로 왕준의 부인 황족의 딸이 몽고제국의 4대 황제인 ‘몽케 칸’(蒙哥. 1208~1259)에게 ‘홍복원’(洪福源)의 오만이 도를 넘어 일국의 왕자인 자신의 남편 ‘왕준’(王綧)을 개로 표현하여 황실의 권위를 우습게 알고 있다는 참소로 황제의 명으로 맞아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이 볼모로 왔을 때 ‘홍복원’이 많은 배려를 하여 보살폈지만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의 참소를 올린다는 소문에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에게 ‘주인을 무는 개’라고 표현한 내용에서 발단된 것이다.
이렇듯 이야기가 길게 진행된 사유가 있다. 이는 1270년 고려의 개경 환도가 결정된 이후 삼별초가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1271)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사실에서 바로 몽고에 있었던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이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의 친동생이었던 것이다.
삼별초군은 1270년 6월 1일 삼별초의 난(三別抄의 亂)을 일으켜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1271)과 그의 아들 왕환(王桓)을 옹립하여 전남 진도로 옮겨 저항하였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역신 홍대순(洪大純)의 손자이며 역신 홍복원(洪福源. 1206~1258)의 아들 홍다구(洪茶丘. 1244~1291)이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몽고에 투항한 이후 원나라에서 태어났다. 4대 황제인 ‘몽케 칸’(蒙哥. 1208~1259)의 동생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1294)이 몽고제국의 5대 황제가 되어 1279년 ‘남송’(南宋)을 정복하여 대원대몽고국(大元大蒙古国)을 세운 당시에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무한한 총애를 받는 무사가 되어 있었다.
당시 삼별초군은 진도에 정착하여 강력한 해상권을 바탕으로 전라도 일대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는 부패한 고려 말 정권에 등을 돌린 민중의 도움이 컸다. 또한 강화도 천도와 삼별초군의 진도 섬 정착의 맥락은 대륙 전투에 뛰어난 몽고군이 해상전투 경험이 없는 취약점을 헤아린 것이었다. 이는 고려와 몽고가 연합하여 여러 차례의 진도를 공략하였지만 실패한 사례에서 확인되는 내용이다.
1271년 5월이었다. 역신 가문의 후손 홍다구(洪茶丘. 1244~1291)가 몽고군 지휘관이 되어 진도 공략에 나선 것이다. 당시 홍다구는 아버지 홍복원을 죽음에 이르게 한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형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1271)에 대한 보복심이 더욱 강력한 공격을 예고하고 있었다. 여기에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아들 신안후(信安侯) 왕옹(王雍)과 광화후(光化侯) 왕희(王熙)형제가 삼별초 진압에 나선 사실도 역사가 품은 이야기다. 즉 두 조카가 큰아버지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과 사촌 형제 왕환(王桓)을 향하여 칼을 겨눈 것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와 같은 기록에 의하면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은 두 아들에게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면 큰아버지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1271)을 구하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진도 공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여러 기록에서 엇갈리고 있다. 역신 가문의 후손 홍다구(洪茶丘. 1244~1291)가 지휘한 군대가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아들 왕옹(王雍)과 왕희(王熙)형제가 소속된 군대와 달랐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홍다구의 부대가 가장 먼저 진입하여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1271)과 그의 아들 왕환(王桓)을 살해한 기록은 명확하게 확인된다.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두 아들이 큰아버지를 살해한 부대에 속해 있었다는 일부 기록이 존재하지만 만약 그 비극적인 현장에 그들이 있었다면 어떠한 형태이던 기록이 남아있을 여지가 많지만 아직 그와 같은 운명적인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운명적인 비극의 삼별초 항쟁에 본산이었던 용장성은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삼별초의 난이 진압되면서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1294)은 고려를 전진기지로 일본을 정복하려는 오랜 전략을 드러냈다. 바로 역신 가문의 후손 홍다구(洪茶丘. 1244~1291)가 선봉장이었다.
다시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자 당시 이와 같은 시기에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의 쇼군(將軍)을 대신하여 모든 권력을 집행하던 직책은 싯켄(執權)이었다. 1268년 17살의 나이로 싯켄(執權)에 오른 인물이 ‘호조 도키무네’(北条 時宗 ,1251~1284)였다. 가마쿠라 막부 제8대 싯켄(執權)이다. 원나라를 세운 몽고군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1294)은 1274년 예상대로 고려를 일본 침공의 전진 기지로 삼아 1274년 고려군과 함께 규슈의 하카타만(博多灣) 일대를 침공하여 상륙하였다. 막부와 주종 관계에 있었던 지도급 무사 고케닌(御家人)들은 사력을 다하여 싸웠지만 몽고군의 화약으로 제조된 폭탄과 왜군의 특성을 간파한 전법에 밀려 오늘날 후쿠오카현 ‘다자이후’(大宰府)의 방어선 미즈키(水城)까지 위태로웠다.
이와 같은 마지막 방어선 미즈키(水城)는 660년 백제가 멸망한 이후 일본으로 탈출한 백제 유민들이 라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664년 일본인과 함께 쌓은 자연조건을 활용한 수성이다. 이는 해안선에서 평야로 이어지는 길목을 높은 제방으로 쌓아 그 앞에 거대한 인공호를 만들어 더는 접근할 수 없는 이중 장치의 자연 방어선이다. 당시 이와 같은 수성(水城)은 나무판을 대고 그 사이에 흙을 넣어 담이나 성벽을 쌓는 즉 현대의 토목공사와 같은 백제의 축성기법인 판축(版築) 법이 사용되었다. 나아가 물길이 흐르는 곳에 축성된 흙이 쓸려가지 않도록 갈대와 나뭇가지를 점토와 함께 배치하는 부엽공법(浮葉工法)이 사용된 것이다. 이와 같은 백제 유민이 라당 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하여 쌓은 미즈키(水城)가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한 사실은 역사가 품은 이야기라 할 것이다.
당시 월등한 전력으로 침략한 몽고군은 이와 같은 미즈키(水城) 방어선을 맞아 돌파구를 찾으려 하카타만(博多灣)으로 돌아가 고심하던 중 밤사이 태풍우가 강습하여 함선이 침몰하면서 고려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몽골제국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1294)은 1279년 ‘남송’(南宋)을 정복하여 최초의 통일된 중국을 통치하는 이민족의 대원대몽고국(大元大蒙古国)의 역사를 열었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1281년 원나라 군대와 고려군을 합한 14만 대군을 4,400여 척의 병선으로 이동하여 1274년 뼈아픈 퇴각을 당하였던 북규슈에 2차 대 침략을 감행하였다. 당시 일본막부군은 2개월에 걸친 사투 속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일본 정벌이라는 역사의 깃발이 오르기 직전의 밤이었다. 그날 밤 자정 무렵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큰 폭풍이 산천과 바다를 휩쓸어 몽고군은 두 눈 부릅뜨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퇴각한 몽고군은 더 이상 일본의 정벌을 감행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의 몽고 연합군의 침략을 기적적으로 물리친 재해의 태풍을 일본은 나라를 구원한 신의 바람 '가미카제(神風)'라 한다.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이와 같은 역사를 인용하여 ‘가미카제 특공대’라는 신의 이름으로 꽃다운 젊은이들을 육탄의 전장으로 내몬 군국주의 야욕에서 신의 바람은 불지 않았다.
이와 같은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는 몽고제국 원나라와의 전쟁으로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세력이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제 96대 천황에 오른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1288~1339)세력이 1333년 ‘가마쿠라막부’의 타도를 들고일어났다. 이를 토벌하러 나섰던 무장 ‘아시카가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가 막부의 근원지인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를 공격하는 역 반란이 일어났다. 이어 무장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 ?~1338)가 합세하여 가마쿠라(鎌倉)를 공격하여 호조우지(北條氏) 일족을 타도하면서 1333년까지 약 150여 년을 이어온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가 막을 내렸다.
이후 제 96대 천황에 오른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1288~1339)이 난국의 통제권을 확립하지 못하면서 1335년 가마쿠라 막부의 호조(北條)세력이 다시 가마쿠라 막부를 탈환하였다. 이에 무장 ‘아시카가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가 다시 이를 토벌한 후 1336년 1월 교토에 정주하던 ‘고다이고 천황’을 밀어내고 ‘고묘 천황’(光明天皇. 1322~1380)을 옹립하면서 자신이 쇼군이 되어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를 열었다. 이른바 북조(北朝) ‘무로마치’(室町)이다.
이는 밀려난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1288~1339)이 세력을 규합하여 조정을 구성함으로써 이를 남조(南朝)로 부르게 되면서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는 이른바 남북조 시대(南北朝 時代)를 맞았던 것이다. 이후 1392년 남북조가 통합되어 이어간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는 1573년까지 237년간의 역사를 통하여 일본의 고유한 문화를 꽃피우는 바탕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깊은 의식으로 살펴 갈 일본의 역사가 있다. 이는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가진 시대는 ‘에도 시대’(江戶時代)이다. 이는 전설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에도(江戶)에 막부를 개창한 1603년부터 마지막 막을 내린 1867년까지의 2백65년 동안의 역사를 에도시대라 한다.
![]() ▲ ▲ 安土城図/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초상/ 모모야마 구룽(桃山 丘陵)/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의 초상/ © 브레이크뉴스 © 브레이크뉴스 |
그러면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가 막을 내린 1573년 이후 에도시대(江戶時代)가 열린 1603년까지 27년의 역사는 무엇인가? 이를 일본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라고 한다. 이는 전설의 무장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가 거처한 ‘아즈치 성’(安土城)과 일본 통일의 주역이며 임진왜란의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가 은거지로 사용하려 세웠던 ‘후시미성’(伏見城)을 ‘모모야마 성’(桃山城)으로 후세에 이름을 붙여 만든 명칭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27년간의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에 일본은 1592년 4월 14일 부산포 공격을 시작으로 조선의 강토를 침략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당시 왜군은 5월 7일 도성의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을 불태웠던 기록은 우리의 기록이 아닌 일본의 종군 승려였던 천행(天行)이 쓴 ‘서정일기’(西征日記)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이어 1593년 1월 평양성까지 공격하였다. 이어 명나라의 원군이 도착한 이후 1593년 4월부터 전쟁과 함께 지루한 화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오랜 화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일본은 1597년 8월 27일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른바 정유년에 일어난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가 1598년 8월 18일 세상을 떠나면서 전의를 상실하여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12월 전쟁은 종식되었다.
27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침략의 역사를 자연의 정취로 장식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는 마치 일본인의 상징인 드러내지 않은 본심을 뜻하는 ‘혼네’(本音)의 결정판과 같은 섬뜩한 역사이다. 일본 최대의 호수 비와호(琵琶湖)가 내려다 뵈는 시가현(滋賀県) 아즈치 산 정상에 세워진 ‘아즈치 성’(安土城)은 오늘날 그 흔적만이 존재한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 출병 이후 교토(京都)의 모모야마(桃山) 구릉에 세워진 성(城)은 그 이름이 본디 ‘후시미성’(伏見城)이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은거의 주택으로 세웠으나 그의 사후 몇 번의 소실로 새롭게 세워지면서 오늘날에는 본래의 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하는 사실은 겐로쿠(元禄) 연호를 사용하였던 1688 년부터 1704년까지의 겐로쿠 시대(元禄時代)에 ‘후시미성’(伏見城)과 그 인근에 복숭아(桃) 나무가 많았던 사실에서 ‘모모야마 성’(桃山城)이라는 별칭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바로 1573년 이후 에도시대(江戶時代)가 열린 1603년 까지를 구분하는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라는 명칭이 이와 같은 이후에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로 수식된 27년의 일본 역사 속에는 무참하게 짓밟힌 조선의 피와 눈물이 꽃망울로 맺혀 있음을 우리의 후손들은 깊게 새겨야 할 것이다. 다음 칼럼은 (229) ‘일본 역사에 담긴 비밀들’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