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북한의 심장 평양에 남아있는 평양성(平壤城)은 민족의 역사를 품고 꿋꿋하게 서 있다. 단군 임금의 개국에서부터 고구려의 웅대한 민족적 기상을 끌어안고 있는 평양성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역사의 개축을 통하여 오늘에 존재하고 있다.
평양성은 민족의 자존을 상징하는 평남(平南)에서 함남(咸南)까지 곤두선 낭림산맥(狼林山脈)의 기상을 품은 곳이다. 낭림산 한태령에서 발원하여 대동강으로 흘러들어 돌고 돌아 흐르는 물길 기슭에 자리한 동녘의 대동문(大同門)은 평양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와 같은 동녘의 낭림산과 북쪽의 묘향산과 금수산(모란봉) 그리고 남쪽의 멸악산 정기가 모여드는 대동강을 천혜의 방어선으로 두르고 있다.
![]() ▲ (좌) 련광정과 대동문이 보이는 사진(일제 강점기)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profile/intro.nhn?blogId=ohyh45 (우) 황창배作 련광정 60x140cm. 종이위에 수채, 아크릴. 1998. 자료제공: 황창배 미술관 © 브레이크뉴스 |
이와 같은 대동문에서 대동강 서안을 굽어보는 비경의 구릉 만수대(萬壽臺)까지가 평양성의 내성이다. 이어 남쪽으로 왼편의 본 평양과 반대편 서쪽 평양을 잇는 다리 대동교가 시작되는 곳에서 안산(安山)에 이르는 지역이 중성(中城)이었다. 해방 이전까지 평양의 이편과 저쪽을 오가는 유일한 다리였던 대동 철교는 1923년 일제 강점기 시대에 세워진 것이지만 기실 고구려 시대에도 다리가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이 훗날 조사되었다. 이어 의주로 통하는 보통문(普通門)이 서 있는 곳에 맞닿은 보통강을 외성(外城)으로 배치하고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활용한 조상의 지혜로 매만진 도성이 평양성이다.
이와 같은 평양성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 곧 민족의 역경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필자는 이와 같은 평양성에 얽힌 역사의 교훈을 헤아려 우리의 역사에서 어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를 깊게 헤아려야 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지난해 5월 문 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오늘내일 한반도에 전쟁의 불길이 솟아오를 것처럼 온 세계의 언론이 한목소리로 떠들어 대던 백척간두의 현실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기적처럼 평화의 소통이 이루어진 사실을 직시하여 온 국민은 평양성(平壤城)에 담긴 교훈을 깊게 새겨야 할 것이다.
BC 108년 전한(前漢)에 무너진 최초의 평양성은 왕검성(王儉城)이다.
BC. 2333년 단군왕검(壇君 王儉)이 세운 고조선(古朝鮮)의 도읍은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이다. 그중 평양지역으로 추정하는 왕검성(王儉城)은 고조선의 후기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이어져 BC. 108년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 한무제(漢武帝. BC. 157~BC. 87)에 의하여 고조선의 도읍인 평양의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된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이후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군(樂浪郡)의 지역이 오늘날 평양(平壤) 지역이라는 기록은 많다. 이와 같은 평양은 우리의 역사에서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안고 BC. 37년에 세워진 ‘고구려’(高句麗)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인 지역에 졸본성(卒本城)을 세운 이후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의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제25대 ‘평원왕’(平原王. ?~590)때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겨 이를 평양성(平壤城)이라고 불렀던 기록은 우리의 역사서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371년 고구려 평양성 백제에 함락
이와 같은 평양성은 고구려 16대왕 ‘고국원왕’(故國原王, ? ~371)이 369년 백제를 2번 공략하려다 패하면서 백제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에게 외려 평양성을 함락당하면서 백제 영토 확장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의 웅대한 기상에 전성기를 맞게 되면서 뒤를 이은 장수왕(長壽王. 394~491) 시대에 이르러 평양성 천도가 이루어지면서 475년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공격하여 100년 전 평양성 함락의 명예를 되찾았다.
이후 국세가 쇠약해진 백제는 마침내 초심을 잃고 국사보다는 향락을 추구한 ‘의자왕’(義慈王. ?~660) 시대에 나ㆍ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660년 멸망하고 말았다. BC. 18년에 세워진 ‘백제’(百濟)의 678년 동안의 찬연한 역사가 사라진 것이다.
![]() ▲ 북한국보 제1호 평양성(平壤城) © 브레이크뉴스 |
668년 11월 5일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평양성 함락
이와 같은 기세를 몰아 북진을 지속한 나ㆍ당 연합군에 의하여 마침내 668년 11월 고구려의 평양성이 무너지면서 BC. 37년에 세워진 웅대한 민족의 기상을 떨친 ‘고구려의 705년을 이어온 역사가 막을 내렸다,
이후 한반도 전체를 종속적인 관계로 이끌어가려는 당나라의 속셈이 드러나면서 신라와의 충돌이 잦아져 마침내 670년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은 676년 신라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 신라는 통일 신라 시대를 열어 천 년 신라 문화를 꽃피웠다.
후삼국(後三國) 시대가 열리다.
이와 같은 천년 신라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각지에 난이 빈번하였다. 당시 통일 신라 시대 행정구획으로 구주(九州)의 하나인 사벌주(沙伐州)였던 오늘날 경북 상주(尙州)에서 태어난 신라 장수 ‘견훤’(甄萱. 867~936)이 892년 옛 백제 땅에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어 900년 오늘날의 전주인 완산(完山)에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하였다.
이를 이어 출생에 대한 여러 추정이 엇갈리는 ‘궁예’(弓裔. ?~918)는 어려서 출가한 승려였다. 891년 사찰을 나와 오늘날의 경기도 안성인 죽주(竹州)의 지방 호족 사병에서 출발하여 일대의 여러 호족을 규합하여 가장 많은 군대를 거느리는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896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898년 송악(개성)으로 옮겨 일대의 세력을 거머쥐었다, 이는 송악(개성) 일대의 가장 영향력이 큰 호족과 손을 잡았다. 바로 ‘왕건’(王建. 877~943)의 집안이다. 이에 완산(完山)에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한 견훤의 뒤를 이어 901년 후고구려(고려)를 세웠다. 이와 같은 후백제와 후고구려로 분할된 신라와 함께 이를 후삼국 시대라 한다.
고려(高麗)의 탄생과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王建. 877~943)
‘왕건’(王建. 877~943)은 궁예 휘하에서 장군으로 활약하면서 특히 견훤의 후백제 세력을 견제하였다. 이후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과 911년에 태봉(泰封)으로 바꾸면서 개경(송악) 도읍을 철원으로 다시 옮기는 등 왕건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궁예의 전횡이 극심하였다, 이에 주요한 수장들이 모의하여 918년 궁예를 물리치고 다시 도읍을 송악(개성)으로 옮겨 태조 왕건이 왕위에 올랐다. 바로 고려(高麗)의 탄생이다. 이후 930년 왕건의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고창전투에서 대파하면서 신라가 사실상의 항복을 자청해왔다. 당시 경순왕(敬順王, ?~978)이다. 이어 935년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 ?~936)이 역모를 꾀하여 아버지를 유폐하고 왕에 올랐다. 이에 견훤이 후백제를 탈출하여 왕건에게 망명하여왔으며 신라 또한, 고려에 통합되었다.
당시 왕건은 이와 같은 후백제의 견훤과 신라의 경순왕을 극진히 보살폈으며 화해와 호혜의 정신으로 모든 백성을 보살폈다. 936년 왕건은 견훤과 함께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 ?~936)을 전장으로 불러 무릎을 꿇게 하였다. 이는 676년 신라가 당나라를 제압하고 통일 신라를 건설한 이후 260여 년 만에 한반도 통일이 다시 이루어진 역사였다.
1218년 여몽연합군 거란 세력 점거 평양 강동성(江東城) 탈환
이와 같은 고려의 역사가 지속되면서 부패한 무신정권에 민심이 등을 돌리면서 국운이 쇠락하였다. 이에 1218년 금나라에서 밀려난 거란의 잔여 세력이 몽고군을 피하여 평양 강동성(江東城)을 점거하였다. 이와 같은 세력의 토벌을 빌미로 몽고군이 고려의 땅에 진입하여 고려와 연합으로 성을 탈환하였다, 이후 원나라를 세워 통일 중국을 통치한 몽골제국의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1294)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경유지로 일본의 정벌에 나섰지만 실패하였다.
1593년 명나라 조선 연합군 임진왜란 왜군이 점령한 평양성 탈환
이후 1592년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는 명나라 정벌의 명분으로 조선의 경로를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한 우리의 국토를 침략하였다. 임진왜란 이야기다, 왜란 발생 두 달만인 7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가 이끄는 일본군 제1대에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1593년 2월 조선의 피가 흐르는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 1549~1598)과 조선군의 연합으로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1218년 몽고와 고려 연합의 탈환 이후 375년 만의 일이다.
![]() ▲ (좌) 평양성 전투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평양성도(보물 제1997호 송암미술관 소장) 출처:국립중앙박물관-송암미술관 자료 © 브레이크뉴스 |
1894년 일본과 중국이 평양성을 놓고 벌인 외세의 청일전쟁
다시 300여 년의 역사가 흘러간 이후 1894년 6월 쇄국의 깊은 잠에 빠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육군과 해군 전투에서 모두 패하기 시작한 청나라 군대는 1894년 9월 평양성에 배수진을 쳤으나 일본군의 총공격에 9월 15일 청나라 군대는 함락되어 평양성을 버리고 압록강을 넘어 달아났다. 지난 임진왜란에 명나라와 조선군의 연합으로 평양성을 탈환한 역사 이후 301년 만의 일이다.
이렇듯 지난 1218년 몽고군과 고려의 연합군과 대치한 거란에게서 탈환한 평양 강동성에 이어 1593년 2월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한 왜군에게서 탈환한 평양성은 375년 만의 역사이며 마침내 조선의 땅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평양성에 벌어진 전쟁은 다시 301년 만에 생겨난 역사이다,
1950년 10월 18일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한국군 평양 탈환
이후 1950년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 동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전쟁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평양탈환 작전에 돌입하였다. 당시 북한은 10월 9일부터 후퇴 전략으로 주요 부대와 인물들이 평양을 빠져나가면서 평양 외곽에서부터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평양을 미 제1군단 예하의 제1기병사단과 미 24사단 그리고 한국군 제1사단은 10월 17일과 18일 오전 전투를 통하여 방어선을 해제하고 오후에 평양 전역을 탈환하였다.
이와 같은 BC 108년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 한무제(漢武帝. BC. 157~BC. 87)에 의하여 고조선 도읍인 평양의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된 이후 온갖 풍화의 역사를 견뎌온 평양성 역사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일깨우게 된다.
자유롭게 평양성에 가는 그 날이 오면 평양성 꽃잎 하나 갈무리하여 꽃잎에 녹아내린 반만년 역사를 품은 빛깔을 가슴으로 바라보고 싶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더 이상의 이야기를 줄인다. 다음 칼럼은 (230) ‘일본 역사에 담긴 비밀들’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