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1185년 ‘헤이안 시대’(平安時代)가 막을 내리고 이어 무장 출신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가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쇼군(將軍) 시대의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를 탄생시켜 1333년까지 150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어 오랜 진통 끝에 1392년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가 탄생하여 1573년까지 237년간의 역사를 이어왔다.
이후 무장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가 양립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한 1603년까지 27년의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가 존재한다. 이 시기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가 세상을 떠나면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집권하여 에도(江戶)에 막부를 세운 1603년부터 막을 내린 1867년까지의 2백65년 동안의 역사를 에도시대라 한다.
이와 같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시대에 일본은 일명 사코쿠 정책(Sakoku)으로 기록되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통하여 강력한 통치를 추구하였지만 밀려드는 개화의 물결에 서양 나라들과 무력으로 저항하다가 국내의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이어졌다, 마침내 일본 최후의 막부 에도막부는 모든 통치를 천황에게 복귀시키는 왕정 복고령을 1868년 10월 선언하였다, 바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다.
▲ 일본 최초의 교육기관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 學文所)와 서양학문 연구소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 출처 https://www.google.com © 브레이크뉴스 |
일본은 이와 같은 역사에서 14세기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에서부터 15세기 기간에 ‘와코’라고 부르는 해적 왜구(倭寇)의 활동이 절정을 이루었다, 이는 세계적으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 그리고 영국과 네덜란드 등의 대항해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와 같은 해적 왜구(倭寇)의 활동은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부터 동남아시아 각 지역에서 밀무역과 함께 해적 활동을 해왔다, 당시 이들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 상인들의 접촉으로 화약총기류에서부터 다양한 새로운 문물을 밀무역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특히 화약 총기류의 중요성을 인식한 막부 및 영주세력에 의하여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 상인과의 무역이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에스파냐(스페인)와 포르투갈의 문물을 뜻하는 말이 ‘난반’(南蛮)이다. 물론 이와 같은 ‘난반’(南蛮)은 중앙아시아 초원지역과 동아시아 일부 지역의 뜻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유럽과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문물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후 등장하는 것이 ‘란가쿠’(蘭学)이다. 이는 네덜란드의 어학과 다양한 학문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무로마치 시대의 에스파냐(스페인)와 포르투갈의 문물을 뜻하는 ‘난반’(南蛮)의 접촉 이후 에도막부의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정책이 한동안 지속하였지만 새로운 세계의 문물에 대한 관심과 접촉의 거센 물결을 막지 못하였다. 이에 나가사키(長崎) 항을 통하여 네덜란드와 제한적인 무역을 하게 된다. 이에 지난 시대의 ‘난반’(南蛮) 문물과는 비교되지 않은 더욱 발전된 유럽문화를 실감하게 된다. 이처럼 네덜란드를 통하여 도입된 어학·천문학·의학·물리학 등에 이르는 서양 학문을 네덜란드학이라는 ‘란가쿠(蘭學)’로 불렀다. 일본의 역사에서 ‘란가쿠(蘭學)’가 가지는 의미는 오늘의 일본이 존재하게 된 선구적인 바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와 같은 네덜란드의 ‘란가쿠(蘭學)’에 이어 물밀 듯이 밀려든 독일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와 미국의 문물을 ‘요가쿠(洋學)’라 한다.
이러한 신문물의 문화와 학문이 밀려들면서 새로운 세계를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이는 일본의 교육제도에 대한 변화의 배경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당시 에도시대의 일본 교육제도의 탄생과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살펴진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를 보좌하기 시작하여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1579~1632)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1604~1651) 그리고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1641~1680)에 이르는 도쿠가와 막부를 위한 전설적인 지략가로 헌신한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다.
이와 같은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은 당시, 에도 막부의 응접사로 에도시대에 12회를 방문한 조선통신사와 주요한 접촉을 하였던 인물이다. 당시 일본은 유일하게 외국과 공식 국교를 체결한 나라는 조선뿐이었다. ‘중국’과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외교 관계가 없는 단순 무역 거래국이었을 만큼 강경한 쇄국 책을 펴고 있었다. 이에 주자학에 능하였던 ‘하야시 라잔’이 유교가 국교이었던 조선통신사절과 교류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하야시 라잔’은 대표적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의 강토를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6~1598)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1593~1615)의 제거를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에게 강력하게 건의한 인물로 이에 1614년부터 1615년까지 그 유명한 ‘오사카 전쟁’(大坂戰爭)을 낳은 장본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자결로 내몰았다.
이는 필자가 예전의 칼럼(166) ‘일본 교육의 바탕을 알면 일본이 보인다.’ 에서 소상하게 설명한 이야기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발원한 범종의 명문에 국가의 안녕과 군신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을 가진 ‘국가안강’ ‘군신풍락’(國家安康 君臣豊樂)을 ‘하야시 라잔’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독하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훗날 역사는 천재적인 학문을 이룬 그가 비굴한 방법으로 학문을 활용한 역사로 단죄하여 어용학자라는 영원한 평가를 주었다.
이러한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 家光. 1604~1651) 시대인 1630년 쇼군에게 하사받은 오늘날 도쿄 ‘우에노’(上野)의 ‘시노부가오카’(忍岡) 지역의 땅에 ‘공자묘’ ‘센세이덴’(先聖殿)을 건립하면서 개인 학교인 ‘하야시 시쥬쿠’(林私塾)를 세웠다. 바로 일본 근대 교육의 선구적인 탄생이며 오늘날 다양한 ‘사숙’(私塾)으로 발전하여 존재하는 일본교육의 시초이다.
이후 1790년 오늘날 도쿄 ‘간다 지역의 유시마’(神田 湯島) 지역으로 그가 세운 개인학교인 ‘하야시 시쥬쿠’(林私塾) 와 ‘공자 묘’가 옮겨지면서 중국의 노(魯)나라 때에 ‘창평향’(昌平郷) ‘추읍’(陬邑) 에서 태어난 ‘공자’(孔子. BC. 551~BC. 479)의 고향을 뜻하는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 學文所)라는 학교로 발전하였다. 이는 에도 막부에서 제도적으로 부흥시킨 학교로 일본의 영재교육으로 한문을 공부하였던 일본 근현대 교육의 바탕이다.
이와 같은 한학 위주의 교육기관인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 學文所)가 생겨난 이후 물밀 듯이 밀려든 개화의 물결을 수용한 서양학문 연구소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가 1856년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1863년 서양 학문 교육 연구소 ‘카이세이소’(開成所)‘가 생겨난 다. 이 연구소의 명칭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일을 처리하면 모든 일을 성취한다’는 ‘주역’(周易) 의 ‘계사’(繫辭) 편에 담긴 ‘개물성무’(開物成務)에서 개물(開物)이란 사람의 지혜를 열어주는 것이며 성무(成務)란 사람이 의당 하여야 할 일이라는 뜻을 품은 것이었다. 이는 서양 학문을 공부하는 학교의 명칭에 동양학의 ‘역경’(易經) 을 그 바탕으로 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지만, 지혜를 열어간다는 점에서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일본교육의 바탕에서 1868년 ‘메이지 시대’(明治 時代 1868~1912)가 열렸다. 이에 한학 교육기관 ‘쇼헤이자카 학문소’는 ‘쇼헤이학교’(昌平学校)가 되었으며 서양 학문 교육 연구기관인 ‘카이세이소’(開成所)는 ‘카이세이 학교’(開成学校)가 되었다. 다음 해 1869년 대학교육령을 발의하여 ‘쇼헤이학교’(昌平学校)는 국학과 한학을 중점으로 하는 본교가 되었으며 본교의 남쪽에 있던 ‘카이세이 학교’(開成学校)는 ‘대학남교’(大学南校)로 동쪽에 위치한 ‘의학소’(医学所) 는 의과대학 ‘대학동교’(大学東校)가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1869년 일본의 대학교육령이 시행되면서 ‘쇼헤이자카 학문소’가 대학본교가 되어 이를 바탕으로 1872년 일본 초등 교원양성기관인 도쿄 사범학교와 1873년 도쿄 여자사범학교 먼저 생겨난 사실이다. 이는 신규 학교설립에 가장 먼저 필요한 교사의 배출을 의미한다. 이에 1886년 일본 최초의 중등 교원 양성 기관인 ‘고등 사범학교’와 1890년 여자고등사범학교 가 설립되었다. 이후 1902년 도쿄 고등 사범학교로 바뀌고 난 후 1929년 도쿄 문리과 대학이 설립되면서 그 부설 기관이 되었다.
이는 1877년 ‘카이세이 학교’가 전신인 ‘대학남교’(大学南校)와 ‘서양의학소’(西洋医学所)가 전신인 의과대학 ‘대학동교’(大学東校)가 합병되어 도쿄대학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제국 대학령이 반포되면서 1897년 도쿄제국대학이 되었으며 2차 대전 패전 후 1947년 오늘의 도쿄대학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바로 일본교육의 발전과정이며 그 역사이다.
필자가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요점은 단 한 줄이다, 일본 교육의 창시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 일본의 역사에서 어용학자로 영원한 평가를 받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긴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늘 칼럼의 중요한 내용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본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는 일본의 해군 소장 출신인 수학자 ‘야나기 나라요시’(柳楢悦(1832~1891)의 셋째 아들이었다. ‘야나기 나라요시’는 에도시대의 수학자 ‘무라다 츠네무츠’(村田恒光. ?~1870) 문하에 입문하여 수학과 측량술을 공부하였다. 이후 측량사로 일하다가 일본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소장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해군에 복무 중 1877년 일본의 수학자이며 경제학자인 ‘간다 다카히라’(神田孝平. 1830~1898)와 일본 최초의 수학학회인 ‘동경수학회사’(東京数学会社)를 설립하였다. 바로 오늘날 ‘일본수학협회’의 전신이다.
이와 같은 ‘간다 다카히라’는 일본 의학의 선구자인 ‘이토 겐보쿠’(伊東 玄朴. 1801~1871)에게서 네덜란드 학문과 어학을 뜻하는 ‘란가쿠’(蘭学)를 공부하였다.
이후 1862년 일본 대학의 산실인 서양 학문 연구소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에 교수가 되었다. 이후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대가 열리면서 최초의 은행장이 되었으며 정부의 1등 번역 요원으로 초빙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1870년 농민의 토지매매 자유화를 주창한 자유경제의 선구적인 인물로 1871년 오늘날의 효고현 지사(兵庫県令)가 되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조선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버지 ‘야나기 나라요시’와 일본 수학협회를 창설한 ‘간다 다카히라’는 일본의학의 선구자인 ‘이토 겐보쿠’에게 네덜란드 학문 ‘란가쿠’(蘭学)를 배웠다. 이와 같은 일본 의학의 선구자 ‘이토 겐보쿠’(伊東 玄朴. 1801~1871)는 우리의 독도와 긴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독일 출신 의사로 네덜란드 정부를 위하여 일하였던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 1796~1866)에게 공부한 인물이다. 이와 같은 의사 ‘시볼트’는 1823년 일본 나가사키(長崎) 시내를 흐르는 천의 하류에 부채꼴로 만든 데지마 섬(出島)에 설립된 네덜란드 무역기지 상관(商館)에 의료책임자로 부임하였다. 당시 그는 1824년 나가사키에 병원과 나루다키 쥬쿠(鳴滝塾)라는 사숙 형태의 학원을 설립하였다. 이때 ‘이토 겐보쿠’(伊東 玄朴)가 의학을 공부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언급할 내용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실패한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민심의 동요와 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강력한 쇄국 책을 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세계는 변화의 바람이 드세게 불어와 일본에 무역 개방의 유혹적인 문물을 실어왔고 일본은 불가피하게 이를 나가사키 항에 제한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 등과 제한적인 무역을 하였다. 당시 세계 여러 나라는 이와 같은 일본에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하였다. 이에 당시 가장 필요한 것이 정밀한 지도였던 만큼 일본은 엄격한 국법으로 지도를 제작 관리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인 1826년 9월 ‘시볼트’의사의 지도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일시 귀국하면서 먼저 선적한 화물선이 좌초하면서 지도가 발각된 이야기부터 많은 논란이 있다. 필자가 살펴본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의 제보에 의하여 지도가 발견되면서 가택 연금 상태에서 1829년 10월 그를 일본에서 추방한 것으로 헤아려진다.
당시 그가 소지한 지도는 일본이 1800년부터 1821년까지 많은 자원을 들여 일본 전역의 실제 측량으로 이루어진 그 정확도가 놀라운 최신지도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였던 것이다. 당시 관련자들에 대한 실로 가혹한 신문이 시작되어 많은 일본인이 죽음에 이르는 처벌을 받았다. 당시 지도를 넘겨준 인물은 일본의 지도제작 역사에서 가장 주요한 인물인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 1764~1804)의 아들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 景保. 1785~1829)였다. 이에 그는 참형 당하였다.
![]() ▲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1745~1818)/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 景保. 1785~1829) © 브레이크뉴스 |
이와 같은 일본 지도제작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특히 우리의 영토인 독도와 연관된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일본의 지도는 측량술에 의하여 정밀하게 제작된 지도로 에도막부의 명령으로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1807년부터 1809년까지 사할린 등 변경지역을 조사하여 제작한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가 있다. 이 지도에는 우리의 독도가 우산국으로 되어있고 동해는 조선해로 표기되어있다.
또한 일본 정부의 주관으로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1807년 제작에 착수하여 1810년 제작한 세계지도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에는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하고 있다.
이후 시볼트의사의 지도사건에 연관된 문제의 지도는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이다. 이 지도는 ‘이노도’(伊能図)로 약칭하여 부르는 지도로 물론 이 지도에도 독도와 동해의 일본영토 표시가 되어있지 않다, 이 지도는 1800년 에도막부의 특별지시로 일본 모든 지역의 측량 사업이 시작되어 1821년 제작된 실측에 의한 가장 정밀한 지도이다. 앞서 언급한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1809년 제작한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와 1810년 제작한 세계지도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의 일본 지리도가 바로 ‘대일본연해여지전도’의 제작과정에서 제작된 지도이다,
이와 같은 ‘대일본연해여지전도’의 제작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 천문학과 측량술의 선구적인 인물인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 1764~1804)와 그의 제자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1745~1818)로부터 시작된다.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 1764~1804)는 일본의 선구적인 천문학자 ‘아사다 고류우’(麻田 剛立. 1734~1799)에게 천문학과 수학을 공부하였다. 스승 ‘아사다 고류우’는 1755년 겐레키(げんれき)로 약칭하는 일본의 태양 태음력 ‘호우리야쿠력’(宝暦暦)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는 중국 청나라에서 사용하는 태음력에 태양력의 원리를 적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계산한 시헌력(時憲曆)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 역법이 서양 신부 탕약망(湯若望)등에 의하여 편찬된 사실에서 일본 막부는 기독교적인 역법을 배제한 달력의 제작을 위하여 천체운행과 역법을 연구하는 천문방(天文方)의 책임자로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 1764~1804)를 임명하였다. 이후 그는 음력을 기준으로 하면서 태양의 움직임에 맞추어 윤달을 넣어 세월을 정하는 한층 정확도가 높아진 ‘간세이력’(寛政暦)을 1798년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간세이력에서도 윤달에 대한 문제가 생겨나 1844년 그의 아들 ‘시브카와 카게스케’(渋川景佑. 1787~1856)에 의하여 서양 천문학을 도입한 정밀한 태음 태양력인 ‘천보력’(天保暦)이 제작되었다. 이후 일본은 1872년 태양력을 지정하여 ‘천보력’(天保暦)은 음력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 1764~1804)에게 50살의 나이로 천문학을 배우러 찾아온 전설적인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1745~1818)이다. 그는 양조사업에 많은 부를 축적한 후 취미로 개인 관측소를 운영하면서 천문학을 연구하던 중 1795년 50세의 나이로 19살이나 어린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제자가 되어 천문방에 입문하여 천문학과 측량술을 공부하였다. 이후 1800년 에도 막부의 특명으로 일본 전국의 실제 측량작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과정 중에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 1764~1804)가 1804년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1745~1818)가 천문방의 책임자가 되어 스승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아들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 景保. 1785~1829)와 ‘시브카와 카게스케’(渋川景佑. 1787~1856) 형제를 천문방에 등용하여 실측작업을 이어갔다. 당시 ‘이노 다다타카’는 측량 지점에 기둥(pole)을 꽂아 두고 다음 지점에 기둥을 꽂아 그 거리와 각도를 기록하는 선구적인 도선법(導線法) 측량술을 사용하였다.
스승 ‘다카하시 요시토키’가 세상을 떠난 1804년 네 차례의 일본전도 실측을 마친 ‘이노 다다타카’는 그간의 작업을 정리한 ‘일본동양연해지도’(日本東半部沿海地図)를 최초로 제작하여 에도막부에 이를 알렸다. 이후 중국 근해와 조선의 근해에 이르기까지 총 10차례의 측량작업이 이루어진 때는 1816년이었다. 이와 같은 정밀한 실제 측량을 바탕으로 1817년 지도의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해 1818년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1745~1818)가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스승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아들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 景保. 1785~1829)와 ‘시브카와 카게스케’(渋川景佑. 1787~1856) 형제가 지도제작에 전념하여 1821년 대망의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가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대일본연해여지전도’는 일본 열도의 해안선과 내륙의 하천은 물론 사찰에서 동네에 이르기까지 실로 상상키 어려운 상세한 지도였다. 축척별로 각 세 종류로 만들어진 이 지도가 외국에 넘어가서는 안 될 너무나 중요한 기밀로 분류되어 에도막부는 이 지도를 극비리에 보관하였다. 바로 그 책임자가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 景保(1785~1829)였다. 이러한 지도를 ‘시볼트의사’(Siebold. 1796~1866)에게 복제를 허락한 사실이 1826년 시볼트의사 지도사건으로 발각되어 1829년 참형에 처해졌으며 ‘시볼트의사’도 추방되었던 것이다.
![]() ▲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 1796~1866)/ 독도/ 윌리엄 조지프 시볼드(William Joseph Sebald, 1901년~1980) © 브레이크뉴스 |
이러한 ‘시볼트의사’가 네델란드에 돌아가 유럽에서 그가 소장한 지도를 바탕으로 새로운 지도가 제작되었을 때 우리의 영토 독도와 영해의 동해표기가 이루어진 사실도 역사가 품은이야기다.
여기서 이와 같은 네델란드 시볼드와 달리 오늘날 독도 분쟁의 실마리를 남긴 장본인으로 시볼드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한 사람의 인물이 있다. 그는 미국의 군인이며 외교관이었던 윌리엄 조지프 시볼드(William Joseph Sebald, 1901년~1980)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시볼드는 1922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에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1927년 일본계 영국인 여성 화가와 결혼하였다. 이후 1933년 일본 고베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던 그는 1942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에 무관으로 다시 근무한 이후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 대사가 되어 1946년까지 근무한 이후 1946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 집정대사가 되어 6년간 일본 히로히토 쇼와 천황 대신 일본의 섭정을 하였던 인물이다.
이와 같은 그가 친일적인 활동을 펴면서 1949년 미국 정부에 우리의 영토 독도를 일본의 주장을 토대로 귀속시키는 건의 문서를 보냈다. 이에 미 국무부는 이를 바탕으로 독도를 일본령으로 포함하는 초안에 이르렀으나 영국과 호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 문제는 현안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극히 친일적인 미국의 시볼드 주장을 일본은 독도 영유권 문제에 가장 주요한 사실로 연관시키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231 ‘일본 역사에 담긴 비밀들’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