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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 핵폭탄 투하 74주년 이후 일본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9/08/06 [10:40]

오늘은 1945년 8월 6일 74년 전에 이웃나라 일본 히로시마 도시에 인류 최초의 핵폭탄(원자탄)이 투하된 날이다. 신성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된 참상에서 그 어떠한 이유로도 그릇된 역사의 아픔이었음을 인류는 모두 성찰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역사의 상흔을 헤아려 가면 1942년 12월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최초의 원자탄이 탄생한 역사를 만나게 된다. 이후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8월 19일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캐나다 퀘벡에서 만났다. 역사는 이를 퀘벡 회의라 한다. 당시 회의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결론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많은 공헌을 하게 된 영국과 미국의 핵무기 사용에 따른 상호 동의였다.

 

이후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한 이후 1945년 4월 12일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이에 해리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이후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였다. 이후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을 통하여 연합군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였지만, 일본은 젊은 목숨을 앞세운 자살 특공대 가미카제로 연합군에 피해를 가중 시키며 최후의 발악을 하였다.

 

이에 영국과 미국은 퀘백 회의에서 서명한 핵무기 사용의 상호 동의를 얻어 1945년 8월 6일 코드명 리틀 보이(Little Boy)의 전개 속에 일본 히로시마에 우라늄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이후 3일 후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무기는 팻맨(Fat Man)으로 이름 붙인 플루토늄 원자탄이었다.

 

이와 같은 신무기의 섬광이 쓸고 간 참상을 연이어 목격한 이후에야 일본은 8월 10일 연합군 측에 무조건 항복 의사를 표하고 5일 후인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하면서 국군주의의 그릇된 야욕이 빚어낸 인류사의 비극은 종식되었다.

 

▲ 히로시마 도시 전경 사진 (広島 全景) (출처 google)     © 이일영 칼럼니스트


  

이와 같은 아픈 역사를 인식하며 일본의 군국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일본이 1918년 1차 대전이 종전된 이후 패전국 독일과의 사실상 외교관계가 중단되어 있었다. 이는 일본이 1871년 11월 서방세계를 시찰한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団) 귀국 후에 독일에 계속 파견되었던 연수단과 국비유학생 숫자가 급격하게 감소되었던 자료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1919년 6월 연합군과 독일 사이에 체결된 패전 보상을 결정한 베르사유 조약에서 미국과 영국에 의하여 일본이 철저하게 소외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어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하게 되면서 1920년 독일 제국의 외무장관을 역임한 빌헬름 솔프(1862-1936)가 주일 독일대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일본과 독일 사이에 급격한 밀월 관계 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변화로 독일 국비유학생이 대규모로 선발되기 시작하면서 1920년 동경대학 조교수급 인재들이 대거 독일로 떠났다. 이후 유학파들이 돌아와 일본 각계에 주요한 구성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이들이 공부한 독일 마르크시즘에 대한 영향이 일본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왔다. 또한 이렇게 독일에서 돌아온 교수진들이 당시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에 학과들이 신설되면서 교수진으로 오게 되었다.

 

당시 주일 독일대사로 부임한 빌헬름 솔프 대사는 실제로 극히 어려운 독일 경제 상황을 설명하며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일본 각계에 진출한 실력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독일 연구기관의 기부금 후원을 요청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상대성이론으로 원자탄 개발의 바탕을 놓은 아인슈타인(1879-1955)이 1922년 일본을 방문하였다.

 

나아가 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참혹한 살상 무기로 세계를 공포로 몰았던 독가스를 개발하여 아이러니하게도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던 1918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독가스의 아버지 프리츠 하버(1868-1934)도 뒤를 이어 1924년 일본을 방문하였다.

 

당시 이들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일본열도가 떠들썩하게 환영하였던 상황은 일본이 독일을 향한 동경과 기대치가 절대적으로 크고 높았음을 설명한다. 이와 같은 솔프 대사의 외교적 노력으로 당시 독일 연구기관에 많은 후원금이 모금되었다. 과학, 의학, 법학, 예술에 이르는 각 분야의 정기적인 학술 교류와 연수생 파견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외교 절차로 급속도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1926년 일본과 독일의 문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와 같은 문화협정에 따라 독일과 일본의 여러 문화 예술 교류단체들이 설립되면서 일본과 독일은 문화와 예술의 가치를 공유하고 발전시켜가는 혈맹의 관계라는 발기문이 선포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표면적인 활동에서 우리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있다.

 

주일 독일대사 솔프는 1920년 부임하자마자 독일 유학파인 의사 출신으로 당시 동경 시장이었던 고도우 신페이(1862-1929)와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특별한 요청이 있었다. 이는 1921년 아인슈타인이 노벨상 수상 이전 베를린 대학 전신인 베를린훔볼트대학 연구소에서 급여가 없는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헝가리 출신의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1898-1964)가 학생이었던 때이다. 이와 같은 베를린훔볼트대학 연구소 지원에 대한 긴밀한 요청이었다.

 

이에 동경 시장 신페이는 당시 일본에서 1906년 이히 파스-イヒ湿布薬와 1911년 호시 위장약-ホシ胃腸薬으로 당시 최초 신약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가졌던 호시제약(星製薬)의 창업자 호시 하지메(1873-1951)회장에게 이를 요청하였다.

 

호시 하지메 회장은 이와 같은 긴밀한 후원에 대하여 흔쾌히 승낙하면서 개인 후원이 아닌 기업 후원으로 오랫동안 많은 금액을 후원하였다. 이후 아인슈타인 부부가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일본으로 향하던 배 기타노마루(北野丸) 선상에서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전보로 통보받았다. 이에 일본은 이를 더욱 대서특필로 보도하면서 뜨거운 환영의 인파가 넘쳐 났다.

 

여기서 왜? 일본이 세계적인 핵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방일에 온 국민이 대대적인 환호의 성원을 보냈는지에 대한 인식이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가는 곳마다 열광하는 환영의 인파 속에서 도쿄에서 2회 센다이, 나고야, 교토, 오사카, 고베, 후쿠오카에 이르는 일본 열도를 휘젓는 순회강연을 하였다. 나아가 황궁을 방문하여 천황을 접견하는 등 40여 일간을 일본에 체류하였다.

 

또한, 독가스의 발명자 프리츠 하버는 호시제약의 호시 하지메 회장의 초청으로 1924년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군 연구소에 화학무기의 제조법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결국, 호시 신이치 회장의 열성적인 후원으로 무산 위기에 있었던 아인슈타인 그룹의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시 신이치 회장은 이와 같은 과도한 지원으로 1929년 미국 발 경제공황 사태가 발생하면서 일본 경제를 엄습하여 동양 최고의 제약회사였던 호시제약이 파산신청을 하였다.

 

세계 공황은 결국 1934년 패전 보상금 무효를 선언한 히틀러가 독일 총통에 오르는 역사를 맞게 된다. 이와 같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면서 1933년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교수가 되었다. 당시 제자 레오 실라르드는 1933년 영국으로 건너가 동위원소 분리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이후 193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다음 해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였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겪게 되면서 미국에 모인 아인슈타인과 레오 실라르드 그리고 엔리코 페르미와 월터 진이 그 유명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1942년 12월 최초의 원자탄이 탄생하였다. 결국,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파산에 이르는 어려움을 맞으면서도 젊은 과학자들을 후원하여 엄밀하게 그와 같은 바탕에서 탄생한 핵폭탄이 일본에 떨어진 것이다. 역사란 늘 이렇게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흐르는 살아있는 교훈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원자폭탄 탄생의 바탕을 일구어낸 레오 실라르드가 우리가 타임머신으로 잘 알고 있는 공상과학 소설의 선구자인 영국의 SF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을 손에 들고 다닐 정도의 팬이었다. 이와 같은 레오 실라르드가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후원을 하였던 일본의 호시 하지메 회장 또한 삼십 년 후(三十年後) 라는 SF 소설을 발표하였다. 나아가 아들 호시 신이치(1926-1997)는 일본의 대표적인 SF 작가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에서 주관하는 일본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SF 문학상인 호시 신이치 상의 주인공이다.

 

▲ 나가사키 도시 전경 사진(長崎 全景) (출처 google)     © 이일영 칼럼니스트


 

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이후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의 참상이 온 세계에 전해졌다. 당시 1948년 일본의 이론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객원교수로 있었다. 70 나이의 아인슈타인이 유카와 히데키 사무실을 찾았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죄가 없는 사람들을 죽게 하였다며 눈물로 사죄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 해 1949년 일본 이론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일본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다.

 

이와 같은 인류사에 핵폭탄 사용이라는 역사를 빚어낸 아인슈타인(1879-1955)이 1955년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의 병리학자 토마스 스톨츠 하비(1912-2007)박사는 뉴저지 프린스턴 병원에서 세기의 천재 아인슈타인의 뇌를 가족의 허락 없이 분리하여 이를 연구하였던 사실도 역사가 남긴 이야기다.

 

이와 같은 역사에서 일본은 그릇된 역사를 전개한 당사국으로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투하된 참상의 아픔을 직접 경험한 사실에서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는 많은 피해를 입은 여러 나라들이 인류의 진정한 공존과 동행의 소중함을 앞세워 역사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소중한 뜻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일본 아베 정부의 행동들은 이와 같은 신성한 정신을 훼손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그릇된 자세를 키워가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에 대하여 인류 최초 핵폭탄이 투하된 74주년을 맞아 역사의 이름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릇된 역사왜곡과 세계 질서를 훼손하는 경제침략을 즉각 중지하고 인류 평화와 공존을 위한 바른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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