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판본 © 브레이크뉴스 |
어제(27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가 국민과 피해 당사자를 제외한 채 졸속하게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가 위헌이라며 피해자 할머니와 유족이 제기한 헌법 소원에 대하여 심판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당시 한일 양국 간 정부 합의는 일본 정부의 위안부 피해자 책임을 인정하여 우리 정부가 설립한 위안부 피해자 지원재단에 일본 정부가 10억엔(약 100억 원)을 출연하면서 이를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는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의 합의 내용 등이 포함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헌재는 이와 같은 졸속한 합의에 대하여 ‘피해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았으며, 합의 이후에 일본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이 아닌 정치적인 합의에 불과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 쉽게 해석하면 정부 간의 조약이 아닌 정치적인 외교 합의이기 때문에 위헌을 심판하는 헌법소원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해당 부처인 외교부가 이와 같은 합의가 법적 효력이 있는 조약이 아닌 외교적 합의에 불과하기 때문에 국가의 공권력 행사로 볼 수 없다는 주장과 맞닿은 것이다,
이와 같은 헌재의 결정에 따라 결국 위안부 문제가 일본의 국가 범죄라는 사실의 인정과 사죄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으로 표현된 극히 정치적인 졸속한 외교 합의에 대한 배경의 근원적인 조사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일본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하여 일본의 역사를 바르게 요약하여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물론 몇 권의 책으로도 정리될 수 없는 방대한 내용이지만, 오랫동안 헤아리며 매만져온 내용을 바탕으로 가장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동안 일본에 대한 많은 글을 써오면서 반복된 내용이 많지만, 먼저 일본과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주요한 임진왜란까지의 일본의 역사를 정리한다.
일본의 역사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이 두 권의 책에서 시작된다. 이와 같은 일본의 역사서는 40대 천황인 ‘덴무 천황’(天武天皇. 673~686) 시대에 편찬이 시작되어 ‘고사기’(古事記)는 43대 여성 천황인 겐메이 천황(元明天皇. 707~715) 시대에 완성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기존에 존재하였던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연대기와 계보를 기록한 ‘데이키’(帝記)와 주요한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규우지’(旧辞)를 바탕으로 편찬된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데이키’(帝記)와 ‘규우지’(旧辞)의 문헌은 오늘날 그 어떠한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일본이 자랑하는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제40대 ‘덴무천황’(天武天皇. 673-686)이 막내아들 ‘도네리친왕’(舍人親王 . 676~735)에게 편찬을 지시하여 일본의 역사에서 독신으로 즉위한 사례로는 첫 여성 천황인 44대 ‘겐쇼천황’(元正天皇. 680`748) 시대인 720년에 완성된 책이다, 이와 같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고사기’(古事記)와 같이 일본의 전설적인 문헌 ‘데이키’(帝記)와 ‘규우지’(旧辞)를 바탕으로 백제본기(百濟本記)와 같은 우리의 역사서와 ‘위서’(魏書)와 ‘진서’(晉書)에 이르는 중국 사서(史書) 기록을 병용하였다. 이를 일본은 객관적인 정사(正史)로 자랑하지만, 우리나라와 연관된 기록에서 유독 왜곡된 내용이 많은 일본의 가장 오랜 역사서이다.
이러한 역사서에 기록으로 기원전 7세기 무렵의 신화와 같은 일본의 제1대 천황 ‘진무 천황’(神武天皇. BC. 660~BC. 585)으로부터 이어온 일본의 역사는 43대 여성 천황인 ‘겐메이 천황’(元明天皇. 707~715)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일본의 역사서가 편찬된 시기가 바로 나라 시대(奈良 時代)이다. 이는 ‘겐메이 천황’이 710년 중국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을 모방하여 긴키(近畿) 지방의 나라(奈良)에 수도를 건설하여 794년까지 84년간 유지된 짧은 시대이다. 일본사에서 이와 같은 나라 시대(奈良 時代)는 중앙 귀족 세력들의 끝없는 권력투쟁으로 날이 새면 지역의 주인이 바뀌는 내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당나라와 백제 문화의 도입으로 불교문화의 융성과 함께 한자 문학의 발달이 이루어졌으며 황제의 칭호인 천황(天皇)이 처음 사용되었다.
이를 이어 제50대 천황인 ‘간무 천황’(桓武天皇. 737~806) 시대에 이르러 도읍을 나라(奈良)에서 교토(京都)에 헤이안쿄(平安京) 도성을 조성하여 794년 천도하면서 이른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를 열었다.
이와 같은 제50대 ‘간무 천황’(桓武天皇)은 49대 ‘고닌 천황’(光仁天皇. 709~782)과 부인 ‘다카노 니이가사’(高野 新笠)의 아들이다. 바로 어머니 ‘다카노 니이가사’(高野 新笠)가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501~523)의 직계 후손이다. 지난 2001년 12월 23일 일본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기사에는 68번째 생일을 맞은 ‘아키히토 일왕’(明仁, 1933~)의 기자회견 내용이 보도되었다. ‘아키히토 일왕’은 회견에서 ‘제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501~523)의 후손이라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나의 몸에는 한국인 피가 흐르는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던 역사적 배경이다.
이와 같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가 막을 내린 것은 1185년이었다. 무장 출신의 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가 정권을 거머쥐어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쇼군(將軍) 시대의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가 탄생한 것이다. 가마쿠라 막부는 1333년까지 약 15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와 같은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의 쇼군(將軍)을 대신하여 모든 권력을 집행하던 직책은 싯켄(執權)이었다. 1268년 17살의 나이로 싯켄(執權)에 오른 인물 ‘호조 도키무네’(北条 時宗 ,1251~1284)는 가마쿠라 막부 제8대 싯켄(執權)이다. 당시 막부와 주종 관계에 있었던 지도급 무사들이 고케닌(御家人)이었다.
이와 같은 ‘호조 도키무네’ 시대에 몽골제국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1294)이 1231년 고려를 침략하여 1232년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이어 몽고는 1270년 증국의 ‘남송’(南宋)을 정벌하여 1279년 대원대몽고국(大元大蒙古国) 즉 원나라의 역사를 열어 통일 중국을 통치하게 되면서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는 고려 제24대 왕 원종(元宗. 1219~1274)이 1260년 왕위에 오른 이후 몽고군과 결탁하여 1270년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林惟茂. 1248~1270년)를 제거하면서 100년 역사의 무신정권을 청산하면서 왕정시대를 열었던 우리의 역사이다.
당시 고려가 삼별초군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대규모의 몽고군이 입성한 개경에 환도를 결정한 것은 곧 항복이었다, 이에 삼별초(三別抄)는 이에 불복하여 끝까지 항거할 것을 주장하며 1270년 6월 1일 삼별초의 난(三別抄의 亂)을 일으켜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1271)과 그의 아들 왕환(王桓)을 옹립하여 전남 진도로 옮겨 저항하였다. 당시 해상전투 경험이 없는 몽고군의 취약점으로 고려와 몽고가 연합하여 여러 차례의 진도를 공략하였지만 실패한 이후 1271년 5월 대규모 연합 공략으로 삼별초가 제압당하면서 진도 섬 본거지 용장성의 쓸쓸한 모습만 역사에 남고 말았다.
이후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1294)은 고려를 전진기지로 일본을 정복하려는 오랜 전략을 드러내 1274년 고려군과 함께 일본 규슈의 하카타만(博多灣) 일대를 침공하였다. 당시 일본은 막부와 주종 관계에 있었던 지도급 무사 고케닌(御家人)들이 사력을 다하여 싸웠지만, 오늘날 후쿠오카현 ‘다자이후’(大宰府)의 방어선 미즈키(水城)까지 위태로웠다.
이와 같은 최후의 방어선 미즈키(水城)는 660년 백제가 멸망한 이후 일본으로 탈출한 백제 유민들이 라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664년 축성된 흙이 쓸려가지 않도록 갈대와 나뭇가지를 점토와 함께 배치하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지혜로운 축성법 부엽공법(浮葉工法)으로 쌓은 자연조건을 활용한 특수한 성이었다. 이와 같은 백제 유민이 쌓았던 최후의 방어선이 훗날 고려와 몽고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한 사실은 바로 역사이다. 이와 같은 난공불락의 방어선 미즈키 성의 방어로 월등한 전력을 가진 몽고군이 돌파구를 찾으려 하카타만(博多灣)으로 우회하여 침공 일보직전 밤사이 태풍이 강습하여 대부분의 함선이 침몰하면서 고려로 퇴각하였던 것이다.
이후 몽고의 ‘쿠빌라이 칸’은 1279년 원나라의 역사를 열어 통일 중국을 통치하게 되면서 1281년 원나라 군대와 고려군을 합한 14만 대군을 4,400여 척의 병선에 실어 1274년 뼈아픈 퇴각을 앞세워 일본 북 규슈에 2차 대 침략을 감행하였다. 당시 일본막부군은 2개월에 걸친 사투 속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몽고군의 일본 정벌이라는 역사의 깃발이 오르기 직전의 밤을 맞았다. 그날 밤 자정 무렵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큰 폭풍이 산천과 바다를 휩쓸어 몽고군은 두 눈 부릅뜨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2차례의 공격에도 꿈을 이루지 못한 몽고군은 더 이상 일본의 정벌을 감행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재해의 태풍 덕으로 살아난 일본은 이를 신의 바람 '가미카제(神風)'라 한다.
이후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는 몽고제국 원나라와의 전쟁으로 재정이 어려워져 결국 세력이 분열되었다. 이에 제 96대 천황에 오른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1288~1339)세력이 1333년 ‘가마쿠라막부’의 타도를 들고일어났다. 이를 토벌하러 나섰던 무장 ‘아시카가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가 막부의 근원지인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를 공격하는 역 반란이 일어났다. 이어 무장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 ?~1338)가 합세하여 가마쿠라(鎌倉)를 공격하여 호조우지(北條氏) 일족을 타도하면서 1333년까지 약 150여 년을 이어온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제 96대 천황에 오른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1288~1339)이 난국의 통제권을 확립하지 못하면서 1335년 가마쿠라 막부의 호조(北條)세력이 다시 가마쿠라 막부를 탈환하였다. 이에 무장 ‘아시카가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가 다시 이를 토벌한 후 1336년 1월 교토에 정주하던 ‘고다이고 천황’을 밀어내고 ‘고묘 천황’(光明天皇. 1322~1380)을 옹립하면서 자신이 쇼군이 되어 새로운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를 열었다. 이른바 북조(北朝) ‘무로마치’(室町)이다.
여기서 살펴지는 것은 이때 밀려난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1288~1339)이 세력을 규합하여 조정을 구성함으로써 이를 남조(南朝)로 부르게 되면서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는 이른바 남북조 시대(南北朝 時代)를 맞았던 것이다. 이후 1392년 남북조가 통합되어 이어간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는 1573년까지 237년간의 역사를 통하여 일본의 고유한 문화를 꽃피우는 바탕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깊은 의식으로 살펴 갈 일본의 역사가 있다. 이는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가진 시대는 ‘에도 시대’(江戶時代)이다. 이는 전설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에도(江戶)에 막부를 개창한 1603년부터 마지막 막을 내린 1867년까지의 2백65년 동안의 역사를 에도시대라 한다.
또한, 이와 같은 일본의 역사에서 분명하게 짚고 가야할 내용이 있다. 이는 ‘무로마치시대’가 막을 내린 1573년 이후 에도시대가 열린 1603년까지 27년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다, 이를 일본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라고 한다. 이는 전설의 무장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가 거처한 ‘아즈치 성’(安土城)과 일본 통일의 주역이며 임진왜란의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가 은거지로 사용하려 세웠던 ‘후시미성’(伏見城)을 ‘모모야마 성’(桃山城)으로 후세에 이름을 붙여 만든 명칭이다.
바로 이와 같은 틈새의 역사 27년간의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일본은 1592년 4월 14일 부산포 공격을 시작으로 조선의 강토를 침략하였다.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당시 왜군은 5월 7일 도성의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을 불태웠던 기록은 우리의 기록이 아닌 일본의 종군 승려였던 천행(天行)이 쓴 ‘서정일기’(西征日記)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이어 1593년 1월 평양성까지 공격하였다. 이어 명나라의 원군이 도착한 이후 1593년 4월부터 전쟁과 함께 지루한 화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오랜 화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일본은 1597년 8월 27일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정유년에 일어난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1598년 8월 18일 세상을 떠나면서 전의를 상실하여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12월 전쟁은 종식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헤아려야 할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은 27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침략의 역사를 자연의 정취로 장식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가 바로 일본인의 상징인 드러내지 않은 본심을 뜻하는 ‘혼네’(本音)의 결정판과 같은 역사라는 사실이다. 일본 최대의 호수 비와호(琵琶湖)가 내려다 뵈는 시가현(滋賀県) 아즈치 산 정상에 세워진 ‘아즈치 성’(安土城)은 오늘날 그 흔적만이 존재한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 출병 이후 교토(京都)의 모모야마(桃山) 구릉에 세워진 성(城)은 그 이름이 본디 ‘후시미성’(伏見城)이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은거의 주택으로 세웠으나 그의 사후 몇 번의 소실로 새롭게 세워지면서 오늘날에는 본래의 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하는 사실은 겐로쿠(元禄) 연호를 사용하였던 1688 년부터 1704년까지의 겐로쿠 시대(元禄時代)에 ‘후시미성’(伏見城)과 그 인근에 복숭아(桃) 나무가 많았던 사실에서 ‘모모야마 성’(桃山城)이라는 별칭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바로 1573년 이후 에도시대(江戶時代)가 열린 1603년 까지를 구분하는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라는 명칭이 이와 같은 이후에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로 수식된 27년간의 일본 역사 속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무참하게 짓밟힌 조선의 피와 눈물이 맺혀 있음을 우리 후손들은 정녕 깊게 새겨야 할 것이다.
![]() ▲ 安土城図/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초상/ 모모야마 구룽(桃山 丘陵)/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의 초상/ © 브레이크뉴스 |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