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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186)-중국 소녀의 서법이 일깨운 문예의 역사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9/12/29 [11:23]

 

▲ (좌로부터) 왕소요(王笑瑜) 作 양닝시(杨凝式-양응식)의 노홍초당십지도발(卢鸿草堂十志图跋)/ 미불(米芾)의 담묵추산시첩(淡墨秋山诗帖)/ 소동파(蘇東坡)의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     © 브레이크뉴스

 

중국 노신 대학 이광군 교수님이 예쁜 소녀 제자를 데려와 인사를 나누었다. 중국 노신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국화과와 서법을 전공한 왕소요(王笑瑜) 양이었다. 우리나라 성균관 대학교 유학대학원(儒學大學院)의 동양미학 전공 박사과정 면접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한자문화권의 바탕인 서예의 이론과 실기를 통한 서예사와 서예 미학 그리고 서예 감상론과 서예 창작론에 이어 서예비평론을 한국에서 공부하게 될 왕소요 양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서예의 종주국인 위상에 걸맞게 실기는 물론 연관된 여러 학문을 공부한 재원답게 각 작품마다 순수한 필의가 쉽게 느껴졌다. 예쁘고 여린 소녀의 모습과 달리 왕소요 양의 작품은 필획의 힘과 예술성이 남다르다. 이에 유심하게 작품을 살펴보았다. 먼저 작품의 시작이 매우 남달랐다. 이는 서예의 시작인 붓을 대는 기필(起筆)의 흔적을 감추는 감성이 뛰어난 까닭이었다.

 

보편적으로 붓을 거슬러 대는 기법인 역입(逆入)으로 붓끝을 감추기 마련이다. 허나 여린 소녀 왕소요 양의 작품은 역입(逆入)이 아닌 운필의 절묘함으로 붓끝을 감추는 오랜 작품 활동을 통하여 체득한 서예가들이 가져야 하는 정신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작품들이 서법의 근본과 운필의 바탕을 헤아리는 의미로 선대 명현의 작품을 체본(體本)으로 삼았지만, 어린 나이에 오랫동안 붓을 잡아온 느낌과 뛰어난 감성이 감지되었다. 이와 같은 선과 획의 기운이 서예의 바탕인 비례의 미학을 관통하고 있는 이국에서 온 소녀의 작품이 많은 것을 일깨우게 하였다.

 

왕소요 양의 작품 중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있었다. 중국 서예의 역사에서 당나라와 송나라의 징검다리와 같은 서예가 양닝시(杨凝式-양응식. 873-954)의 서예 작품 '노홍초당십지도발(卢鸿草堂十志图跋)을' 체본으로 한 작품이었다. 이 원전의 작품은 대만의 고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서 잠시 짚고 가는 내용은 우리나라에서는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서예가 '양닝시'에 대하여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양닝시 작가는 당나라 초기의 전설적인 서예가 '구양순(歐陽詢)'과 중기의 '안진경(顔眞卿)'에 이어 북송의 시와 서를 관통한 '소동파(蘇東坡)'와 '황정견(黃庭堅)'을 잇는 징검다리와 같은 작가이다. 이에 중국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법의 작가이다. 이는 서법이라는 관점에서 분명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와 같은 서법을 우리나라에서는 서예(書藝)로 명칭하며 일본은 서도(書道)라 하는 사실에서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근원적인 바탕인 서법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우리의 역사적인 서예가 이거나 문헌에서도 이를 찾기 어려운 사실은 분명하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어 왕소요(王笑瑜) 양은 북송 당대의 서화가 미불(米芾. 1051-1107)의 작품 '담묵추산시첩(淡墨秋山诗帖)'과 북송 당대의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7-1101)가 황주에 유배되었을 때 한식날 내리는 비의 감성을 노래한 시 '한식우(寒食雨)'중 일부를 썼다. 이는 소동파 자신이 쓴 서예사의 보물로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서첩이 대만 고궁박물관 소장되어 필자는 이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은 소동파의 서예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은 많은 역사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소동파(蘇東坡)의 본명은 소식(蘇軾:1036-1101)이다.

 

중국 북송 제6대 황제 신종(神宗.1048-1085)이 즉위하여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하면서 이에 반대한 소동파는 1079년 그를 시기한 일파에 의하여 시문에 담긴 구절들을 문제 삼은 필화 사건 ‘오대시안’(烏臺詩案)을 겪으면서 황주(黃州)에 유배되었다. 이와 같은 소동파는 황저우에서 1071년부터 1074년까지 관직을 지내며 현지 백성들과의 친화적인 소통으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소동파가 황주에 유배되면서 유배지 동쪽 언덕을 동파(東坡)라고 이름 지어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면서 동파거사(東坡居士)라는 별칭이 생겨나 소동파(蘇東坡)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동파는 유배에서 풀려난 후 1089년부터 1091년까지 두 번째로 항저우(杭州) 태수(지주-知州)로 부임하였다. 이와 같은 소동파가 항저우 백성들과 소통하면서 오늘날 항저우를 대표하는 돼지고기 음식인 ‘둥포러우(동파육-東坡肉)’가 생겨난 사실도 역사가 품은 이야기다. 이는 본디 소동파가 쉬저우(서주-徐州)의 태수(지주-知州) 시절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대비한 지주의 지혜에 감사한 백성들이 보은의 뜻으로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바쳐 이를 미식가인 소동파가 빨갛게 구운 고기 홍사러우(홍소육-红烧肉)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와 같은 감사한 마음을 되돌려주는 고기라는 뜻을 가진 훼이쩡러우(회증육-回赠肉)로도 불려 지면서 훗날 ‘둥포러우(동파육-東坡肉)’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짚고 가는 내용은 이와 같은 동파육이 오늘날 후베이(湖北)성 황저우(黃州)와 함께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함께 특산물이 된 배경은 두 도시가 모두 소동파가 재임하였던 도시라는 점에서 그 유래를 분명하게 확인하게 되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소동파(蘇東坡. 1037-1101)는 북송 당대의 최고의 시인이었으며 북송 4대가로 평가받는 서예가이며 묵죽으로 대표되는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당대의 시서화 삼절이었다. 그가 황주 유배 시절 1082년에 노래한 시 '한식우(寒食雨)’를 직접 쓴 친필 서예작품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은 중국 동진(東晉)의 전설적인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난정서(蘭亭序)’와 당나라 시대의 중국 서법의 완성자 ‘안진경(顔眞卿, 709-785)’의 ‘제질고(祭侄稿)’와 함께 ‘천하제삼행서(天下第三行書)로 평가받는 역사의 보물이다. 이 시에 담긴 소동파의 감성은 물론 특히 서법의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북송 사대가 '황정견(黃庭堅)'은 이 시첩의 발문에서 소동파가 다시 쓴다면 이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으며 명나라의 대가 동기창(董其昌)은 소동파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이와 같은 소동파의 '황주한식시첩'은 역대 왕들의 최고의 애장품으로 소장되어 청나라 황실에까지 이어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중함만큼 많은 수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황주한식시첩'은 소동파가 북송 사대가 황정견(黃庭堅)의 장인과 절친하였던 장씨(張氏)에게 직접 주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황정견(黃庭堅)의 발문에 이와 같은 내용은 적시되지 않았지만,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황정견이 발문한 배경에서 이와 같은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후 남송 시대에 주인이 바뀌면서 원나라 시대에 황실 소장품이 되면서 명나라 말기까지 황실에 소장되었다.

 

이와 같은 황실 소장품이 명나라 말기에 유출되어 유명한 수집가의 손들을 두루 거치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 당대의 전설적인 만주족 출신의 귀족 ‘나란청더(납란성덕-納蘭成德. 1655-1685)’가 소장하였다. 이와 같은 '나란청더'는 중국 청 왕조의 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 1654-1722)와 절친한 관계로 시와 서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전설적인 수집가로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소동파의 '황주한식시첩'은 1750년 건륭 황제가 손수 글을 쓰고 인장하여 청나라 황실의 원명원(圓明園)에 보관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황주한식시첩'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이 일어나면서 1839년 시작된 1차 아편전쟁까지 무사하였다. 그러나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 막바지이던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하여 베이징 서쪽의 황실 별궁 원명원(圓明園)이 불타고 말았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원명원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방화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낭만파 시인 빅토르 위고(Victor Hug. 1802-1885)는 문화재의 약탈과 방화는 인류사의 범죄임을 선언하며 이와 같은 만행을 강하게 규탄하면서 만행은 중지되었지만, 이미 대부분의 문화재는 약탈되었으며 소실되었다.

 

이와 같은 난리 속에 역사적인 '황주한식시첩'은 용케도 유출되어 다시 민간인의 손에 나돌았다. 당시 광주(廣州)의 풍전운(馮展雲)이라는 민간인이 소유한 '황주한식시첩'은 그의 집에 화재가 일어나면서 서권(두루마리) 하단이 불에 그을리는 일촉즉발의 긴박한 상황에서 살아남았다. 이후 그의 사후에 민간인 성백희(盛伯羲)와 완안박손(完顏樸孫)을 거쳐 1917년 북경서화전람회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후 다음 해 1918년 다시 안운백(顏韻伯)으로 소유자가 바뀌면서 1922년 일본인 수집가 기쿠치 세이도(菊池惺堂)에게 황주한식시첩이 팔리고 말았다. 이어 다음 해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도쿄가 불타면서 '황주한식시첩'이 불타기 직전 목숨을 걸고 이를 건져낸 일화는 유명하다.

 

이와 같은 풍운의 역사를 가진 '황주한식시첩'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중국 국민정부 외교부장으로 중ㆍ소조약을 체결하고 1948년 제3회 유엔 총회 중국 수석대표를 역임하였던 '왕스제(왕세걸-王世杰. 1891-1981)'가 첩보영화와 같은 비밀작전으로 일본에 건너가 세기의 문화재 ‘황주한식시첩’을 구입한 이야기는 바로 역사이다. 훗날 그의 후손이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하면서 격동하는 역사를 품어온 문화재는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안착하여 전시되고 있다.

 

▲ (좌로부터) 중국 노신대학 이광군 교수와 왕소요(王笑瑜) 양 / 왕소요(王笑瑜) 作 서예 작품과 전각 작품     ©브레이크뉴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주말 이광군 교수님이 데려온 가녀린 소녀 왕소요(王笑瑜) 양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중국의 정통한 교육의 깊이를 헤아리며 일깨우는 내용이 많았다. 인연의 소중함을 삼키며 역사에 담긴 이야기가 밀려오면서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되는 어린 소녀 왕소요의 뛰어난 감성과 가량이 주말 오후를 붙들어 글을 쓰게 하였다. 왕소요 양이 한국에서 박사과정 공부 중에 필자의 일천한 지식을 늘려 서예사의 서법을 관통하는 정통한 전시를 꼭 열고 싶다.  이일영(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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