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좌로부터) 독도/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 1796~1866)/ 윌리엄 조지프 시볼드(William Joseph Sebald, 1901년~1980) 출처: google © 브레이크뉴스 |
일본은 1185년 ‘헤이안 시대’(平安時代)가 막을 내리고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쇼군(將軍) 시대의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를 탄생시켜 1333년까지 150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어 오랜 진통 끝에 1392년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가 탄생하여 1573년까지 237년간의 역사를 이어왔다. 이후 무장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의 양립 속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한 1603년까지 27년의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에 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침탈하였다. 이와 같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면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집권하여 에도(江戶)에 막부를 세운 1603년부터 막을 내린 1867년까지의 2백65년 동안의 역사가 에도시대이다.
이와 같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시대에 일본은 일명 사코쿠 정책 기록되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통하여 강력한 통치를 추구하였지만 밀려드는 개화의 물결에 서양 나라들과 무력으로 저항하다가 국내의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이어졌다, 마침내 일본 최후의 막부 에도막부는 모든 통치를 천황에게 복귀시키는 왕정 복고령을 1868년 10월 선언하였다, 바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다.
이와 같은 일본의 역사에서 14세기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에서부터 15세기 기간에 ‘와코’라고 부르는 해적 왜구(倭寇)의 활동이 절정을 이루었다, 이는 세계적으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 그리고 영국과 네덜란드 등의 대항해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와 같은 해적 왜구(倭寇)의 활동은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부터 동남아시아 각 지역에서 밀무역과 함께 해적 활동을 해왔다, 당시 이들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 상인들의 접촉으로 화약총기류에서부터 다양한 새로운 문물을 밀무역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특히 화약 총기류의 중요성을 인식한 막부 및 영주 세력에 의하여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 상인과의 무역이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에스파냐(스페인)와 포르투갈의 문물을 뜻하는 말이 ‘난반’(南蛮)이다. 물론 이와 같은 ‘난반’(南蛮)은 중앙아시아 초원 지역과 동아시아 일부 지역의 뜻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유럽과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문물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후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으로 네덜란드의 다양한 학문을 이르는 ‘란가쿠’(蘭学)이다. 이는 무로마치 시대의 에스파냐(스페인)와 포르투갈의 문물을 뜻하는 ‘난반’의 접촉 이후 나가사키항을 통하여 네덜란드와 제한적인 무역을 하게 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문물인 ‘난반’과는 차원이 다른 더욱 발전된 유럽 문화를 실감하게 된다.
이처럼 네덜란드를 통하여 도입된 어학·천문학·의학·물리학 등에 이르는 서양 학문을 네덜란드학이라는 ‘란가쿠(蘭學)’로 불렀다. 일본의 역사에서 ‘란가쿠(蘭學)’가 가지는 의미는 오늘의 일본이 존재하게 된 선구적인 바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 이와 같은 네덜란드의 ‘란가쿠’에 이어 물밀 듯이 밀려든 독일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와 미국의 문물을 ‘요가쿠(洋學)’라 한다.
이와 같은 근대 일본의 바탕을 제공한 네덜란드 학문 ‘란가쿠’는 일본 열도의 꿈을 가진 젊은이들의 야망의 학문이었다. 이와 같은 네덜란드 학문 ‘란가쿠’를 가르치는 사숙 형태의 학원은 당시 꿈의 학원이었다. 당시 이러한 꿈의 학문 ‘란가쿠’를 가르치던 대표적인 인물 중에 독일 출신 의사로 네덜란드 정부를 위하여 일하였던 ‘필립 프란츠 폰 시볼트’(P. F. B. von Siebold. 1796~1866)가 있었다. 의사 ‘시볼트’는 1823년 일본 나가사키(長崎) 시내를 흐르는 천의 하류에 부채꼴로 만든 데지마 섬(出島)에 설립된 네덜란드 무역기지 상관(商館)에 의료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그는 1824년 나가사키에 병원과 나루다키 쥬쿠(鳴滝塾)라는 사숙 형태의 학원을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의사 ‘시볼트’에게 공부한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 최초의 종두법을 시행한 일본 현대 의학의 선구자 ‘이토 겐보쿠’(伊東 玄朴)이다.
당시 일본에 이와 같은 개방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세계 여러 나라는 일본의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하여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하였다. 이에 가장 필요한 것이 정밀한 지도였던 만큼 일본은 엄격한 국법으로 지도를 제작하였으며 관리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인 1826년 9월 일본열도를 발칵 뒤집어놓은 ‘시볼트’의사의 지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시볼트’의사지도사건은 시볼트가 본국에 일시 귀국하면서 선적한 화물선이 좌초하여 숨겨놓은 일본 지도가 발각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가 오랫동안 헤아려온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의 제보에 의하여 지도가 발견되었으며 이후 가택 연금 상태에 있던 시볼트 의사를 1829년 10월 일본에서 추방한 것으로 살펴진다.
이에 대하여 요약하여 보면 당시 시볼트 의사가 소지한 지도는 일본이 1800년부터 1821년까지 많은 자원을 들여 일본 전역의 실제 측량으로 이루어진 그 정확도가 놀라운 최신 지도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였다. 당시 관련자들에 대한 실로 가혹한 신문이 시작되어 많은 일본인이 죽음에 이르는 처벌을 받았다. 당시 지도를 넘겨준 인물은 일본의 지도 제작 역사에서 가장 주요한 인물인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 1764~1804)의 아들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 景保. 1785~1829)였다. 당시 그는 참형 당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 지도 제작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특히 우리의 영토인 독도와 연관된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일본의 지도는 측량술에 의하여 정밀하게 제작된 지도로 에도막부의 명령으로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1807년부터 1809년까지 사할린 등 변경지역을 조사하여 제작한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가 있다. 이 지도에는 분명하게 우리의 독도가 우산국으로 되어있고 동해는 조선해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일본 정부의 주관으로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1807년 제작에 착수하여 1810년 제작한 세계지도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에도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하고 있다.
이후 시볼트 의사 지도 사건에 연관된 문제의 지도는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였다. 이 지도는 ‘이노도’(伊能図)로 약칭하여 부르는 지도로 물론 이 지도에도 독도와 동해의 일본 영토 표시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 지도는 1800년 에도막부의 특별지시로 일본 모든 지역의 측량 사업이 시작되어 1821년 제작된 실측에 의한 가장 정밀한 지도이다. 앞서 언급한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1809년 제작한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와 1810년 제작한 세계지도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의 일본 지리도가 바로 ‘대일본연해여지전도’의 제작 과정에서 제작된 지도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와 같은 일본의 현대 지도 제작에 대한 이야기를 엄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대일본연해여지전도’의 제작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 천문학과 측량술의 선구적인 인물인 ‘다카하시 요시토키’와 그의 제자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1745~1818)로부터 시작된다.
‘다카하시 요시토키’는 일본의 선구적인 천문학자 ‘아사다 고류우’(麻田 剛立. 1734~1799)에게 천문학과 수학을 공부하였다. 스승 ‘아사다 고류우’는 1755년 겐레키(げんれき)로 약칭하는 일본의 태양 태음력 ‘호우리야쿠력’(宝暦暦)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는 중국 청나라에서 사용하는 태음력에 태양력의 원리를 적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계산한 시헌력(時憲曆)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역법이 서양 신부 탕약망(湯若望)등에 의하여 편찬된 사실에서 일본 막부는 기독교적인 역법을 배제한 달력의 제작을 위하여 천체 운행과 역법을 연구하는 천문방(天文方)의 책임자로 ‘다카하시 요시토키’를 임명하였다.
이후 그는 음력을 기준으로 하면서 태양의 움직임에 맞추어 윤달을 넣어 세월을 정하는 한층 정확도가 높아진 ‘간세이력’(寛政暦)을 1798년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간세이력에서도 윤달에 대한 문제가 생겨나 1844년 그의 아들 ‘시브카와 카게스케’(渋川景佑. 1787~1856)에 의하여 서양 천문학을 도입한 정밀한 태음 태양력인 ‘천보력’(天保暦)이 제작되었다. 이후 일본은 1872년 태양력을 지정하여 ‘천보력’(天保暦)은 음력으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다카하시 요시토키’에게 50살의 나이로 천문학을 배우러 찾아온 전설적인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1745~1818)이다. 그는 양조 사업에 많은 부를 축적한 후 취미로 개인 관측소를 운영하면서 천문학을 연구하던 중 1795년 50세의 나이로 19살이나 어린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제자가 되어 천문방에 입문하여 천문학과 측량술을 공부하였다. 이후 1800년에도 막부의 특명으로 일본 전국의 실제 측량 작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과정 중에 ‘다카하시 요시토키’가 1804년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1745~1818)가 천문방의 책임자가 되어 스승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아들 ‘다카하시 가게야스’와 ‘시브카와 카게스케’ 형제를 천문방에 등용하여 실측 작업을 이어갔다. 당시 ‘이노 다다타카’는 측량 지점에 기둥(pole)을 꽂아 두고 다음 지점에 기둥을 꽂아 그 거리와 각도를 기록하는 선구적인 도선법(導線法) 측량술을 사용하였다.
스승 ‘다카하시 요시토키’가 세상을 떠난 1804년 네 차례의 일본전도 실측을 마친 ‘이노 다다타카’는 그간의 작업을 정리한 ‘일본동양연해지도’(日本東半部沿海地図)를 최초로 제작하여 에도막부에 이를 알렸다. 이후 중국 근해와 조선의 근해에 이르기까지 총 10차례의 측량 작업이 이루어진 때는 1816년이었다. 이와 같은 정밀한 실제 측량을 바탕으로 1817년 지도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해 1818년 ‘이노 다다타카’가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스승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아들 ‘다카하시 가게야스’와 ‘시브카와 카게스케’ 형제가 지도 제작에 전념하여 1821년 대망의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가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대일본연해여지전도’는 일본 열도의 해안선과 내륙의 하천은 물론 사찰에서 동네에 이르기까지 실로 상상키 어려운 상세한 지도였다. 축척별로 각 세 종류로 만들어진 이 지도가 외국에 넘어가서는 안 될 너무나 중요한 기밀로 분류되어 에도막부는 이 지도를 극비리에 보관하였다. 바로 그 책임자가 ‘다카하시 가게야스’였다. 이러한 지도를 ‘시볼트의사’에게 복제를 허락한 사실이 1826년 시볼트의사 지도 사건으로 발각되어 1829년 참형에 처해졌으며 ‘시볼트 의사’도 추방되었던 것이다.
![]() ▲ (좌)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 (우)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1745~1818)/ 출처: google © 브레이크뉴스 |
이러한 ‘시볼트의사’가 네덜란드에 돌아가 유럽에서 그가 소장한 지도를 바탕으로 새로운 지도가 제작되었을 때 우리의 영토 독도와 영해의 동해 표기가 이루어진 사실을 필자는 분명하게 살펴왔다. 여기서 이와 같은 네덜란드 시볼트 의사와 달리 오늘날 독도 분쟁의 실마리를 남긴 장본인으로 시볼드라는 유사한 이름을 가진 또 한 사람의 인물이 있었음을 살펴야 한다. 그는 미국의 군인이며 외교관이었던 윌리엄 조지프 시볼드(W. J. Sebald, 1901-1980)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시볼드는 1922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에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1927년 일본계 영국인 여성 화가와 결혼하였다. 이후 1933년 일본 고베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던 그는 1942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에 무관으로 다시 근무한 이후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 대사가 되어 1946년까지 근무한 이후 1946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 집정 대사가 되어 6년간 일본 히로히토 쇼와 천황 대신 일본의 섭정을 하였던 인물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조지프 시볼드가 친일적인 활동을 펴면서 1949년 미국 정부에 우리의 영토 독도를 일본의 주장을 토대로 귀속시키는 건의 문서를 보냈다. 이에 미 국무부는 이를 바탕으로 독도를 일본령으로 포함하는 초안에 이르렀으나 영국과 호주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 문제는 현안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극히 친일적인 미국의 시볼드의 주장을 일본은 독도 영유권 문제에 가장 주요한 사실로 연관시키면서 오늘날 자국의 독도라는 망언을 교과서에 실어 교육하는 그릇된 역사의 터무니없는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의 일개 갤러리 관장도 일본이 두려워하는 역사 속의 진실한 독도 이야기를 분명하게 헤아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필자: 이일영(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artwww@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