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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191) -가슴에 품은 전시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0/01/04 [11:05]

 

 

▲ (좌로부터) 사빈 바이스 作 귀여운 아이(Cute Kid)/ 자코메티(Giacometti) (Collection particulière, Paris)     © 브레이크뉴스

 


일주일간 틈틈이 쓰다 보니 한 권의 책을 썼다. 인간 평등을 지켜본 흑백의 눈 사빈바이스(Sabine Weiss)라는 부제를 가진 (가슴에 품은 전시)이다. 신세계 미술관 지명문 전 관장이 요청한 사빈 바이스 사진작가의 자료를 써가다 보니 한권의 책이 되었다. 이를 요약하여 올리는 글이다.

 

지난 2016년 파리 16구 한적한 도로변에 자리한 따뜻하게 낡은 건물을 찾아가 당시 93세의 여류 사진작가 ‘사빈 바이스’(Sabine weiss. 1924~)를 만났다. 1층 응접실 겸 거실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고령의 작가를 위한 1인용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었던 작업실을 겸한 2층 공간 구석구석에 작가의 세세한 손길이 닿아있었다.

필자가 사진작가 ‘사빈 바이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3년이었다. 외국 잡지에 첼로의 영혼으로 평가받는 음악가 ‘파블로 카살스’(Pablo Casals. 1876~1973)의 10주년 추모 특집에서 ‘사빈 바이스’의 흑백 사진에 담긴 ‘카살스’의 깊은 눈빛을 인상 깊게 가슴에 담았다. 이후 ‘사빈 바이스’의 휴머니티가 녹아내리는 작품을 살펴보며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실제로 작가를 만난 것이다.


‘사빈 바이스’작가는 1924년 프랑스 국경 지역 제네바 호수 남쪽에 위치한 스위스 ‘징골프’(Saint Gingolph)에서 태어나 제네바로 이주하였다. 물고기 비늘을 재료로 인공진주를 만들던 화학자 아버지 슬하에서 꿈 많은 소녀로 성장하였던 그는 1932년 8살 나이에 오랫동안 모아온 용돈으로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이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당시 제네바에서 활동하던 유명 사진작가 ‘프레데릭 보소나스’(Frédéric Boissonnas. 1858-1946)가 운영하던 사진 학교를 겸한 스튜디오에서 공부하였다.


스승인 ‘프레데릭 보소나스’는 아버지가 스위스에 최초의 사진 워크숍을 겸한 스튜디오를 열었던 가업을 이어받은 작가였다. 그는 그리스 신화의 원천인 올림포스 산을 직접 원정하여 신화와 연관된 작품에서부터 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여 그리스 사진의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받았다.
 

이와 같은 ‘프레데릭 보소나스’에게 사진의 기초를 공부한 ‘사빈 바이스’는 1946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와 독일 출신의 사진작가 ‘윌리 메이왈드’(Willy Maywald. 1907-1985)의 스튜디오 조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빈 바이스’ 의 작품 세계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리에서의 스승 ‘윌리 메이왈드’와 ‘윌리 메이왈드’의 스승이었던 ‘해리 미어슨’(Harry Meerson. 1910~1991)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윌리 메이왈드’의 스승 ‘해리 미어슨’은 독일의 영화사에서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1929년 파리로 이주하여 광고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스튜디오를 열었다. 이후 ‘해리 미어슨’은 1937년 미국 상류사회의 패션을 선도하던 미국 최대의 여성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의 전설적인 여성 편집장 ’카멜 스노우‘(Carmel Snow. 1887-1961)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카멜 스노우‘가 파리 패션쇼에서 ‘해리 미어슨’의 감각적인 사진을 눈여겨보았던 까닭이다.
 

패션계의 전설적인 선구의 여성 ’카멜 스노우’의 사진에 대한 감각은 실로 혁신적이라 할 만큼 뛰어났다. 그와 함께 일하였던 사진작가들을 살펴보면 룩셈부르크 출신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장 스타이컨’(Edward Jean Steichen. 1879-1973)에서부터 헝가리 출신의 사진작가 ‘마틴 문카치’(Martin Munkácsi. 1896-1963)와 러시아 출신 사진작가이며 잡지 디자인의 예술적 혁명을 가져온 ‘알렉세이 브로도비치’(Alexey Brodovitch. 1898-1971)와 전설적인 미국의 패션 인물 사진작가 ‘리처드 애버든’(Richard Avedon. 1923-2004)에 이르기까지 패션과 인물사진의 역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작가들과 함께 패션 예술의 선구적 지평을 열었던 인물이다.


‘해리 미어슨’의 조수로 일하였던 ‘윌리 메이왈드’는 스승이 미국으로 떠나자 스위스로 건너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1946년 스승 ‘해리 미어슨’이 파리에 돌아오자 그도 파리로 돌아와 스승과 제자는 동시에 스튜디오를 열었다. 이때 22살 나이의 ‘사빈 바이스’가 ‘윌리 메이왈드’의 조교가 되었던 것이다. ‘사빈 바이스’는 당시 ‘윌리 메이왈드’의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광고사진과 초상사진 그리고 패션 사진이 전문이었던’ ‘윌리 메이왈드’의 감각적인 기법을 폭넓게 공부하였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패션과 초상사진에서 조명을 중시한 ‘윌리 메이왈드’의 감성을 일깨워 그의 작품에서 자연의 빛을 중시한 바탕이 되었다.
 

당시 ‘윌리 메이왈드’는 독특한 조명의 활용을 통한 뛰어난 감성의 흑백 사진작가로 알려지면서 많은 패션 작품을 촬영하였다. 특히 스튜디오가 아닌 파리의 일상적인 거리를 배경으로 패션모델을 촬영한 최초의 작가로 패션작품의 메시지를 현장감 있게 담아내면서 유럽은 물론 세계적인 작가로 평가받았다. 이에 당시 유명 인사들의 사진 요청이 줄을 이었다.


당시 이와 같은 ‘윌리 메이왈드’와 소통하였던 인물들이 먼저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 1905~1957)이다. ‘디오르’는 디자이너로 활동하기 전에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컬렉터이며 미술상이었던 친구 ‘쟈크 파올로 봉주앙’(Jacques Paul Bonjean. 1899-1990)과 함께 1928년 파리에 갤러리를 열었다. 당시 ‘디오르’가 1934년 갤러리 문을 닫을 때까지 함께 소통하였던 작가들은 ‘피카소’에서부터 ‘마티스’, ‘브라크’. ‘살바도르 달리’, ‘맥스 제이콥’, ‘마르셀 뒤샹’, ‘르네 마그리트’, ‘알베르토 자코메티’, 그리고 ‘미로’와 같은 초현실주의에 기반을 둔 선구적인 작가들이었다. 이와 같은 많은 전시회를 열었던 ‘디오르’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갤러리 문을 닫았다.
 

이때 ‘디오르’는 그가 소장하였던 미술작품을 친구들이 하나씩 사주는 도움으로 디자이너의 꿈을 키웠다. 훗날 이와 같은 ‘디오르’의 어려운 상황을 헤아려 작품을 사주었던 친구들은 구매한 작품의 화가들이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경제적 이익을 얻었던 사실 또한 역사 속에 담긴 이야기다. ‘디오르’는 2차 대전이 종전된 이후 1946년 파리에 의상실을 열어 1947년 개최한 ‘디오르 메종 컬렉션’(Dior Maison collection)이 큰 성황을 가져오면서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지평을 열었다. 이 시기에 ‘디오르’의 패션작품과 모델을 작업한 사진작가가 바로 ‘윌리 메이왈드’였으며 사빈 바이스가 조수로 일하였다.
 

당시 ‘디오르’와 함께 사진작가 ‘윌리 메이왈드’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패션계를 선도하던 유명 디자이너들의 사진 작업을 도맡았다. 그의 사진 작품은 ‘보그’(Vogue)와 같은 주요한 잡지에 표지 작품으로 게재되었다. 이에 당대의 권력자에서부터 실업가는 물론 각 분야의 주요한 스타들의 사진 요청이 줄을 이었다.
 

이에 너무나 많은 요청이 밀려들면서 ‘윌리 메이왈드’는 자신의 조수 젊은 여성 사진작가 ‘사빈 바이스’를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등장한 젊은 여류 사진작가 사빈 바이스의 감성적인 사진에 대한 소문이 퍼져 큰 주목을 받았다. 이에 ‘사빈 바이스’는 1949년 ‘디오르 메종 컬렉션’에 참가하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이 무렵 ‘사빈 바이스’는 이탈리아 여행길에서 평생의 동반자 미국 출신의 화가 ‘휴고 바이스’(Hugh Weiss. 1925-2007)를 만나 1950년 결혼하여 독립된 스튜디오를 열었다.
 

‘사빈 바이스’의 남편 화가 ‘휴고 바이스’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파리로 건너가 프랑스 여성화가 ‘주느비에브 아스’(Geneviève Asse. 1923-)의 주선으로 ‘30세 이하 살롱전’에 참여하면서 프랑스에서 활동하였다. ‘주느비에브 아스’는 2003년 그녀의 나이 90세에 퐁피두센터 초대전이 열렸을 때 ‘푸른빛의 영혼을 추구한 작가’라는 부제가 의미하듯 평생 푸른빛을 통한 역사의 정신성을 헤아려온 작가이다.
 

1950년 독립된 스튜디오를 열었던 ‘사빈 바이스’는 특유의 감성적인 사진 작품으로 유명해지면서 스승 ‘윌리 메이왈드’가 자신의 주요한 고객들의 사진을 사빈 바이스가 작업하도록 더욱 주선하여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와 수많은 유명 인사들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살펴보면 기존의 가사 대신에 즉흥적인 언어로 노래하는 ‘스캣’(Scat)의 끝판 왕으로 평가받는 미국 출신 재즈 여왕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 1917-1996)에서부터 프랑스 예술원 사상 최초의 여성 정회원이 되었던 전설의 영화배우 ‘잔느 모로’(Jeanne Moreau. 1928-2017)와 ‘순진한 악녀’ ‘귀여운 말괄량이’로 세상을 뒤흔든 프랑스 영화배우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 1934-)와 당대의 유명 스타들이었다. 이와 같은 유명 스타의 사진이 ‘사빈 바이스’의 감성으로 탄생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많은 유명 인사들의 초상 사진을 촬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빈 바이스’의 당대의 국왕에서부터 빈민가의 어린 소녀와 소년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양한 계층의 인물 사진을 살펴보면 특히 문학과 미술과 음악에 이르는 예술가들 사진이 많다. 이는 ‘사빈 바이스’가 음악과 미술에 깊은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과 맞닿은 내용이다. 이와 같은 대표적인 인물들을 정리해보면 먼저 패션계의 주역인 아름다움의 등대지기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 1883-1971)과 유행의 나침반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 1905-1957) 그리고 우주 시대의 패션을 알린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 1922-)과 같은 세기의 패션 디자이너의 인물 사진이 ’사빈 바이스‘의 작품으로 남았다.


이어 자유의 울음으로 날아간 첼로의 영혼 ‘파블로 카살스’(Pablo Casals. 1876-1973)와 영원한 빛을 그려낸 ‘불새’의 음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 그리고 영국 음악의 자존심으로 평가받는 ‘벤저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과 보사노바 음악의 전령 ‘스탠 게츠’(Stan Getz. 1927-1991)에 이르는 음악가들이다. 또한, 프랑스 국민 시인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와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 제럴드’(Scott Key Fitzgerald. 1896-1940), 그리고 감성의 종결자 '브람스를 아세요'의 여류 소설가 '프랑수와 사강'(Francoise Sagan. 1935-2004)과 같은 문학가들이 살펴진다.

 

이어 ‘튀비슴’의 미학을 낳은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1881-1955)에서부터 영혼의 실체를 담아낸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와 팝아트의 빛을 밝힌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 그리고 그림으로 시를 쓴 화가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예술가의 인물사진이 ‘사빈 바이스’의 감성으로 탄생하였다.


이러한 ‘사빈 바이스’의 사진 작품에 담긴 예술적 감성이 세상에 참모습을 드러낸 시기와 그 배경을 살펴보면 프랑스 인본주의 사진작가를 대표하는 ‘로베르 드와노’(Robert Doisneau. 1912-1994)를 만나게 된다. 이는‘ 로베르 드와노’가 젊은 여류 사진작가 ‘사빈 바이스’의 작품에 담긴 감성을 살펴 1952년 당시 유럽 최대의 미디어 대행사였던 ‘라포’(Rapho)에 소개하면서 당시 상류사회를 선도하던 패션잡지 ‘보그’지와 계약이 이루어졌다, 이어 시사 화보 잡지 ‘라이프’에서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시사 주간 잡지 ‘타임’과 워싱턴 포스트의 자매 잡지 ‘뉴스위크’ 등에 연이어 그의 사진이 게재되기 시작하여 ‘사빈 바이스’는 유명 사진작가의 입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미디어 대행 회사 ‘라포’는 헝가리 출신의 사진기자 출신의 ‘찰스 라도’(Charles Rado. 1899-1970)가 1933년 사진작가들과 함께 프랑스에 설립한 미디어 대행 회사로 당시 대표적인 사진 잡지를 발간하였다. 이와 같은 ‘찰스 라도’는 정신 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학문을 계승한 멤버 중 한 사람인 헝가리 정신과 의사 ‘샨도르 라도’(Sándor Radó. 1890-1972)의 동생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뉴욕에 ‘라포’를 개설하였다가 전쟁이 종전되면서 1946년 파리로 돌아왔다. 이와 같은 ‘라포’는 프랑스 인본주의 사진 운동의 터전으로 당시 인본주의 대표 사진작가 ‘로베르 드와노’가 1952년 ‘사빈 바이스’를 ‘라포’(Rapho)에 합류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로베르 드와노’는 1950년 파리 시청 앞 거리에서 젊은 남녀 한 쌍이 키스하는 장면을 담은 ‘시청 앞에서의 키스’와 1954년 ‘파리지앵’이라는 사진 작품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본주의 사진작가로 전쟁의 어둠을 헤치고 살아가는 프랑스 시민의 일상적인 삶을 흑백의 낭만으로 승화시킨 작가이다. ‘사빈 바이스’는 이렇게 ‘라포’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그의 작품 세계에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주문에 의한 패션과 인물사진을 촬영하면서도 ‘라포’를 통하여 ‘윌리 로니스’(Willy Ronis. 1910-2009)와 ‘에두아르 부바’(Édouard Boubat. 1923-1999)와 같은 인본주의 사진작가와의 교류는 그의 작품 세계에 인간 중심의 따뜻한 감성이 발아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프랑스 사진작가로는 최초로 ‘라이프’지의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1957년 베니스 비엔날레 금상을 수상한 ‘윌리 로니스’의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의 조언은 사빈 바이스에 미친 영향이 컸다. 이어 평화의 특파원으로 불릴 만큼 따뜻한 기억의 빛깔들을 세상에 드러낸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Édouard Boubat. 1923~1999)의 격려는 사빈 바이스가 마지막 인본주의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바탕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빈 바이스’는 ‘로베르 드와노’의 주선으로 ‘라포’에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1953년 ‘뉴욕현대미술관’의 ‘전후 유럽 사진전’ 전시와 1954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기획전. 그리고 뉴욕의 ‘Limelight Gallery’와 ‘링컨아트 센터’ 등의 기획전에 연이어 초대되면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작가의 인본주의 사진 작품에 대한 세계적인 평가가 이루어진 전시가 있었다. 1955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렸던 ‘인간 가족사진전’(The Family of Man) 전시이다. 당시 전시를 기획한 뉴욕현대미술관 사진부장 ‘에드워드 스타이켄’(Eduard Jean Steichen. 1879~1973)은 세계 68개 나라의 273명의 사진작가의 작품 503점을 선정하면서 ‘사빈 바이스’ 작품 3점을 선정하였다. 이는 사빈 바이스의 작품에 담긴 예술적 감성이 공개적으로 평가된 시점으로 많은 의미가 있다. 이에 전시 기획자 ‘에드워드 스타이켄’과 ‘인간 가족사진전’에 대하여 살펴본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1879년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나 1881년 두 살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94년 15세에 석판화 미술품 제작회사에 수습생으로 일하면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직장 근처의 카메라 상점을 오랫동안 기웃거리다 1895년 박스형 ‘탐정 카메라’(detective camera)를 마련하게 되면서 사진에 입문하였다. 이후 그는 1900년 미국에 귀화하여 시민권자가 되었던 21살 나이에 화가의 꿈을 안고 프랑스로 가던 중 뉴욕 카메라 클럽에서 그의 삶에서 가장 전환적인 인연을 맺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를 만났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독일군 출신의 아버지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베를린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당시 ‘염료 감응’(dye sensitization)법을 개발하여 사진 기술에 혁신적인 공헌을 가져왔으며 훗날 컬러사진 기술의 바탕을 일구어낸 화학과의 ‘헤르만 빌헬름 포겔’(Hermann Wilhelm Vogel, 1835~1899)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 사진술에 빠져들었다.

 
여기서 잠시 이와 같은 ‘염료 감응’(dye sensitization)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염료 감응’이란 유리판이거나 브로마이드 건판 그리고 필름 등에 도포된 감광성 사진유제 성분이 자외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청색과 자주색에서부터 빛의 파장에 따라 그 감응도가 떨어지는 원리를 분석하여 감응 효과를 높인 기법이다. ‘헤르만 빌헬름 포겔’ 교수는 이러한 원인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혼합될 수 없는 물질이 작은 입자 상태로 어느 한 편에 분산된 상태 즉 ‘에멀션’(emulsion)상태에서 빛의 파장과 일치하게 일정한 염료를 추가하는 방식을 개발하였다, 이는 사진 인화의 혁신을 가져온 것이다. 결국, 이러한 바탕에서 훗날 컬러사진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오늘날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주목받는 ‘염료감응 태양전지’(DSSC)의 선구적인 기술적 근원이 되었음도 짚고 가야 할 대목이다.

 

이와 같은 ‘헤르만 빌헬름 포겔’ 교수의 많은 영향을 받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사진에 입문하여 사진 과학의 공부와 함께 독일의 여러 사진작가와 교류하면서 아마추어 사진작가 콘테스트에서 수상을 거듭하여 사진작가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이후 1890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 뉴욕에 존재하였던 ‘아마추어 사진가 협회’와 ‘뉴욕 카메라 클럽’에서 활동하며 두 단체를 합병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 무렵 1900년 프랑스 파리로 가던 ‘에드워드 스타이켄’과 만나게 되어 그의 사진 작품에 담긴 회화적 특성을 높게 평가하며 그가 기획하고 있던 ‘시카고 사진 살롱전’(Chicago Photographic Salon)에 젊은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을 소개하면서 3점의 작품을 사주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이후 많은 일을 함께하였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1900년 파리에 도착하여 여러 미술관을 둘러보고 많은 미술작가와 사진작가를 만나면서 자신이 카메라로 하고 싶었던 작업이 화가의 그림에 담겨 있음을 확인한 후 당시 전위적인 예술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후 1902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창간한 사진 잡지 ‘Camera Work’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또한,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1904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Louis Lumière)가 개발한 ‘뤼미에르 오토크롬’(Lumière autochrome)이라는 컬러 사진용 건판을 사용하여 미국에서 최초로 컬러사진을 실험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회화적 양식의 사진에서 벗어나 카메라 렌즈가 포착하는 사실적인 감성을 중시한 작가 그룹인 정통파 사진을 추구하는 ‘사진 분리파’(Photo-Secession Group)가 결성되었다. 이에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1905년 뉴욕 5번가 291번지에 ‘291Gallery'로 잘 알려진 ’포토 시세션 갤러리‘(Photo Secession Gallery)를 열어 이와 같은 경향의 많은 사진작가를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프랑스의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과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에서부터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에 이르는 유명 미술 작가의 작품 전시를 기획하여 미술과 사진의 동등한 전시 활동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의 맥락은 미술사뿐만 아니라 사진의 역사에 많은 의미가 있다. 이는 당시 ‘291 Gallery'가 열리게 되면서 사진이 예술 분야로 미술 장르에 정착한 바탕이 되었으며 이러한 내용이 사진 잡지 ‘Camera Work’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또한 ‘에드워드 스타이켄’과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회화적 기법을 추구한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에서 출발하여 ‘정통 사진을 추구하면서 사진 예술의 발전과 정착을 위하여 깊은 우정으로 동행한 이야기 또한 빠트릴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는 엄밀하게 1960년 대 뉴욕을 중심으로 현대 미술 '팝 아트'(Pop Art)가 이와 같은 선구적인 열정의 바탕에서 그 씨앗이 발아된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동행하였던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1917년 미 육군 중위로 부임하여 프랑스 주둔 연합군 항공 사진부를 지휘하다 1920년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이후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 해군 비행사진부를 맡았다. 당시 그는 1944년 미국의 요크타운 항공모함을 보안상 ‘Fighting Lady’로 위장한 홍보용 다큐멘터리를 연출하여 1945년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부분을 수상하였으며 해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1947년 ‘뉴욕현대미술관’(MOMA) 초대 사진부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바탕에서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1955년 세계 미술사에서 영원한 전시로 남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인간 가족사진전’(The Family of Man)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인간 가족사진전’(The Family of Man)은 1955년 1월 24일부터 5월 8일까지 세계 68개 국의 유명 사진작가와 알려지지 않은 273명의 사진작가의 작품 503점이 전시되었다. ‘인간가족사진전’은 구분될 수 없는 평등한 사람들을 주제로 출생과 직업, 가족과 교육에서부터 어린이와 종교와 사랑 그리고 전쟁과 평화와 같은 32개 분야로 구성된 이야기를 연대순으로 배열한 전시였다. 이 전시는 당시 1.2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간 시대 상황에서 지구촌 모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의 현장을 제시하여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과 소중한 가치를 일깨웠던 것이다.

당시 세계적으로 큰 반응을 가져왔던 ‘인간 가족사진전‘은 최대 규모의 기획이라는 점 이외에도 전시에 담긴 메시지와 사진이라는 예술을 통한 대중과의 긴밀하고 친화적인 소통에 대하여 높은 관심과 인식을 가져오면서 인본주의 사진에 대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인간 가족사진전’은 뉴욕현대미술관 전시를 마친 이후 3개의 버전으로 나뉘어 1956년 프랑스 파리에서부터 순회 전시를 시작하여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이탈리아, 그리스, 스위스,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호주, 케냐, 짐바브웨, 이란, 이스라엘, 레바논, 인도, 라오스, 인도네시아, 콜롬비아, 과테말라, 우루과이,쿠바, 베네수엘라, 칠레, 일본과 독일 등 수많은 나라에서 순회 전시가 열려 1964년까지 1,000여만 명의 관람객이 전시를 관람하였다. 이와 같은 세계 순회 전시를 마친 이후 전시 기획자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자신의 성과급으로 물질이 아닌 자신이 태어난 조국 룩셈부르크에 ‘인간 가족사진전’이 영구 전시되기를 소망하였다.
 

이에 미국 정부는 순회 전시 작품을 룩셈부르크 ‘클레르보 성’(Clervaux Castle)에 영구 기증을 결정하였다. 이에 1974년 ‘클레르보 성’ 박물관에서 ‘인간 가족사진전’ 소장을 기념하는 전시를 통하여 그동안 훼손되었던 사진 작품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994년 ‘클레르보 박물관’(Clervaux museum)으로 개관되었다, 이때 1955년 뉴욕 현대미술관 전시실 디자인을 맡았던 '미국의 건축가이며 사진작가인 '키더 스미스'(G.E.Kidder Smith. 1913~1997)가 디자인한 전시 공간 원형을 그대로 복원하였다. 이어 200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와 같은 ‘사빈 바이스’의 사진 작품은 특징적인 구성과 빛을 중시하는 흑백 이미지로 일상에 담긴 감성을 인본주의적인 미학으로 추슬러가는 특성이 있다. 작가의 사진은 인간애가 넘치는 따뜻한 빛을 바탕으로 평등한 눈빛을 품어왔다. 이는 작가의 실제의 삶과 매우 닮아 있다. 작가의 이러한 사람 중심의 작품에 담긴 의미는 생활과 사람이란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지만, 그 순간의 장면에 담긴 감성은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메시지의 미학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어둠 속에서 빛에 드러나는 시선의 감성을 통하여 작가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기법을 추구하고 있는 사실이 분명하게 감지되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작가의 작품은 크게 주요한 언론 매체에서 활동하면서 화보 작업으로 촬영하였던 인물사진과 패션 분야에 연관된 사진이 일생의 주요한 작품으로 정리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세계 주요 나라를 방문하면서 촬영한 문화적 감성의 사진들이 주요한 분량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흑백이라는 자연적이고 원형적인 빛을 바탕으로 인위적이거나 의식적인 연출을 거부한 작가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의 작품을 세세하게 살펴보면 이러한 꾸밈없는 순결한 바탕에서 익명의 어린이들이 늘 등장한다. 작품에 담긴 어린이들은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품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감성을 순간이라는 시간 속에서 표현해 내고 있다. 이러한 어린이들의 표정에 내재한 슬픔을 감싸는 따스함을 품은 신성한 빛이 작품에 가득하게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들은 인간이라는 주제에서 원형적인 자연 상태의 빛이 투영된 삶이 가지는 이야기들을 흑백의 눈빛으로 헤아렸다. 이는 작가가 지나가 버리면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증언 또는 증거의 눈빛으로 살아왔으며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을 스스로 운명 지운 것에 대한 결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국왕에서부터 열악한 환경의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품에 담긴 중심적인 의미는 ‘인간 평등으로 지켜본 영원한 흑백의 눈’ 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사빈 바이스’와의 만남을 통하여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이는 세기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그의 부인 ‘아네트 자코메티’(Annette Giacometti. 1923∼1993) 부부가 ‘사빈 바이스 부부’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특히 ‘자코메티’ 부인 ‘아네트 자코메티’는 사빈 바이스와 같은 스위스 출신에 동갑이었다. 또한 두 부부는 슬하에 자녀가 없는 처지까지 같아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이에 1966년 ‘자코메티’가 세상을 떠나자 부인 ‘아네트 자코메티’는 남편 ‘자코메티’작가의 모든 유품과 작품 촬영을 친구인 ‘사빈 바이스’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사빈 바이스 작가가 1981년 우리나라와 와서 촬영한 사진 작품이었다. 1981년 우리나라는 외국의 언론인과 사진기자에 대한 군부 독재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였다. 당시 ‘사빈 바이스’가 한국을 방문하여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에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촬영하였던 사실이었다. 당시 ‘사빈 바이스’는 미국의 시사 잡지 ‘타임’과 ‘라이프’지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세계 주요한 나라의 많은 사진을 촬영하였다. 그러나 유독 우리 한국에서 촬영한 사진 작품에 대한 공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와 같은 한국에서 촬영한 사진들이 작가의 전시에 대한 협의차 다시 방문하였을 때 작품 수장고를 방문하여 한국에서 촬영한 작품 자료가 보관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에 작가에게 그 배경을 물었을 때 작가는 당시 일본에 갔다가 귀국길에 한국을 잠시 들렸던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와 같은 이야기와 맞닿는 사실이 있다. 당시 10월 프랑스의 세계적 인류학자이며 구조주의 석학인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박사가 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프랑스 언론에서 이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지면서 사빈 바이스 작가가 당시 일본 방문을 마치고 한국에 잠시 들려 촬영하였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필자는 ‘사빈 바이스’가 2007년 ‘국경없는기자회’(RSF)에 자신의 사진 작품 100점을 기증하였던 사실을 떠올려 또 다른 배경에 대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국경 없는 기자회(RSF)’는 프랑스 파리에 본부가 있는 세계 언론인 인권보호단체로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고 투옥된 언론인들을 변호하는 활동을 펴고 있다. 당시 사빈 바이스가 기증한 사진 작품으로 출판된 책이 모두 팔리는 성공을 거두어 언론의 자유를 위한 기금으로 조성되었다. 필자는 이와 같은 사실에서 당시 한국에서 촬영한 작가의 사진에 대한 의식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필자는 ‘사빈 바이스’의 휴머니티가 녹아내린 작품에서부터 세계 문화 예술계 인물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수많은 유명 인사들의 초상사진과 세기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유품 사진과 작품 사진 그리고 미공개 한국 사진을 함께 전시하는 ‘사빈 바이스 회고전’을 한국에서 개최한 이후 일본과 중국의 전시 협의까지 진행하였다. 이에 필자는 평생 자녀가 없는 작가가 딸을 입양하여 손녀를 둔 사실에서 아들의 인연을 자청하며 아들이 회고전을 준비하는 것은 동양이거나 서양이거나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작가는 일생에 없는 아들이 한국에 생겨 기쁘다며 맑은 웃음을 가득 머금고 좋은 전시가 꼭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메시지를 친필로 남겼다.

▲ 필자(korea art center-director il-young, lee)와 사빈 바이스     ©브레이크뉴스


이제 작가의 나이 97세를 맞았다. 이 시대 휴머니티 정신의 마지막 사진작가로 평가받는 작가의 시대를 관통한 세계 문화 예술사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주옥같은 인물 사진을 비롯한 평등한 인간애로 일생을 매만져온 소중한 작가 정신이 우리나라에서 펼쳐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지만, 부족한 능력과 인식의 부재로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물질적인 이익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는 세상의 눈에는 영원한 평등을 품은 흑백의 눈에 담긴 정신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양의 아들을 자처하며 열고 싶었던 전시는 가슴에서 늘 열리고 있지만, 작가의 생전에 세상에서 열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지(time)는 2016년 6월 14일 자 사빈 바이스 특집 기사의 제목이 스쳐간다,(Rediscovering the Genius of Sabine Weiss, the Last Humanist Photographer) 이 시대 마지막 휴머니스트 사진작가 사빈 바이스 천재성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이었다. 필자: 이일영(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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