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귀님 作 남도의 여인 닥종이에 커피 추출액 & 혼합재료 2020년 © 브레이크뉴스 |
남도 예향 목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귀님 작가의 초대 개인전 (기억^흔적)이 지난 13일 오픈되어 8월 10일까지 전남 영암군에 위치한 희-문화창작공간(대표: 한지공예가 김미희)에서 열리고 있다. 이는 희 문화창작공간의 2020년 특별 기획으로 영암 출신 작가들에게 고향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발표할 수 있는 ‘회귀’ 프로그램 중 하나로 영암에서 출생한 이귀님 작가의 초대전이다.
(별빛의 퉁퉁 부은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직도 걷고 있는 이 세계의 많은 발들을 생각합니다/ 바다를 걷다 걷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발들에게/ 차마 안부를 묻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사무칩니다/ 바닷속의 발들을 기다리는 해안의 발들이/ 퉁퉁 부어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허수경 시인의 시 “발이 부은 가을 저녁” 중
이귀님 작가의 최근 작품을 살펴보며 세상의 삶을 걸음으로 옮겨온 고 허수경 시인의 시 (발이 부은 가을 저녁)의 후반부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1987년 실천문학에 등단 이후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허수경 시인은 1992년 홀연히 독일로 이주하여 새롭게 고고학을 공부하였다. 수많은 역사의 발굴 현장을 체험하였던 시인은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으며 모든 물질과 생명은 유한한 시간을 영위하다 사라져 갈 때 그 영혼은 어딘가 남아있다고 했다. 먼 이국 생활에서 닫혀가는 모국어의 침묵을 기억의 그리움으로 찍어 바르며 깊은 울림의 시들을 발표하였던 시인은 지난 2018년 암 투병 중에 54세의 안타까운 죽음이 찾아왔다.
이와 같은 기억의 그리움을 찍어 바른 시인의 시와 기억의 숨결을 승화시킨 이귀님 작가의 회화 작품은 존재와 회상으로 맞닿은 기억의 양 끝을 마주 잡고 있다. 이귀님 작가의 회화 작품은 기억의 흔적들이 숨결처럼 살아있다. 이는 태초에 세상이 공허에서 존재의 물질로 채워졌듯이 인간의 기억 또한, 겹겹의 나이테를 두르며 층층이 쌓아 올린 흔적의 존재라는 의식이 낳은 신성한 생명력이다. 이와 같은 기억의 숨결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그림처럼 그려지는 회상이 되기도 하고 사랑과 미움이 녹아내린 애증의 추억이 되기도 한다.
또한, 기억의 확장에서 생겨나는 제한된 주관을 초월하여 신성한 감성을 건져 올리는 영감이거나, 마음속에 그려지는 상상이 다양한 장르의 승화된 예술의 바탕이 되어온 사실에서 작가가 호흡하는 기억의 숨결은 깊은 의미가 있다.
![]() ▲ 이귀님 作 삶을 꿰다 닥종이에 커피 추출액 & 혼합재료 2018년 © 브레이크뉴스 |
인간의 삶은 곧 기억이다. 의학적 관점에서 유아기의 기억이 없는 이유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까닭이라는 연구가 있었다. 이는 인간의 기억은 표현되어야 하는 의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귀님 작가의 작품을 이루는 재료의 특성을 먼저 살펴보면 작가가 추구하는 의식을 공감하게 된다.
작가의 작품을 이루는 바탕 재료는 매우 두꺼운 겹겹의 천연 한지 닥종이다. 작가는 이를 직접 제작한다. 한지의 주재료인 닥나무 섬유(닥죽)를 직접 짓이겨 떠내어 두드리는 고해(叩解) 작업을 손수 하고 있다. 이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전문적인 작업이다. 이는 필자가 오래전 부채 그림 기획에 열중할 때에 부채종이의 내구성을 위하여 주요한 한지 제작 장인을 두루 찾아다니며 천연한지 제작의 힘든 과정을 살피며 느꼈던 내용이다. 특히 천연 닥나무의 닥을 삶는 과정은 오랜 경험에서 체득된 감각이 종이의 질을 좌우하는 대목으로 너무 중요하다. (잘못 삶아진 닥은 재사용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천연 닥종이를 재료로 사용하는 의식은 동양과 서양의 그 어떠한 재료보다 뛰어난 작품의 보존성이 기본이지만, 기존의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다양한 형태로 작품의 확장을 추구한 오브제적인 의식이 담겨있다. 이는 작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예로부터 들과 밭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일터에서 입었던 민중의 애환으로 헤어진 옷 잠방이와 삶을 담아온 소쿠리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 형태에서 잘 드러난다.
이와 함께 두꺼운 천연 닥종이를 사용하는 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의식의 울림을 품은 질감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작가는 천연 닥종이 작품의 채색재료로 의외의 재료를 사용한다. 바로 서양문화와 현대문화를 상징하는 커피가 작가의 채색재료이다. 작가는 짧은 시간 동안 고압에서 추출한 커피의 원액 (에스프레소)를 사용하여 빛깔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다양한 시도에서 얻어낸 경험의 체득이다. 일반적인 화선지와 천연순지 그리고 이를 겹겹으로 가공한 장지에 반응하는 먹물과 수간 채색의 특성은 각각 다르다.
특히 천연 닥종이에 먹물의 채색 효과는 먹물의 농담을 조절하여도 천연 닥종이의 섬유질 특성으로 먹물이 번져 들지 않고 고스란히 응집되어 스며드는 효과를 낳는다. 이와 달리 고압에서 추출된 커피 원액 (에스프레소)는 그 입자가 일반 커피보다 더욱 미세한 상태의 커피 가루를 고압에서 추출하는 원리로 오묘한 빛깔의 크레마(crema) 성분이 생성된다. 이러한 크레마가 함유된 커피 원액 에스프레소가 닥종이에 겹겹으로 스며들게 되면 한지가 가지는 특성에서 독특하면서도 안정적인 빛깔을 얻게 된다.
이와 함께 전시 명칭 “기억^흔적” 사이에 놓인 삿갓표시 캐럿 기호 표기도 의식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이는 수학 함수에서 거듭제곱을 나타내는 지수 연산자 부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전시 명칭 “기억^흔적”을 지수의 연산부호로 헤아리면 작가가 추구하는 의식 (흔적으로 제곱 된 기억)을 의미하고 있다.
이귀님 작가의 작품에 겹겹의 기억으로 스며든 흔적은 전생으로 통하는 기억의 문을 열어 층층의 역사를 오가는 윤회의 기억을 헤아려간 프랑스 천재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기억)을 생각하게 한다. 원제목 “판도라의 상자”인 (기억)은 그리스 신화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를 관통한 추억과 회상으로 열린 기억의 통로를 오가고 있다. 이는 인류사에서 고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기억과 회상하고 상기하는 의지의 기억으로 살펴온 맥락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넘나든 것이다.
기억을 주요한 의식으로 매만지는 이귀님 작가의 작품은 오랫동안 어물전을 운영하여온 부모님에 대한 존재의 기억과 회상과 상기의 기억이 교차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억이 작품으로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로 나타난다. 작가의 작품에는 상상이거나 가상의 감정이 아닌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녹아내린 어머니의 삶에 대한 기억이 출렁거린다. 끝내 지워지지 않는 어린 시절 초라한 어머니의 모습에 대한 반항의 기억도 소리 없는 울음으로 담겨있다. 마침내 작가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 지워지지 않는 겹겹의 기억에서 건져 올린 소중한 삶의 숨결이 승화된 감성으로 빚어져 있다. 이는 작가가 작품을 하는 이유이며 세상에 전하는 의식의 메시지이다.
![]() ▲ 이귀님 作 수국 닥종이에 커피 추출액 & 혼합재료 2020년 ©브레이크뉴스 |
작가의 작품 (남도의 여인)은 남도 해안 갯벌의 저만큼 무섭게 차오르는 물길의 아쉬움을 두고 삶의 무게에 눌린 닿을 듯 굽은 허리를 끌고 성급한 물길이 자박자박 대는 갯벌을 빠져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마치 시퍼렇게 눈을 뜬 바닷가의 갯내음처럼 가슴을 걸어온다. 탄탄한 데생력을 바탕으로 생명을 품은 자연의 숨결을 현장감 있게 그려낸 작가의 작품은 바로 삶이다. 이어 (삶을 꿰다)의 작품은 잠방이를 입고 그물을 손질하는 모습이 잠방이 형태의 바탕에 어우러져 있다. 이와 같은 작가의 작품은 기억으로 매만진 신성한 울음이 뚝뚝 떨어진 자리에 마침내 언제 바라보아도 순결한 수국꽃을 함초롬하게 피워내고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고 관람자는 가슴으로 듣는다. 기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억을 승화된 예술로 빚어 세상에 소중한 메시지로 전하는 의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손수 제작한 천연의 바탕은 단순한 바탕이 아닌 작가의 가슴에 삼킨 맑은 기억의 눈물을 받아내는 그릇이다. 신성한 삶의 숨결을 빚어내는 고독한 작업이 세계인의 가슴에 징검다리를 놓을 것을 기대하며 마음의 응원을 보낸다. artwww@naver.com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