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태란 이름에는 전방위 예술가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독립영화 ‘아침과 저녁 사이’, ‘빛의 행방’, ‘뛰어라 A’ 를 만든 영화감독이며 블랙코미디 형식의 ‘병태의 감격시대’ 등 여러편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또한 당시 기발한 도전을 감행했던 전위해프닝 그룹 ‘제4집단’의 멤버이기도 했고, 연극 콜렉터의 캐리번역과 영화(김승옥이 각본을 쓴‘황홀’) 의 배우로도 활약하면서 수많은 잡지와 신문에 분주하게 오르내리는 화제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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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 나무는 친환경소재로 지은 독특한 건축물로 건축 당시부터 주목을 받아오고 있다. 특히 입구의 유리벽은 가운데에 필름을 넣어 스크린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작가가 그동안 해왔던 영화와 퍼포먼스 작업들이 전시기간 중에 이 스크린을 통해 관람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귀국 후 무주에 머물고 있는 작가는 먹그림을 통한 서체개발과 한국적 하이쿠인 아이쿠 작업을 그림과 병행하고 있다. 특히 그림에서는 시골생활을 통해 만난 빛과 물을 작품 속에 녹여내는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그림을 그려 물로 씻어내고 햇빛에 말린 후 그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고 다시 씻어내는 작업을 반복하는 행위는 작품 속에서 빛과 물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블로그 ‘아이쿠’ WWW.aaikoo.com 와 저산갤러리 WWW.jeosan.com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심광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미학/문화연구)는 이익태의 전시회에 대하여 “<빛-가루>를 이끌어낸 프랙탈한 행프랙탈 미학의 선문답: <빛-가루> 그림과 <아이쿠> 禪詩에 부쳐”라는 평을 썼다. 다음은 이 평의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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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가루>를 이끌어낸 프랙탈한 행프랙탈 미학의 선문답: <빛-가루> 그림과 <아이쿠> 禪詩에 부쳐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미학/문화연구)
현대과학에 의하면 빛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다. 하지만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 이 개념은 생소하다.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혹은 숲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분명히 서치라이트와 같이 일정한 방향으로만 직진하는 빛의 ‘더미’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도 간혹 빛이 입자나 파동처럼 보이는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드문드문 떨어져 희미하게 빛나는 별빛들은 아주 미세한 점(입자)들처럼 캄캄한 밤하늘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고, 어두운 숲 속에서 나무 가지와 잎들 사이로 언뜻 지나가는 햇살을 비스듬히 보게 되는 순간 빛 가루(입자)들이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하늘에 펼쳐진 무지개에서 빛이 파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낯설고 경이로운 느낌들은 빛이 사라졌거나 빛이 비일상적인 조건을 통과할 경우에만 발생하는데, 이는 마치 물리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조작한 비일상적인 조건에서 빛의 본질에 접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비일상적인 조건 속에서 발견한 빛의 입자적-파동적인 성질을 이용해서 가속기나 X선 촬영을 만들어내어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그렇다면 일상 속에서 가끔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경이로운 빛의 경험들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익태의 이번 전시회 <빛-가루>전은 이런 질문을 선문답처럼 던지고 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 색의 더미들이 일정한 형태를 취하게 되고, 붓 터치들이 뭉쳐지면 색들의 혼합되기 마련이고, 이런 그림들에서 화면을 채운 색 더미들은 곧 빛 더미가 된다. 그런 색 더미들은 <색면> 혹은 사물의 <형태>로 느껴지지 빛 입자나 파동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명암을 강조한 그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며, 형태가 사라지는 추상회화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색 더미로서의 빛이 아니라 입자나 파동으로서의 빛을 느끼려면 이런 일반적인 그리기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익태의 <빛 가루> 그림들은 이런 <그리기> 방식을 벗어나 아크릴 물감을 <뿌리고> <물을 흘려 섞는> 방식에서 탄생했다. 붓으로 그리는 대신 물감을 뿌리는 방식이라고 하면, 현대미술을 아는 이들은 누구나 잭슨 폴록이나 이브 클랭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익태의 그림은 세 가지 점에서 이들의 작업과 다르다.
첫째, 폴록과 클랭의 <뿌리기> 작업에는 작가적 <행위의 궤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 무작위적인 궤적들은 붓으로 그리지 않았다 뿐이지 마치 행위를 통한 서명과도 유사하게 화면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익태의 경우 그 뿌리기 행위의 궤적들은 물에 의해 지워지고 뒤섞여 남김없이 사라진다.
둘째, 폴락과 클랭의 작업에서 물감들의 궤적들은 서로 엉키면서도 일련의 빛-더미들의 패턴을 만들어내지만, 이익태의 작업에서 물감들은 물과 섞이고 엉키면서 최종적으로는 색-입자, 빛-입자들을 만들어내며, 그 입자들이 두텁게 쌓인 층의 내부에서 일련의 서로 간섭하는 파동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셋째, 폴락과 클랭의 그림들은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뿌린 것이라면 이익태의 그림은 한지에 아크릴 물감을 뿌리고 물을 흘리는 행위를 반복하여 만들어진 일종의 염색 작업과도 같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익태의 그림은 이런 면에서 개성적인 터치와 색면-형태 구성을 기반으로 발전해 온 현대미술의 전통, 더 넓게는 회화적 전통 자체로부터 벗어나면서, 종이를 바닥에 놓고 물감을 뿌리고 흘리고 물을 붓고, 물감이 칠해진 종이를 밞고 접고, 다시 펴는 몸짓의 반복을 통해서 물과 한지와 물감의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색/빛의 입자와 파동을 형성해내는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그림이 벽에 걸려 조명을 받게 되면,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별 입자들이 꽉 차서 총총히 빛나고 있는 듯한 경이로운 경관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또는 깊은 우주의 심연 속으로 별들이 소용돌이 치며 말려들어가는 듯한 기이한 시공간을 허블 망원경으로 촬영한 것 같은 광경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인위적인 그림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적인 광경처럼 되어 버린 이런 그림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아마도 <빛 가루-프랙탈-퍼포먼스>라는 세 가지 개념의 혼합이 이런 그림에 가장 근접하는 미학적 정의가 아닐까?
<퍼포먼스로서의 회화>는 앞서 말했듯이 잭슨 폴록과 이브 클랭이 개척한 길이며, 멀리 거슬러 올라가자면 동양 수묵화와 선화의 전통과도 맞닿아 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빛-가루>를 만들어낸 <프랙탈>한 행위는 그만의 독특한 발견이 아닐까 싶다. <프랙탈>은 1975년 수학자 베노아 만델브로가 발견한 새로운 분수 차원의 수학 법칙으로 이를 통해 무질서 하게 보이는 자연 속에 내재한 질서 형성의 메커니즘이 밝혀지게 되었다. 자연은 최초의 작은 분기를 분수 차원의 분할로 반복하면서 나중에는 거대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 자연에는 다양한 형상들이 생성-소멸한다. 나무들은 단지 두 갈래 혹은 세 갈래로의 분기를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서 저마다 각기 이질적인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혹은 사람의 지문이 각기 다른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북경에서의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서 폭풍을 일으킨다는 소위 <나비 효과> 역시 프랙탈한 원리의 예시이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나누고 접는 행위를 통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자연 법칙, 즉 프랙탈한 행위를 통해 이익태의 그림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자연이 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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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태학적 전환과 예술의 치유적 기능
1999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렸던 <NO EXIT: Head without Heart>라는 표제의 이익태의 개인전 서문에서 나는 당시 그의 그림들이 “토해내기”와 같은 행위에 의한 “자기치유를 통해 집단치유를 도모하는” <21세기를 위한 살풀이 굿>과도 같다고 쓴 적이 있다. 당시의 그림들은 무수한 해골들이 검붉은 화면을 가득 채운, 일종의 “지옥의 묵시록”과도 같았고, IMF위기 이후 절망과 혼란이 만연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분노와 절망을 “토해내며” 실존적인 성찰을 촉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12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 역시 <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신자유주의적 양극화가 가속화 되어온 지난 10여 년 한국의 자살률과 이혼률은 세계 1위로 부상했고, 많은 작가들이 붓을 내려 놓았으며, 최근에는 생존고에 시달린 젊은 예술가들의 자살이 잇따르기 시작하고 있다. 만일 어떤 중요한 전환점이 없었다면 그 과정에서 이익태 역시 화가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서울-전주-지리산을 거쳐 그가 최근 무주의 작은 폐교(분교)에 정착하여 시골생활과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가 세계관과 예술관의 근본적인 전환, 즉 생태학적 전환을 이루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생태학적 전환은 세계적으로 이론적-제도적 변화의 화두로 떠오른지 수 십년이 되었기에 이제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구호처럼 되어 버렸고, 개발지상주의자들조차 “녹색성장”과 같은 구호를 외쳐대기 바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손쉬운 포장과 달리 이를 실천하기는 정말 어렵다. 의식주는 물론 세계관과 직업관 등을 모두 바꾸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흔히 오해하기 쉽지만, 생태학적 전환은 단순히 문명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뜻이 아니다. 이는 자연의 심층원리를 몸으로 깨닫고 이에 입각해서 자연과 문명을 다시 평가하고, 그 관계를 재구성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단지 자연 속에서 산다고 생태학적 전환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날이 갈수록 시골사람들조차 각박해지는 것은 몸은 자연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자본의 논리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생태학적 원리를 깨달은 몸과 마음의 눈으로 보면, 자연과 일상, 문명과 예술 자체가 새롭게 보일 수 있다. 이익태가 이번 전시에서 선 보이는, 프랙탈한 원리에 입각한 <빛-가루> 그림들, 그가 지난 2000년대에 수행해 온 <아이쿠> 선시(禪詩), 그리고 최근 찍고 있는 사진들은, 그렇게 체화된 생태학적 마음의 눈으로 깨닫고 조우하게 된, 자연과 일상의 새로운 면모들이다.
그가 말하듯이 “물과 물감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물성 스스로를 드러내게 하는 자연적 작업방식”은 제도적으로 관습화되어 생명력을 상실한 <죽은> “의미와 상징 버리기”를 가능하게 하며, “붓 스스로가 색과 형태를 만들어가는 하이쿠 식의 먹그림”은 자연의 열린 기운이 <체화된 마음>(embodied mind)이 움직이는 방식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또 열린 마음의 “관자재”(觀自在)한 태도가 체화된 몸짓의 투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투명한 아크릴 CD 케이스를 캔버스 대신 사용하고 있다. 생태학적 마음과 몸의 새로운 움직임은 그림에 한정되지 않고 처마 끝에 매달린 거미줄에 물방울이 비치는 순간,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대칭을 이루는 절벽의 풍경 속에서 나타나는 기이한 인간과 생물체의 형상들을 포착한 사진들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일상적으로는 무시하고 스쳐지나간, 또 아무리 보아도 반쪽만을 보게 되는 풍경의 <숨겨진 대칭성>이 포착되고, 자연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현상된다. 무기물의 바위와 돌에서, 흐르는 물의 패턴에서, 처마 사이로 떨어지는 물방울에서 생명의 형태가 <현상>(現象)하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의 생태학적 원리>가 <체화된 마음>이라는 새로운 렌즈 덕이리라. 그리고 이런 변화를 통해서 이익태는 <자기 치유>에 이르게 되고, 또 이런 작업 과정을 전시함으로써 <집단 치유>를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열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 그가 도달하고 있는 자기와 집단의 생태학적 치유의 내용과 성격은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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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따스한 눈길의 선시화(禪詩畵), <아이쿠>
“달빛 이불깃 적시고, 풀벌레 소리 가슴 파고드네”
“안개 춤사위 펼치자 산도 절도 온데 간 데 없구나”
“하루살이 하루는 영원”
“아침 햇살에 반짝반짝 춤추는 먼지”
그의 네이버 블로그 <아이쿠>(WWW.aaikoo.com)에 접속하면 위와 같은 <아이쿠>들이 먹으로 그린 그림의 화제(畵題)의 형태로 그림 우하단에 써 있고, 그 아래에는 그리 길지 않은 각 시(詩)에 대한 짧은 단상이 소개되어 있다. <아이쿠>란 일본의 <하이쿠>의 <이익태 버전>인 셈인데, <하이쿠>에 담긴 ‘선’(禪)적인 각성의 성격을 <하이쿠>보다 더 잘 드러내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하이쿠>라고 하면 그저 “짧은 시”라는 의미를 지닌 용어인데 반해, <아이쿠>는 일상에서 어떤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저절로 튀어나오는 의성어와 같은 “아이쿠”라는 의미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선시>의 본래 의미인 <깨달음>을 관념적인 아니라 일상의 몸짓을 통해 얻어 쓴 시라는 의미에서 ‘중의적’인 ‘유머’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명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아이쿠>의 그림들과 시들은 ‘선’적인 각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표현은 매우 소박하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일례를 들어 “아침 햇살에 반짝반짝 춤추는 먼지”라는 <아이쿠>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단상을 쓰고 있다. .
“.......언제였던가 이른 아침 이불을 개고 있는데, 순간 창가로 스며든 햇살 수없이 반짝이는 먼지,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먼지의 춤, 숨이 멎었다.......우리는 먼지와 함께 산다. 먼지를 호흡하고 먼지 속에서 꿈꾼다. 그 선사의 말처럼 우리는 한 알갱이의 먼지일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먼지로 돌아갈 몸이라는 걸........머리 속에 도서관 몇 채씩 넣고 다니는 학자들.....권력의 무거운 일월도를 메고 다니는 사람들, 그들은 바위처럼 무겁다.......머리가 무겁기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다는 걸 아는 자는 드물다......먼지는 비어 있다. 홀씨처럼 가볍게 나른다. 작은 바람결만 있어도 둥둥 떠다닌다. 요즘 가벼운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너무 심각하다. 쇳덩이를 하나씩 달고 다닌다. 존재의 가벼움을 위하여, 먼지의 가벼움을 위하여 축배를!“
먼지의 가벼움을 위해 축배를 들자는 이 <아이쿠>는 그가 이 글에서 소개하는 일본의 선사가 쓴 <하이쿠> “먼지의 무게가 이렇게 무겁다니!”의 엘리트적인 심각함에 비하면 얼마나 따스하고 소박한가? 또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절 올리는 할매”라는 <아이쿠>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동네 할매 몇은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채 보따리를 힘겹게 걸머지고 언덕길을 오간다. 나는 그들을 시지푸스할매라 부른다. 평생 밭농사 자식농사 짓다보니 한시도 맘편히 허리를 펼 여유조차 없었으리라. 시지푸스할매들이 한발 한발 떼어놓을 때마다 땅을 향해 온 몸이 숙여진다. 대지를 향해 절을 하듯.....”
밭농사와 자식농사를 하다 허리가 굽은 할매와 추락과 상승의 무의미하고도 운명적인 반복을 수락함으로써 오히려 실존감을 획득하는 시지푸스를 겹쳐 놓은 <시지푸스할매> 역시 자칫 <가슴 없는 머리>의 명철한 각성에 그칠 수 있는 위험한 선적 곡예를 하찮아 보이는, 땅을 기어가는 듯이 보이는 할매의 일상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이렇게 대비해 볼 때, <하이쿠>와 <아이쿠>의 차이는 엘리트적인 신수의 각성과 민중적인 혜능의 실천과의 차이 만큼이나 큰 것 같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매일 마주 대하는 먼지, 개울가의 돌멩이, 안개, 처마에 매달린 거미줄, 동네 할매들에게서 자연의 이치와 생태학적 삶의 무게를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가 절간의 선사들과 다른 점은 단지 홀로 자유자재로움을 추구함에 그침 없이, 언젠가는 먼지로 화할, 오감으로 느끼는 자연적 삶의 다채로움과 소중함을 귀중한 보배를 다루듯이 섬세하고 다감하게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 있을 듯 싶다. 이런 점에서 그는 대승불교적인 각성과 실천을 예술적으로, 세상 속에 살아 있음 자체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타자들과 세상에서 함께 살아 있음을 만끽하고 관계맺음을 사랑하고 표현하기야말로 예술의 특정성이기 때문이다. 인지생물학과 오토포이에시스 이론의 창시자인 움베르토 마뚜라나는『있음에서 함으로』라는 표제의 대담집(갈무리, 2006)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감정들을 이성에 간섭하는 힘들, 심지어는 이성을 위협하는 힘들로 평가절하하는 것이 우리 문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입니다. 여기에서 이미 현실적인 평가절하가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 윤리적 행위를 가능케 해주는, 무엇보다도 행위들의 결과들에 대해 성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포함하는 행위를 가능케 해주는 가장 중요한 감정이라는 것입니다.”(333쪽)
하지만 현대사회는 날이 갈수록 탐욕스러워지는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이런 사랑의 감정, 윤리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이렇게 체계화된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개개인이 생태학적 원리를 체화하고, 사랑의 감정을 활성화하면서, 예술적 실천으로 공동체적인 삶을 재구성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헤라겔은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 궁사(弓師)들은 이렇게 말한다. 즉 궁사는 활의 상단으로써 하늘을 꿰찌르고, 하단에는 대지를 매달아 하나의 활줄을 고정시킨다. 시위를 세게 당겼다 놓으면, 활줄이 끊어질 위험이 있다. 이 경우 의도를 갖거나 난폭하게 다루는 사람은 결국 흐트러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과 대지 사이의 아물 수 없는 중심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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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각도에서 보면 99년의 전시에서 2011년의 전시로의 전환은 단지 반대 방향으로의 이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사용하는 예술적 활 시위의 양극이 비로소 하나로 연결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과거에는 세상에 만연한 폭력과 맞서 하늘로 치솟던 분노가 활의 상단을 이루며 하늘을 꿰찔렀다면, 이제는 활의 하단에 대지의 자연으로부터 샘솟는 사랑을 매달아 비로소 하나의 예술적 활줄이 고정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양극으로 치닫게 하여 하늘에서 땅까지를 하나의 활줄로 연결할 수 있는 작가는 극히 드물지만, 이렇게 해서 만든 활 시위를 어느 각도에서든 적절한 긴장감으로 당겨 분노와 사랑의 변증법을 탄력 있게 구사할 수 있는 작가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익태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하늘로 둥실 날아 오르는 <아이쿠>의 경쾌함과 물먹은 한지 속에서 반사하는 빛나는 우주적 별들의 깊이를 함께 보여줌으로써 “걸어서 하늘까지” 도달하는 선적인 경지를 일별하게 해주는 것 같다. 서울에서 L.A.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이제는 무주까지 내려간 그가 겪은 삶의 체험들이 이제 그가 엮어낸 예술적 활 시위를 통해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게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저산 이익태 예술 연보
68 현 서울예술대학 연출 전공
70 한국최초의 독립영화
'아침과 저녁사이’ 외 2편 감독
74-75 동아일보 신춘문예 가작 입상(74,75년도 2회) 가작입상
‘진혼곡’, ‘아무도 없었던 휴가’
시나리오 ‘병태의 감격시대’ 외 다수 집필
79 연극 ‘20세기 고객 여러분’ 외 5편 연출(미국)
82 광주의거를 주제로 한 퍼포먼스 ‘곡(GOK)1’, ‘곡3’, ‘곡4’ 연출
( L.A.시 문화국 그랜트수상공연)
L.A. TIMES, HIGH PERFORMANCE Cover 리뷰
퍼포먼스 ‘SPRIT 265', 'WALKING IN TO BLUE SPACE' 등 다수 공연(미국)
91 뉴욕국제공모전 (Clary-Miner Gallary) 1등상 수상 외 10여회 수상
SPRING STREET MUSEUM 외 3회 개인전
NEWPORT HARBOR MUSEUM 외 20여회 그룹전(미)
92 LA 4.29 폭동을 주제로 한 대형 퍼포먼스‘Volcano Island’ 공연
(L.A 시 문화국 후원)
95 L.A 시 그랜트수상 퍼포먼스 연속 공연(HUGGING ANGEL 등)
한국문화원(한. 흑 사진전 등) 다수 큐레이터(미국)
99 금호미술관 개인전(NO EXIT)
대형설치 퍼포먼스 'ICE WALL 1' 통일대교
2000 한. 베트남 평화문화제 개막 퍼포먼스 ‘WATER MELON' 연출(가나아트센터)
2001 대형설치 퍼포먼스 ‘ICE WALL 2' 연출 서강대교
2004 정신세계원 발행 웰빙라이프 Haiku 연재
2005~6
북스갤러리) Haiku 전 3회
2007-10 전주 한옥생활체험관 아트디렉터
동문사거리 스트릿디자인 아트디렉터
2011. 4. O' Gallary 개인전 빛글
2011.11,23~ 12.23 갤러리 나무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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