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촐촐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옹알옹알 울을 것이다.
1938. 3《여성》3권 3호
주) 한글맞춤법에 맞춰 일부 수정하였음
백석은 이제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족시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는 1930년대와 40년대 모던보이라 불릴 정도로 당대의 지식인이자 문인이었다. 1912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한 그는 오산소학교와 오산고보五山高普를 다니면서 당시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 선생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한때 그의 통역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30년, 열아홉 살의 나이에 《조선일보》신춘문예에 <그 모母와 아들>이란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시 가운데는 사연과 이야기의 원천이 되는 많은 영감이 내재되어 있음 알 수 있다.
위의 인용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백석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 가운데에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한다’는 내용이 설정되어 있다. 러시아식 이름인 ‘나타샤’는 그가 사랑한 ‘란’이나 ‘자야’의 변용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전기적 약력을 살펴보면, 백석은 통영 출신의 ‘란’을 무척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5년, 백석의 나이 스물넷이었을 때 그의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당시 이화고 학생이었던 란蘭이란 여성을 만났으며, 그녀로부터의 많은 시적 영감을 받아 창작을 하게 되었으나 그녀와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석은 사랑했던 란이 그의 친구인 신현중과 결혼하게 되자, 그로 말미암아 상심하여 방황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또한, 백석의 작품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이름 가운데 하나가 자야이다. 백석은 그가 사랑했던 란이 결혼한 후 기생인 자야와 동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후에 법정 스님에게 성북동 소재 길상사를 시주한 바 있는 김영한 씨를 지칭하고 있다. 자야는 권번 출신의 기생으로 궁녀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은 바 있으며, 문인들과의 교분도 깊었다. 그녀는 백석과 그의 시를 사랑했으며 백석의 문학세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길상사로 바뀐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면서 백석 시 한 구절이 천억 원보다 더 귀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백석이 일본 유학할 때 하숙한 지역의 이름이 길상사였다는 점 또한 백석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88년에는 《창작과 비평》에 김자야 여사의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회고록을 발표한 바 있다.
위의 인용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백석이 사랑한 여인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나타샤’는 백석이 미르스키의 『죠이스와 애란문학』을 번역하면서 톨스토이의 나타샤를 차용하여 그 이름을 작품 가운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실제 인물이 아닌 그의 내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의 이상적인 여인상을 표현한 것이다. 어찌 보면 백석이 사랑한 란과 자야의 합성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초반의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는 구절에서는 ‘가난한’과 ‘아름다운’이라는 용어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나린다’는 부조화의 논리 가운데서도 사랑의 세계로 설정한 ‘푹푹 눈이 내리는’ 설경 속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다. 결국, ‘나타샤를 사랑은’ 하지만 눈이 내리는 가운데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시는’ 정경에서 이와 같은 비극성은 확인된다. 그러면서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라고 제안하다. 하얀 눈 속에 흰 당나귀를 타고 가는 몽환적인 설정부터 현실로 다가올 수 없는 사랑에 관한 소망이자 바람이다. 시골은 현재 화자가 처해있는 도시와는 대척되는 지점이다. 그곳에는 나타샤와의 사랑을 훼방할 아무런 제약 조건이 없는 공간이다.
다음 연에서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나타샤는 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아니올 리’라는 구절을 통해 그가 처한 현실과는 달리 나타샤가 오지 못할 이유를 마음속으로부터 제거하고 오리라는 강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는 구절을 통해 나타샤가 자신의 가슴 속에 들어와 임재하고 있으며 그와 사랑을 속삭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논리적 설정은 나타샤와의 사랑을 방해하는 세상, 즉 사랑의 저해조건을 피해 도피하는 심리적 설정을 호기 있게 표현한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사랑의 세계를 상징하는 설경의 나라에서 여전히 ‘눈은 푹푹 나리’고 그 세상에서는 여전히 ‘아름다운 나타샤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디선가 몽환적 사랑의 표상인 흰 당나귀가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라며 심리적 환경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백석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그의 사랑에 관한 외롭고 쓸쓸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삶 속에 펼쳐진 세계를 회피하지 않고 문학작품 가운데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leegy4712@empas.com*필자/문학평론가(문학박사).고려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