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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역사 박혁거세 신라를 찾아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던 힘은 ‘화랑도정신

강동민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2/06/05 [10:47]
북부여 다섯 번째 단군(지도자의 명칭)인 고두막한(高豆莫汗)의 딸 “파소(婆蘇)”가 남편 없이 임신하여 낳은 아들이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이다. 박(朴)씨의 시조 성(姓)인 ‘박’이란 말의 뜻은 본래 “밝다” “환하다”는 뜻인데 우리나라의 모든 성씨 중에 제일먼저 생긴 성씨라고 한다.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고씨의 터)의 촌장인 소벌도리의 추천으로 6부 촌장들이 모여 그들의 지도자를 결정하였다고 전하니 그의 나이 13세였다. 신라4대 임금인 석(昔)탈해의 석씨는 일본(日本) 시마네현 이즈모(出雲)에서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분명 박씨 출신인 것은 확실한데, 그곳에서 새로운 성씨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곳에 ‘썩’ 일찍 도착하였다고 하여 “스가-->석”으로 변하였다고 언어 역사학자 고 박병식선생은 자신의 저서에 기록하고 있다.

▲ 강동민     ©브레이크뉴스
시마네현 이즈모 출신으로 약 300년 간 일본 제2기 야마도 정권에서 천황 다음 제2인자 권력을 누렸던 “소가일족(蘇我一族)의 이름풀이는 <소가=석(昔)>”인데 “스가하라(菅原)라는것은<소가 벌(蘇我原)>이라는 말이고 ‘석’씨라는 말이며”, 신라에서 돌아온 수꾸나히꼬나=다께우찌노 스꾸네 (석탈해의 후손: 17대 김내물왕의 혁명으로 도망쳐 살아온 신라 제16대 석흘해왕의 손자)“를 말한다.

신라의 첫 시작은 현 중국의 안휘성 ‘사로(斯盧)’지역에서 먼저 건국하여 ‘계림(鷄林)’ ‘사로’라는 나라로, 고구려와 백제의 속국으로 있었으나 차츰 힘을 길러 독립하게 되었고, 4세기경에는 한반도 동남쪽 ‘가야(伽倻)’의 한부족지역인 서라벌(경주)에 ‘독립신라’를 만들었다. 한반도 경주신라에서 처음 시작하여 중국에 ‘신라방’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다른 기록으로는 신라의 초기 위치는 요동(遼東) 부여의 옛 도읍지 장당경(藏唐京)인데 여기를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피해간곳, 한(韓)의 땅 즉 밝은 땅인 진한(辰韓)이 있던 산서성 임분(臨汾) 쪽(요임금의 무덤이 있는 곳) 이라고 하였다.

또한 후한서 동이전에는 대부여의 도읍이 있던 땅인 산서성 임분시 일대라고 하였으며,
한단고기에는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동명(東明)이라고 나라 이름을 붙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어서 성을 김씨로 하였다.(新羅人自以少昊金天氏後 故姓金氏) 또 노나라 공자의 6대조가 살았던 송(宋)나라는, 옛날 은(殷)나라의 제후국이었는데,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증거로 ‘환(桓)’씨가 있었으며 사마(司馬)라는 벼슬을 하여 환사마(桓司馬) 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김(金)씨도 이미 오래된 성씨로 있었다고 송나라의‘노사’라는 책에는 기록되어있다.

신라는 그 시작이 고조선과 같은 뿌리인 6부 촌장들의 추대로 임금을 뽑았으며 만장일치제도인 ‘화백제도’를 시행 하였다. 신당서 동이전 신라조에는 화백제도에 대하여 “국가가 일이 있으면 반듯이 여러 사람과 의논해 결정한다. 한사람이라도 이의(異議)가 있으면 그만 두었다.” 수서 신라전과 당서 신라 전에도 화백제도가 보인다. 당서(唐書): 事必與衆議 號和白, 一人異則罷
 
그러나 이곳 또한 고구려의 속국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백제와 더불어 중국 쪽 ‘사로신라’와 한반도 ‘경주신라’로 각각 2개의 신라가 존재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백제 또한 중국 쪽 발해. 산동성. 강소성 백제와 한반도 부여. 공주로 둘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의 일파인 부여에서 갈라진 훈족(중국 측 기록=흉노)과 그 훈(환=훈: 밝다는 뜻의 환)족에서 파생된 선비족의 영향을 직접 받은 신라는 뿌리가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졌기에 삼국사기는 “조선의 유민(朝鮮遺民 分居山谷 之間)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조선(朝鮮) 이라는 말은 ‘아사달=밝은 땅. 광명 땅’이란 우리 고어를 시대와 장소에 따라 한자로 표현 하는 것이 각각 다른데 조선. 고죽(孤竹). 심양(沈陽). 조양(朝陽). 평양(平陽). 일본(日本) 등도 어원은 모두 ‘밝은 땅’이란 우리 고어로 연결 된다. 부여의 일파인 훈족들이 치열한 전쟁을 하면서 서쪽으로 이동하며 만든 나라들이 돌궐족(터키)과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이듯이, 훈족들의 한부분인 선비족(鮮卑族)들이 만든 나라가 중국 진시황의 진나라이며 수나라이고. 연(燕)나라이기도 하다. 훈족들은 한나라 초기부터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크게 승리하여 한나라로부터 약 200년 간 조공을 받는 것은 물론 한나라의 공주까지 조공 받았다. 한(漢)나라는 한고조 유방으로부터 훈족에게 매년 조공하면서 그들의 자존심 상한 표현으로 그들의 기록에 훈족을 흉노(匈奴)로 노비 노(奴)자를 붙여 모든 사서에 표현하였다. 훈족의 지배자들은 고조선의 영향으로 해(태양: 밝음)를 숭상 하였으며 선비족 또한 이와 같았다.

훈족(흉노) 두만의 아들 모돈(冒頓, 목특, 목돌)이 기원전 3세기에 부족들을 연합하여 훈 제국을 건설하고, 제위에 올라 “탕리고도선우(撑犁孤塗單于, TengriKodo Danwu)"라고 호칭 하였다. 국왕의 호칭 단우(單于)를 중국식으로 ‘선우’라고 보통 읽는데 ‘단우’라고 고조선 식으로 읽는 것이 옳다. 단(單)은 훈제국 두만의 성씨 단(檀)과 같은 것으로서 “단(單=檀)”이다. ‘우’는 ‘왕’ ‘제왕’을 가리키는 고조선 용어이며, ‘단(檀)’은 ‘밝달족(고조선족)’ 후예임과 ‘천(天)’의 뜻을 담고 있다. ‘탱그리’(撑犁)는 ‘천(天)’, ‘고도’(孤塗)는 ‘아들’(子)의 뜻이니 천자(天子)를 의미한다.
 
신채호 선생은 흉노(훈)가 고조선족 후예와 같은 문화를 가진 사실을  1. 3성(姓)의 귀족이 있음이 신라와 같고  2. 좌우현왕(左右賢王)이 있음이 고구려, 백제와 같으며  3. 왕공을‘한’(汗)이라고 함이 삼국의 ‘간’(干)과 같고  4. 왕후(王后)를 ‘알씨’(閼氏)라고 하는 것이 ‘아씨’의 번역일 것이며   5. ‘휴도’(休屠)는 그 내용이 삼한의 ‘소도’(蘇塗)와 같다고 하였다.(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신용하 저, 참고)
 
신라 김씨의 시조 중에 김일제<金日磾, BC134~BC86)는 훈족(흉노) 휴도왕(休屠王)의 아들이며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사 담당자 였는데 한(漢)나라 한무제와의 전쟁에 패하여 잡혀올 때 제사 기구를 들고 한무제에게 바치니, 한무제가 좋아하며 묻기를 ‘황금으로 만든 제사 기구는 너의 나라 보물이 아니냐.’ 라고 말하며 성씨를 금(金)=김씨로 정하여 주니 그때부터 ‘김씨’가 되었다 고한다.

사기 흉노전. 한서, 표기(驃騎)열전에 휴도왕을 죽이고 그가 사용하던 제천금인(祭天金人)을 거두었다. 제천금인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금으로 사람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흉노족은 금을 숭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권8 중애기(仲哀紀) 에도 신라는 눈부신 황금의 나라라고 하였고, 부여와 고구려의 공식 복장에는 금, 은으로 장식 한다고 기록되어있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금관은 모두 합하여 10여점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금관이 금령총, 진평왕릉(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경주교동 발굴 등으로 무려 8점이나 된다.

한서(漢書) ‘김일제 열전’은 휴도왕의 태자(김일제)가 어릴 때 한나라에 끌려와 황문(黃門)에서 말을 키우고 살았는데, 후에 ‘망하라’(莽何羅)라는 인물 형제의 반란을 막은 공으로 투후(秺侯)에 봉해졌다고 한다. 산동성(山東省)의 투후가 되어 7대를 한나라에서 벼슬을 하였고, 후손이 한나라 10대 원제(元帝: BC49~BC33)의 왕후 ‘왕’씨 가문 출신인 ‘왕망’(王莽: BC 45~BC25)의 ‘신(新)나라’ 건국에 일조 하였으나 왕망에게 결국 배신 당했음을 ‘산동통지’는 기록하고 있다.
 
삼국통일의 주역 제30대 문무왕(661~681) 김인문의 비문 일부가 1769년 처음 발견되었고 그 후 200여년이 지난 후 1961년 또다시 경주 동부동의 한 주택에서 없어진 상단부가 발견되었는데, 그 비문에는 문무왕의 조상인 신라 김씨 가계가 적혀 있었다. 그곳에는 신라 김씨의 조상을 흉노라고 하였으며, 문무왕의 15대조를 ‘성한왕(星漢王: 김일제의 7대손) 이라고 밝히고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했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

한국고대사와 관련된 당나라 금석문을 조사해온 권덕영(역사관광학) 부산외대교수는 2009. 4.22일 신라 김씨의 시조가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이며, 조상이 흉노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해 무제(武帝: 재위 BC141~BC87) 때 시중(侍中)에 임명되고 투정후(秺亭侯: 투후)에 봉해졌던 ‘김일제’라고 기록한 ‘대당 고김씨부인 묘명(大唐 故金氏夫人 墓名)’을 발견 했다고 밝혔다.

함통(咸通) 5년(864) 5월29일 32세로 사망한 재당 신라인 김공량(金公亮)의 딸 김씨 부인의 생애를 정리한 묘지명은 1954년 중국 섬서(陝西)성 서안(西安)시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도 출토 되었다. 진서체로 3행에 걸쳐 ‘대당 고김씨부인 묘명’이라고 새긴 덥개돌(43.5 X 44cm)과 23행에 최대 27자씩, 총593자의 예서체 명문이 기록된 지석(46.5 X 45.5cm)이 함께 발견돼 현재 서안의 비림(碑林)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김씨 부인은 ‘구당서’ ‘신당서’ ‘책부원귀’ 등의 사서들에 신라인으로 기록된 ‘김충의(金忠義)’의 손녀이자 김공량의 딸이다. 라고 적혀 있다. 김충의 부자는 당나라 조정에서 벼슬하며 화가이자 기술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묘지명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먼 조상이 ‘김일제’라고 언급한 부분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법흥왕 김원종(金原宗)의 성과 이름을 모태(募泰) 또는 모진(募秦)이라고 되어 있는데, 양서(梁書, 당나라 학자 요사렴<姚思廉>의 저서)에 신라 법흥왕 즉위 8년 서기521년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면서 내용을 기록하기를 신라 임금의 성은 ‘모(募)’ 이름은‘진(秦)’이라고 하였다. 남사(南史, 이연수<당나라 학자>의 저서)에는 법흥왕의 성을 ‘모(募)’ 이름을‘태(泰)’기록하였고, 통전(通典, 당나라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모진(慕秦)’으로 적고 있다. ‘삼국사기 역주’에 이병도 박사는 ‘어떤 오해로 인한 것인 듯하다’라고 풀이 했다.
 
1988년 경북 울진군 봉평리에서 발견된 ‘봉평신라비’의 법흥왕 즉위 11년 서기524년 세운 비석에는 법흥왕을 ‘모즉지(牟卽智)’로 표시되어 있으니 ‘모(牟)’는 성이요 ‘즉(卽)’은 이름이고 ‘지(智)’는 존칭으로 풀이 하니, ‘모(MO)' 가 성(姓)인 것이다. 23대 법흥왕은 지증왕의 큰아들인데, 법흥왕 이전까지 신라 김(金)씨 왕들의 성이 ‘모(MO)'였음을 알 수 있다. 법흥왕의 남동생과 법흥왕의 딸이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진흥왕’인데, 자기들 끼리 근친상간을 통하여 왕족을 유지하는 ‘골품제(성골, 진골제도)’를 하였으며 초원 문화를 가진 모용선비족인 기마세력의 면모가 보인다.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는 가야와 신라의 유물에서도 발견된 ‘국호 91호 신라의 기마인물상’과 같은 형태, 훈족의 이동식 취사도구인 ‘청동 솥을 말의 잔등이에 싣고 다닌 것’을 볼 수 있다. 법흥왕은 개혁군주로서 처음으로 불교를 수용 하였으며, 법흥왕(法興王)을 이은 진흥왕(眞興王) 때부터 처음으로 성을 ‘김(金)’으로 기록 하였다. 진흥왕 재위 25년(564년) 북제에 사신을 보낼 때 신라왕의 성명을 ‘김진흥(金眞興)’으로  ‘북제서(北齊書)’에 적혀 있다. 또한 수서(隋書)에 수나라 문제 14년(594년), 신라 진평왕(김진평: 金眞平)이 사신을 보내왔다고 기록하였으며 이후 신라왕의 성을 김(金)으로 분명히 적고 있다.

법흥왕이 숨지고 진흥왕 6년에 ‘이사부와 거칠부’등 왕실종친들이 만든 국사부터 신라 김씨 왕실의 정통성을 안정되게 하고, 국사 편찬을 통해 통치이념을 세우고 영토 확장에 전력 하였다.
신라 국호는 503년 지증 마립간 4년, “우리시조님께서 나라를 세워 22대에 이르도록 다만 방언(方言) 만을 취하고 존호(尊號)를 바로 잡지 못하였으니, 지금 신하의 모든 의견에 의하여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리소서.” 국호와 존호를 정하는 대목이 이러하다.
그 전에는 ‘사로’ ‘시라’ ‘서라벌’등의 새로운 땅, 밝은 땅 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가 이때야 비로소 나라이름이 “신라(新羅)”로 확정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야. 신라. 고구려. 백제 4국을 통일한 신라의 힘의 원천은 “화랑도(花郞道)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흥왕(540~576 재위) 때에 나라를 흥하게 하는 인재양성의 필요성에의해 ‘화랑도’를 만들고 ‘화랑국선(花郞國仙)’을 세워 교육기관으로 정식 제정 하였다.

화랑도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전사(戰死)를 명예로 여기는 순국지향주의(殉國至上主義)로 가득차 있었고, 불의와 타협 하지 않는 정의의 길을 걸었으며, 진골 귀족을 비롯하여 하급귀족, 일반평민 출신 등 여러 신분소유자로 구성하였지만 추구하는 공동 목표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단체로서 골품제도의 갈등 조절 완화에도 기여하는 집단 자체가 철두철미한 하나의 전사단체인데,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와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삼국통일 후 최치원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신라 고유의도(道)이자 종교인 ‘풍류’를 선사(仙史)에 있다고 하였으니, 유. 불. 선 삼교는 이미 내재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신과 인간과 자연의 소통과 하나 됨을 추구하는 풍류는 신라의 고유종교이며 정신이고 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 단군조선이 군사적으로도 강했던 점은 동이(夷)족의 상징인 ‘큰활 단궁’을 만들어 보유하고 있었다는 장점도 잇듯이, 군사적으로 제일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 중 첫째가 ‘화랑도정신’이었다면 둘째는 우수한 무기를 개발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최고의 무기인 천보이상 날아가는 ‘쇠뇌노(弩)’를 가지고 있었는데, ‘쇠뇌노’의 기술을 탐낸 당나라 황제가 기술자‘사찬 구진천(仇珍川)’을 불러 당나라에서 쇠뇌노를 만들도록 협박 회유하였으나 30보에서 60보까지만 날아가는 것을 만들어주고 더 이상 기술 전수를 하지 않았던 내용이 삼국사기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였다. ‘임진왜란’당시 ‘이순신장군’이 서해와 남해 그리고 부산에서까지 28전 28승 전승(戰勝)을 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우수한 두뇌와 해군의 단결력과 확실하고 세밀한 전술 전략도 있었고, 일본보다 몇 배 더 멀리 날아가는 ‘대포’와 ‘철거북선’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닥쳐올 미래에 일본이 힘이 넘치면 또다시 우리나라를 침략 하려고 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제안컨대 우리나라의 무기를 깊이 연구하는 분들이 앞장서서 위성을 통해 ‘레이저’로 공격 할 수 있는  ‘고성능 레이저무기’를 미리 개발해 놓고 있다면 효과적인 방어와 공격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 ‘화랑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현 중국 안휘성(安徽城)의 소림사에 무술을 연마하는 스님단체로서 그 흔적이 지금도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와 당나라간의 교역할 때 품목이 적혀있고 자연 재해 현상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는데 보통 교역기간은 한 달을 넘기지 않았음을 볼 때, 당시 당나라 수도가 서안(西安)이었으니 ‘안휘성 사로신라’와 거래가 많았고, 지진 및 자연재해와 기후 등을 참고 한다면 한반도 ‘경주신라’는 4세기 이후인 것을 재삼 확인 할 수 있다.

당나라와 신라의 교역품목 중 눈에 뛰는 것은 ‘신라 금(실크)과 신라 침판(나침판)’이 있는데 ‘신라침판’이 신라가 없어진 자리인 송나라의 4대 발명품이 되어있는 ‘나침판’이다.(사로신라사: 오재성 저, 참고)
 
우연히 동창회 장소에 갔다가 우리나라 역사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데 나의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우리가 배워왔던 한반도 안의 신라, 백제, 고구려만 알고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신화’라고 하며 열을 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사업하는 친구가 이정도 라면, 역사학자로써 밥그릇이 달려있는 교수들은 얼마나 완고하게 고집 부리고 잘못된 논문을 고치려 하지 않을까를 생각해보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중국과 일본은 국민들의 자부심을 위하여 이웃나라인 우리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고 역사의 상한선을 높이고자 노력하는 것이 결사적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원래 있던 역사도 신화라는 이유로 없애버리고 실증사학이라는 이유로 잘라버렸으니,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 의해 날조되고 왜곡 축소된 역사만 배우고 있다.

아시아의 종가집이요 큰집이란 의미는 상고대 우리민족의 역사인 한인 하나님시대와 한웅시대를 거쳐 단군조선시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자랑스러운 역사이며, 중국과 일본을 만든 민족, 한자와 일본어의 뿌리가 우리말임을 연구하여 밝히고, 새롭고 올바른 우리민족의 역사를 바로 고쳐 기록하는 학자들이 하루 빨리 나타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여본다.
hanminjock1944@hanmail.net

*필자/강동민. 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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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태공 2012/09/07 [19:26] 수정 | 삭제
  • 한민족 문화 이사장님 우리역사 글 보고 우리역사를 중앙아시아 중국대륙을 우리역사로 편입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전공하신 선생님들이 노력해주세요
  • 대학교수 2012/06/09 [13:41] 수정 | 삭제
  • 중국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권이 또 가짜 만리장성을 압록강 위 "단동"까지

    벽돌로 쌓고 있다.

    북경 서쪽 음산산맥의 음산이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고 한것을 명나라 때 가짜로

    하북성 산해관 갈석산까지 만리장성을 연장 건설 하였는데 또 중국이 작난하고있다.
    여기에 우리정부와 식민사학자 집단 단체인 "동북아 역사재단"은 아무말도 못한다.
    식민사학자들은 자기들이 잘못쓴 논문을 고치지 않고 버티고있고,

    도리혀 잘못된 논문을 고수할려고 잔꾀를 쓰고 있고,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되든말던 자기 개인만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학자들을 "역사매국노"라고 불러준다.

    99.99%의 학자들은 역사매국노들의 말이 옳은 줄로 안다.

    현실이 이러하니 공무원들은 더모르고 일반백성들 또한 더욱더 모른다.

    우리역사가 올바로 적혀야 자라나는 젊은 학생들이 자긍심과 자부심이 생겨

    애국심이 저절로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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