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삼각산축제에서 한인 한웅 단군왕검에게 올리는 삼성제를 지내고 있다.
금년 칠석제를 종묘 앞에서 지내기로 장소사용 승낙을 받았다고 차배옥덕 여성향토문화원 원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종묘에서 칠석제를 지내기로 한 데엔 이유가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과 왕후 노국대장공주 두 분이 칠석제를 지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되살려 보자는 이유 때문이다.
첫 칠석제를 차원장과 선유도에서 지낸지 8년이 되었다. 이 해에 칠석제에 대한 세미나를 열고 칠석제의궤七夕祭儀軌를 만들었다. 작년 칠석제에서 나의 식구들인 한국전통제례연구원 식구들과 함께 궁중의례의 중사中祀 형식으로 칠석제에 참가하였다. 조선왕조에서 전조前朝인 고려왕에 대한 제사를 명산대천에서 중사형식으로 지내왔으므로 그 형식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인천제, 한웅천왕, 단군왕검의 신위
이렇게 8년 동안 역사천문학회 식구들과 지냈던 칠석제는 삼성제례三聖祭禮를 남자제관을 여자제관으로 바꾸어 지냈던 제례였다. 이 제례에서 삼성제례 연구로 석사학위를 딴 김용자 선생이 주로 팽주가 되어 주었다. 이 제례에는 차를 하는 여자 분들이 참예하였다. 이들 제례는 모두가 삼헌관三獻官이 제사지내는 삼헌제례였다.
그런데 공민왕께서 칠석제를 어떻게 지내셨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고려사>를 뒤져보니 예상했던 대로 홀기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칠석제를 만들었을 때 삼헌관칠석제를 만들었을 때처럼 새로이 공민왕 왕후 류의 칠석제를 복원해야 하였다. 왕이 친제지내는 형식(친사의親祀儀)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형식을 살리기로 하였다.
기록을 검토하면서 보니, 절은 재배로 하였고, 제사는 삼제三祭로 지낸다고 하였다. 삼제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제사를 두 분이 지내는데 잔을 3번 올리는 것으로 해석하여 이 형식으로 공민왕 왕후 칠석제를 복원할 생각이다.
여기에서 祭祀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제사에서 제祭자는 夕+又+示가 결합된 문자이다. 일몰 후에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의식이 제사라는 말이다. 시示자에는 해와 달과 북두칠성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祭는 일몰 후에 해와 달과 북두칠성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행하는 의식이라는 뜻인데, 일몰 후에 이러한 의식을 할 수 있는 경우란 天地神明에게 올리는 天祭와 地祭가 이에 해당할 것으로 본다.
해와 달과 북두칠성은 달리 말하면 天符三印이다. <단군신화>에서 한인이 한웅에게 전수하는 천부삼인을 말한다. 天符라는 말은 하늘의 기호, 즉 별들을 의미한다. 별들이 인간에게 符作이 되는 경우에 天符라 말한다. 그러므로 祭는 인간에게 부작이 되는 천부, 즉 해와 달과 북두칠성에게 올리는 제사라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 역사에서는 한인 한웅 단군왕검 3분이 천부삼인의 지위에 오르면서 천부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천지인이라는 철학적 사유가 가능해진 것이다. 한인을 천으로 보고, 한웅을 지로 보고, 단군왕검을 인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당시에 <천부경天符經>이 있어서 천부경적 수리체계로 천지인을 사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천일天一 지일地一 인일人一이라는 사유가 가능하였고, 그 순서를 한인= 1, 한웅=2, 단군왕검=3으로 정하여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으로 하였다. 한인을 天으로 보고, 한웅을 地로 보고, 단군왕검을 人으로 본 것이다. 이리하여 삼헌제사三獻祭祀가 가능해졌다.
굿에서는 삼신三神을 청배하여 굿을 한다. 이 굿을 삼신제석, 칠성거리, 칠성제석이라고도 한다. 이때의 삼신은 삼신할매를 뜻한다. 삼신할매는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라는 신관神觀에서 나온 것으로, 마고삼신, 칠성님의 의미를 갖는다.
한인 한웅 단군왕검 3분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삼성三聖이라고 하였다. 이분들을 구월산에 있는 三聖祠에 합사하여 모시고 조선을 세운 10월 3일을 택하여 제사를 모시면서 삼성제례三聖祭禮라 하였다. 
정신이 올바른 국민의 대표가 모여야 할 국회. 정신이 부실한 국민이 정신이 부실한 국회의원을 뽑아서 국회로 보내는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삼성제례를 부활시켜 보는 것이 국회의 부실화를 막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시황 8년에 단군조선이 진에게 멸망했는데, 이때 마지막 단군인 제47세 고열가단군이 황해도 구월산에 들어와 삼성사를 짓고 제사를 모셨다고 생각된다. 이 삼성사의 당주는 女巫였고, 이 여무는 세금을 많이 내는 부유층에 속했다.
삼성 제를 지낼 때는 나라에서 당상관의 제관을 임명하여 향초를 보내어 제사지냈다.
조선왕조에서는 단군의 부父를 단웅檀熊(한웅桓熊)이라 하였고, 조祖를 한인桓因이라 하였다. 이분들을 삼성이라 칭하고 祠宇를 지어 제사지냈다. 이 사우가 삼성당이다. 삼성을 모셨으니 삼성사三聖祠라 한 것이다. (<성종실록> 권 15 성종3년2월 壬申) 그러나 나라에서 제사를 폐하자 사우가 퇴락하였다.
그러나 현령 신효원이 수리하여 다시 제사지내면서 삼성사를 삼성당이라 하였다. 신상神像을 목상木像으로 만들어 모셨는데, 태종 때 하륜河崙의 주청으로 목상을 폐하고 위판位板을 만들어 모셨다. 제사 때 신위를 모시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한인천제는 남향, 한웅천왕은 서향, 단군왕검은 동향으로 하였다. 또한 삼성당의 서쪽 협실에는 산신(九月山大王)을 南向하게 하여 모셨다. 아울러 왼쪽에는 토지지신土地祗神, 오른쪽에는 四直使者를 역시 南向하게 하여 모셨다.
<세종실록> 권 40 세종 10월 6일에는 고려조에는 조선 때 구월산은 阿斯達이라고 했는데, 신라 때 궐산厥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고려 高宗 때 산 이름을 구월산으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구월산 동족 산마루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대에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북벽에는 檀熊天王(桓雄天王), 동벽에는 桓因天王(桓因天帝), 서벽에는 단군천왕(檀君王儉)을 모셨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권 128 五禮 吉禮 序例에는, 檀君王儉을 中祀로 모시는데, 仲春仲秋에 朝鮮檀君에게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나라에서는 한인천제와 한웅천왕에게 제사지내지 않았다. 그 대신에 箕子와 高麗始祖를 제사지냈다. 그러므로 이들 두 분에 대한 제사가 삼성사를 지키는 무당의 몫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때 단군왕검의 신위는 한인천제의 신위를 모실 때 남향했던 때와 같이 남향으로 모셨다. 축판祝板 은 소나무로 만들되, 길이가 1척尺 2촌寸, 넓이가 8촌寸, 두께가 6푼分이었다.
또한 생뢰牲牢는 양羊, 시豕 각 1마리를 올렸다. 무당이 굿을 하는데, 이 유습이 그대로 전해져 소 1마리, 통돼지 1마리를 올리는 풍습이 된 것이다.
찬실도饌實圖는 삼성시대의 것은 나와 있지 않고 단군왕검, 기자, 고려시조 합사제사 때의 찬실도가 나와 있다. 이때 삼헌三獻이 욕위褥位(절하는 자리)에 나가는 순서를 좌로부터 初獻 亞獻 終獻의 순서로 하였다. 삼성제 때는 한인을 중앙에 모셨고, 한웅을 왼쪽에 모셨고, 단군왕검을 오른쪽에 모셨다. 삼성의 위계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제기는 옛날에는 금은金銀으로 만들어 썼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사기沙器로 만들어 썼고, 후대에 유기鍮器로 만들어 썼다.(<성종실록> 권 15 성종3년2월 壬申)
절법은 단군왕검시대의 절법인 삼육구배三六九拜를 따랐다. 삼배三拜의 절법을 확대한 것이 삼육구배의 절법이다. 지금 제사지낼 때 간혹 헌잔獻盞을 촛불 위에서 3회 좌선左旋하는 경우를 보는데, 이 역시 3을 중시해온 예라 할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로는 삼헌의 제도는 우리 고유의 제사법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제사법이 유교제사법이라고 하더라도 중국의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임금이 친제할 때 재배했다고 했으니 이 풍습이 어떻게 하여 생겨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번 종묘 공민왕사당 앞에서 올리는 칠석제에는 절법을 재배로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