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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이 전해 온 과정

대한민국 창조경제 역사문화 콘텐츠 천부경

노중평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8/25 [21:23]
1. 「천부경」이 생긴 곳 

「천부경」이 생긴 곳으로 볼 수 있는 곳은 「부소보서扶蘇譜序」에 기록이 있는 풍주배곡風州倍谷이다. 풍주는 한인천제시대에 한국의 9주 중 1주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부소보서」는 한인천제가 그곳에서 기묘년에 한국을 세웠다고 하였다.「천부경」이 한인천제 때부터 구전되어 왔다고 했으니, 풍주 배곡에서부터 구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배곡倍谷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중원中原을 중심으로 볼 때, 중원의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원의 서쪽이라면 마고의 바람인 영등풍瀛登風이 불어오는 곳으로 볼 수 있다. 팔풍八風에서 서쪽에서 부는 바람을 영등풍이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중원의 서쪽이라면 곤륜산맥 남쪽에 있는 티베트(토번)이다. 티베트에서 동쪽인 신강성新疆省도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풍風은 사막의 바람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곡谷은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볼 수도 있다. 이곳이 배달은 아닐지? 아니면 타클라칸 사막을 가리고 있는 천산 산맥의 북쪽에 있는 알타이 산맥일 수도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에 있는 파미르고원이 배곡과 배달일 수도 있다.

필자는 倍谷과 倍達에 붙은 倍의 어원이 같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글로 읽으면 배곡은 배꼽 골짜기로, 배달은 배꼽이 있는 들판으로 읽을 수 있다. 배곡은 한국시대에 썼던 문자이고, 배달은 배달나라시대에 썼던 문자일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최치원 선생이 「천부경」을 후세에 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천부경」이 최치원 선생에 의하여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볼 필요가 있다. 

2. <천부경>을 전승해 온 곳

「삼성기」 상편에, “뒤에 한웅桓雄씨가 계속 일어나 천신天神의 뜻을 받들어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내려왔다. 여정자정女井子井에 천평天坪을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邱로 정했다. ....또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하시고 나라를 배달倍達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이 글은 한웅천왕이 배달나라를 세우면서 국도를 신시에 정했다는 기록이다. 배달나라의 위치는 백산과 흑수 사이이고, 천평이다. 여기가 배달나라에 속한 청구국의 위치이다. 그는 청구국의 도읍을 신시에 정했다.

여정자정女井子井은 남쪽과 북쪽에 우물을 파서 국도의 방위를 정했다는 말이다. 이 시대에 나침반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방위를 정했다고 볼 수 있다.

천평天坪은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있는 지명이다. 한웅천왕은 배달나라를 세우기 전에 먼저 천평을 청구靑邱로 정했다. 신시는 신에게 제사지내고 물물거래를 하는 곳이다. 그때가 호혜경제시대이므로 계원들이 모여서 거래를 하던 곳으로 볼 수 있다. 

청구칠성.jpg

 청구칠성

<천상열차분야지도> 남방주작칠수南方朱雀七宿의 진수분야軫宿分野에 청구칠성靑邱七星을 정하여 청국구의 위치를 천문에 기록으로 남겼다. 이곳을 지금의 탁록으로 볼 수 있다. 신시의 도읍이 바로 청구칠성이라 볼 수 있다. 

한웅천왕은 신시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이름을 배달이라 불렀다. 배달이란 배꼽들판으로 볼 수 있는 말이다. 중심지로 해석되는 말이다. 탁록을 탁록지야涿鹿之野라 하였고, 탁록지야를 포함한 중원中原을 판천지야阪泉之野라 했던 점으로 보아서 중원일대를 천평이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용도龍圖로 기록된 「천부경」

한웅천왕은 국도를 천평에 정하고 정사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용도龍圖로 되어 있는 「천부경」을 녹도문자鹿圖文字로 기록하게 하였다. 「천부경」이 문자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용도란 무슨 뜻일까? 필자는 용도가 암각화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암각화라면 구상화로 되어 있는 암각화와 추상화로 되어 있는 암각화 의 둘로 볼 수 있다.

용도로 볼 수 있는 암각화가 남해 낭하리에 있는 암각화이다. 추상화 되어 있으면서 글자의 형태로 볼 수 있는 암각화가 이 암각화이다. 한웅천왕이 배달나라를 건국하면서 용도를 녹도문으로 기록하라 했으니 녹두문으로 기록되기 이전까지는 이런 그림의 형태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그의 『조선사연구』에서, 낭하리 암각서를 그림문자로 판독하여, “수레의 뒤에 사냥개를 달고 짐승을 쏘고 새를 쏘면서 가는데 고기가 노는 물이 있고 그 건너에 깃대를 꽂았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필자에겐 이 암각화가 제사장면을 모사한 그림으로 보인다.

낭하리 암각화.jpg
 낭하리 암각화

낭하리 암각화 해석.jpg
낭하리 암각화 해석 


이 그림에서 제사의 방향은 오리온 별자리로 볼 수 있다. 오리온 별자리는 제물을 진설해야 할 방위이다. 오리온 별자리 중간에 허리띠처럼 있는 삼태성 밑에 인간을 벌하는 벌성이 있기 때문에 제사의 방위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벌성이 하는 일은 법들 지키지 않는 자를 벌하는 일이다. 벌을 받지 않으려면 법을 지켜야 하고, 제사를 지내서 법을 지겼음을 고하는 것이다.

제물이나 시동신상은 인간의 형상이거나 제물의 형상으로 볼 수 있다. 시동신상은 신주로 모신 사람이고, 제물은 사냥한 제물로 볼 수 있다. 이때에 제기가 발명되지 않았으므로 제물을 요리하지 못하고 통째로 올렸다고 생각된다. 당시엔 기껏 요리할 수 있는 것이 불에 끄슬리는 번제의 형태였다. 

제물 앞에 있는 제관은 잔을 올리는 제관이다, 뒤에 있는 제관은 절을 하는 제관이다. 집사는 3인이 있는데, 제1집사는 잔을 올리는 제관을 돕고, 제2 집사는 제물을 올리는 일을 돕는다. 제3집사는 절하는 제관을 돕는다. 제물 곁에는 솟대가 서있다. 제물과 제관 사이는 경계를 두었다. 

이 그림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이 하늘에게 사람이 드리는 제사이다. 사람이 하늘롸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제물을 올린다. 이리하여 천지인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 제사에서 하늘은 1이고, 제관은 2이고, 집사는 3이다. 숫자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천부경」적인 사유가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천부경」과 제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3. 「天符經」이동 

『삼한관경본기』에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웅천왕이 이곳에 들러 머무르시며 사냥도 하고 제사도 지냈다고 하는데, 풍백은 천부를 새긴 거울을 들고 앞서서 나갔고, 우사는 북을 쳐서 울리며 주변을 돌면서 춤을 추었고, 운사는 1백명의 무사를 데리고 백검佰劍으로 호위하였으니, 무릇 천제가 산으로 갈 때의 의장행렬이 이와 같이 성대하고 엄중하였다.”고 하였다.

이때의 천부는 해, 달, 칠성을 새긴 명두를 말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이 시대에 이미 「천부경」이 세상에 있었다는 것이다. 

한웅천왕은 천제를 지내려고 태백산에 갔었고, 남해의 낭하리에도 갔었다. 단순히 천제를 지내기 위하여 전 국토를 돌아다녔다는 데엔 설명이 필요한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필자가 보기엔 여기엔 2가지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는 천산에서 시작된 인종이동이 마고에서 한인을 거쳐 한웅에게 오는 동안 남해 낭하리가 마지막 코스가 되었으리라는 점이고, 둘째는 「천부경」을 전파하는 코스가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천부경」은 녹도문자로 기록된 경이거나, 최치원 선생의 한자본 「천부경」이다.「천부경」은 단국시대檀國時代의 하백河伯을 통하여 후대에 전수되었을 것으로 필자는 본다. 

1). 적제赤帝 축융祝融 한인의 후손 곤오昆吾가 서숙진西肅愼을 나와 동숙진東肅愼으로 들어가면서 소성蘇姓에 봉해졌고(소성을 사성한 분은 단국의 홍제洪帝였다), 그가 하백이 되었으므로 그에 의하여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하백이 도읍한 곳이 비서갑菲西岬(무소갑扶蘇岬)이다. 이곳에 「천부경」을 교육할 수 있는 소도蘇塗를 지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12명산名山 : 조선의 11세 도해 단군이 12명산에 국선國仙의 소도를 설치하였다. 그는 여기에 박달나무를 심고, 가장 큰 나무를 한웅천왕을 상징하는 웅상雄常으로 삼았다. 12 명산 소도에서 「천부경」을 가르치며 전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국선의 소도라 하였다. 국선은 국가에서 임명한 신선神仙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국선의 소도는 국선이 관리하고 운영하는 소도로 볼 수 있다. 이들 12명산이 조선시대에 완검들의 순시코스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 한반도와「천부경」

부천에는 삼한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천부경」의 이동경로를 추론해 낼 수 있는 2개의 지명이 있다.

하나는 三韓時代에 馬韓에 속했던 優體牟涿國이라는 지명이고, 다른 하나는 부천에 속한 素砂라는 지명이다. 

1. 優體牟涿國 : 優體는 牛體의 변음으로 볼 수 있고, 소를 의미한다.

牟는 삼한시대 이전에 山東半島에 있었던 牟國의 약자이다.

涿은 涿鹿에 있는 탁록과 涿水의 약자이다. 그래서 모국+ 탁록=모탁이 된다. 모탁이 지금의 부천富川이 되었다. 여기 에 지명이동의 역사가 있다.

조선이 秦에게 멸망한 이후에, 모국이 있었는데 모국이 齊 에게 멸망하여 소래를 거쳐 지금의 부천 땅에 정착하였다.

탁록은 하북성 기주冀州 탁록현에 있었는데, 황제가 치우천 왕을 탁수에서 수공水攻으로 멸망시키면서 주민들이 산동 반도로 이주했다가 제가 모국을 멸망시키면서 주민이 부천 땅에 이주하였다.

2. 蘇萊 : 소도蘇塗를 운영하는 래이족萊夷族이라는 뜻이다. 소도를 운영하는 족장族長을 하백(하백은 강이나 바다를 관장하는 왕이라는 뜻이다)이라 하였다. 시흥始興의 관문이 소래蘇萊 이다. 발해만渤海灣에서 바로 올 수 있는 곳이다.

3. 素砂 : 소사素砂는 부천에 속한 소사이다. 우체모탁국에 속한 素砂 라는 뜻으로 볼 수 있는 지명이다. 소사의 砂자는 신라 초 기의 지명인 沙涿과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밝혀 보기로 한다.

BC 600~650 경에, 산동반도에 있었던 모국에서, 하백으로 있었던 소성蘇姓 출신의 한 족장이 전국시대 초기에, 신흥국가인 제齊의 공격을 받고, 부족을 이끌고 소래에 상륙하였다. 소래의 蘇는 소성을 가진 소벌도리의 선조를 말하고, 萊는 그들이 산동반도의 발해만에 살았던 래이족萊夷族이라는 뜻이다.

“양나라 때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양직공도梁職貢圖’를 보면 ‘백제국기百濟國記’를 인용하여 ‘백제는 옛날의 래이萊夷이며 마한족이다’라 했다. 래이는 우이와 함께 청주靑州, 즉 오늘의 산둥성 일대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하나다(『書經』우공편). 산둥성 래산萊山 밑에 살아서 그들을 래이萊夷라 불렀는데, 래산은 바로 오늘의 칭다오(靑島)와 옌타이(烟台) 일대다.”(카페 ‘한류열풍’)

소성을 따른 부족이 후에 신라를 건국한 6부족이였다. 후에 신라를 건국한 육부촌장이 거느리는 부족집단의 족성이 蘇, 李, 孫, 崔, 裵, 薛이었다. 이들 중에서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육부촌 화백회의의 장이었다.

이들 중에서 素砂의 砂자와 관련이 있는 부족은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소벌도리이다. 그는 처음에 형산兄山 쪽으로 들어왔는데, 그곳을 사량부沙梁部라 하였다. 沙梁部는 沙涿部라는 말이다. 량을 道로 읽고 또한 涿으로도 읽는다고 하였다.

육부족 중에서 우체모탁국의 牟자와 관련이 있는 부족은 孫姓이 인솔한 부족이다. 그들이 정착한 곳을 점량부漸梁部(혹은 점탁부漸涿部) 또는 모량부牟梁部였다. 모량부는 모탁부牟涿部라는 말이다. 牟涿이라는 말에서 마한에 속했던 우체모탁국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는 6부촌이 소래로 들어와서 우체모탁국을 건설했다가 백제의 세력이 커지자 이곳을 버리고 경주 쪽으로 내려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중에서 소도의 관리자인 하백이었던 소성에 의하여 「천부경」이 전수되었을 것으로 본다.

신라 말에 고원 최치원 선생이 묘향산의 석벽에서 각자刻字한 「천부경」을 발견하고 이를 한역漢譯하여 후세에 전했다고 했는데, 그의 성인 최성崔姓이 6부촌에 속한 성이었으므로 최성에게 전수되어 오다가 마지막에 고원 최치원 선생에게 전수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천부天符는 천부삼인天符三印, 혹은 천부인天符印의 줄임말이다. 이렇게 보면 명두明斗에 나타난 해, 달, 북두칠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명두는 천부삼인의 변음으로 이 말은 삼성당에 걸린 천부삼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삼성당은 나라에서 삼성당무당을 임명하여 당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삼성당 무당의 역사는 삼성당을 지으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천부삼인을 보존해 온 무교를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림으로써 「천부경」도 함께 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옛 것은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역사를 옛 것이라고 버리기 시작한지 오래 되어 우리역사가 1만년이 되는지 5천년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 역사가 우리역사인지 중국의 역사인지도 구별하지 못한다. 역사뿐만이 아니다. 문화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다. 

우리가 미신이라는 누명을 씌워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린 무교를 역사에서 다시 찾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가 버린「천부경」도 다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무교는 우리 상고시대 역사에서 나온 종교이다.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 조선에서는 무교를 무천舞天이라고 하였다. 무천이란 무당 여자(무녀)가 하늘을 향하여 춤을 춘다는 말이다. 지금도 굿에서는 무녀가 하늘을 향하여 춤을 추는데 그 형식이 다양하다.

붉은 색의 덧옷을 입고 붉은 색의 갓을 쓰고 춤을 추기도 하고, 흰 장삼을 입고 흰 고깔을 쓰고 춤을 추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시대의 군복인 장군복과 조선왕조시대에 가수나 무희가 임금님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출 때 입던 옷인 창부 옷을 입고 춤을 추기도 한다. 이때 추는 춤을 거성擧聖이라고 한다. 

거성은 “성인이 움직인다”는 말이다. 단군왕검이 살아계셨을 때는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와 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과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을 “성스러운 세 분의 임금”이라는 뜻을 가진 삼성三聖이라고 하였다. (<선조실록> 권 89 선조 30년 6월 경오) 거성은 이분들이 거동하신다는 뜻이다. 

붉은 덧옷과 붉은 갓은 춤추는 무당(무무巫舞)이 삼성을 굿판에 모시기 위하여 입는 무당 옷이다. 무당이 겉모양새를 이렇게 차리고 거성을 하면 이상하게도 단군왕검이 찾아오신다. 이때 찾아오시는 단군왕검의 영을 황해도 굿에서는 [초감응]이라고 하고, 한양굿에서는 [도당]이라고 하고 『무당내력』이라는 책에서는 그냥 ‘성령’이라 하였다. 

조선이 진시황 8년(BC 239)에 진에게 멸망했을 때 제47대 고열가 단군이 황해도 구월산에 들어가 사당을 지어 삼성당三聖堂이라 부르고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당주무당을 세우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이 전통은 조선왕조가 일제에게 멸망하기 직전까지 이어져 왔다.

조선왕조시대엔 당주무당을 삼성무당이라고 하였고, 세종 때 기록을 보면 나라의 도성 안에 국무가 20명이 있었다. 무당은 신당신세神堂神稅를 내었다. 무녀와 경사經師가 공포貢布와 신세포神稅布를 내었다. 무당들이 개인 별로 업세를 내었는데, 국무가 구리 9근, 삼성무가 구리 6근을 내었다. 일반무는 구리 1근을 내었다. 국무가 낸 업세는 국가에서 녹을 먹는 동서반 정·종 2품이 내는 구리 9근과 같았고, 삼성당무가 내는 업세는 정·종 4품이 내는 구리 6근과 같았다. 

고열가 단군이 무슨 이유로 여자 무당을 삼성당의 당주무당으로 임명했을까? 단군조선은 왕검의 적통을 이어 왕검의 자리를 계승할 때 14,000년 전에 마고 할머니가 물려준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주어 적통을 잇게 하였다. 이 유습은 마고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천부삼인’은 해와 달과 북두칠성을 새긴 돌이나 구리거울이다.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들어오면서 돌에 새기던 천부삼인을 구리거울에 새겨 세상을 떠나는 왕검이 새로 임명될 왕검에게 주었다. 

그러나 조선이 멸망하면서 왕검이 없어지므로 천부삼인을 주어야 할 대상이 없어져 버리자, 천제를 지낼 때 왕검 곁에서 무당춤을 추었던 여자 무당이 천부삼인을 이어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당주무당이 ‘천부삼인’을 인계받으면서 이름을 명두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명두明斗란 해와 달과 북두칠성이라는 뜻이다. 

삼성당에는 삼성을 신상으로 만들어 모셨는데, 신을 모시는 단의 가운데에 한인천제를 모시고 왼쪽에 한웅천왕을 모시고 오른 쪽에 단군왕검을 모셨다. 그러나 조선왕조 태종 때 하륜이 신상을 위패로 바꾸자고 건의하여 신상이 위패로 바뀌게 되었다.

유신들에게 삼성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평양에 삼성사三聖祠를 다시 지었고 단군왕검의 위패만을 옮겨갔다. 그리고 한인천제와 한웅천왕의 위패를 모시지 않고 버리고, 고구려시조 고주몽과 고려태조 왕건의 위패를 바꾸어 모셨다. 

이런 일이 있자, 삼성당이 있었던 황해도 문화현에는 전염병이 돌아 현에 살던 백성들이 모두 전염병에 걸려 처참하게 죽고 말았다. 조상들이 나라에 재앙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나라에서 문화현을 없애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성종실록> 권15 성종3년 2월 임신) 

유교는 제사를 지낼 때 제사에 모실 조상을 4대의 조상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무교에서는 4대 조상을 뛰어 넘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모든 조상을 뜬 조상이라고 하여 굿을 할 때 불러들여 대접한다. 뜬 조상 대접을 소홀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신 내린 사람이 무당이 되는 내림굿을 할 때도 제일 먼저 허주굿을 하여 뜬 조상을 대접한다. 조상을 숭배하는 사상이 굿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허주란 뜬 조상이라는 말이다.

「천부경」은 명산 소도에서 왕검들이 가르쳐 왔으므로 조선의 마지막 단군왕검인 고열가 단군도 삼성당에서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천부경」이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한동안 「천부경」의 행방이 묘연했다가 고원최치원 선생 대에 와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최치원 선생에 의하여 달려지게 되었다는 것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최성은 신라를 세운 육부촌장 성 중의 한 성이므로 육부촌의 족장이었던 소벌도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성이 「천부경」을 가르쳤던 소도를 운영해 왔던 성이었기 때문이다. 

『태백일사』 의 「蘇塗經典本訓」에, “「천부경」은 한국에서 말로만 전해오던 글이니 한웅대성존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이를 기록하게 하였다. 최고운 치원 역시 일찍이 신지의 전문篆文을 옛 비석에서 보고 다시 이를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라 하였다.

고원 최치원 선생을 조상으로 하는 최씨 문중에 전해 오는 묘향산 석각본의 「천부경」말고 지금 세간에는 고려시대 농은 민응부 선생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는「천부경」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 「천부경」은 2종류가 있다.

천부경1.jpg
   두 경은  몇자가 다르다.

 
(필자 소설가 한민족원로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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