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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황족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5)

박관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11/01 [11:24]
지난 4회에서 돌아오는 2014년에 서거 50주년을 맞이하는 의친왕비의 생애에 대하여 뒤돌아 보는 시간을 가진 바 있다.
 
이제 5회부터 다시 의친왕의 생애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서술하기로 하겠다.
 
▲ 의친왕     ©브레이크뉴스
1893년 김사준의 딸과 길례(吉禮)를 올린 의친왕은 이듬해인 1894년 9월에  고종황제의 황명(皇命)에 의하여 일본에 보빙대사(報聘大使 :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대사) 자격으로 파견되었으며, 40여일 동안 활동한 이후에 귀국하였다.
 
1895년 10월 8일에 한 나라의 국모가 일제의 무사들에 의하여 시해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인하여 고종황제와 황태자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며, 조정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의친왕은 이러한 상황에서 궁을 떠나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였으며, 그로부터 불과 5일후에 다시 고종황제의 황명(皇命)에 의하여 특파대사로 임명되어 영국을 비롯한 6개국을 순방할 계획을 세웠으나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임명된지 40여일만에 특파대사에서 사임하게 되면서 순방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점이다.
 
1896년 의친왕은 일본으로 가게 되며, 그 이듬해인 1897년 1월말에 일본을 떠나 미국의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워싱턴에 머물던 의친왕이 다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 이후 당시 조선왕실에 거대한 전환점을 이루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탄생이었다.
 
거슬러 올라가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조선왕실은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는데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엄 황귀비의 계략(計略)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황제와 황태자가 극비리에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빠져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896년에 일어난 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이다.
 
이러한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인하여 조정에 친러내각이 출범하였으며, 러시아 공사관에서 엄 황귀비가 승은(承恩)을 입어 왕자가 태어나니 그가 바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는 영친왕이었다.
 
사실 최종적으로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엄밀히 말하여 서열로 볼 때는 그 보다 20년연상인 의친왕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여러가지 환경이 의친왕보다 영친왕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고종황제는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서 자연히 국정의 중심은 친일에서 친러내각으로 변모하게 되며, 결국 조정 중신들의 간청을 받아 들여 1897년 2월 고종황제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였다.
▲ 의친왕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환궁(還宮)이 이루어진 이후 드디어 1897년 10월 12일 현재의 조선호텔이 위치한 원구단에서 천제를 올리고 황제의 위에 올라 대내외적으로  조선이 이제는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천자 즉 황제가 통치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이제 506년의 조선왕조의 시대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나라인 대한제국 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대한제국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거슬러 올라가서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고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하여 조선의 많은 백성들이 볼모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였는데 고종황제는 그러한 악연(惡緣)의 쇠사슬을 과감히 끊어 버리고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명하고 연호를 건양(建陽)이라고 하였으며, 그 이후에 다시 광무(光武)로 변경하였는데, 이것은 이제 조선이 더 이상 청나라의 제후국이 아닌 자주적으로 독립된 국가라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2년후인 1899년 의친왕은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는데 처음에는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시에 있는 웨슬리안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바로 이 학교에 재학중에 당시 영문학과에 재학중이던 하란사를 만나게 되며, 이러한 하란사와의 만남은 훗날 고종황제가 파리강화회의에 특사로 의친왕과 하란사를 결정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백인 청년들에게 중국인으로 오인받아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것이 한미 양국간에 외교문제로 까지 비화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외국청년들의 폭행사건이 일어난 이후 의친왕은 1903년 학교를 버지니아주 로아노크 대학교로 옮기게 되며, 여기서 김규식을 만나게 된다.
 
그런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가지 규명할 점이 있는데, 의친왕이 로아노크 대학교로 옮긴 해가 1903년인데 의친왕의 5녀 이해경이 1996년 로아노크 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한 의친왕과 함께 있는 김규식의 사진을 촬영한 시점이 1901년이라는 점이다.
 
1901년이라면 김규식은 로아노크 대학에 재학중인 상황이며, 이 사진을 통하여 분석한다면 어떠한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웨슬리안 대학에 재학하고 있던 의친왕이 김규식을 만나러 로아노크 대학을 방문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의친왕이 김규식을 로아노크 대학에서 만나기 전에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이미 웨슬리안 대학 재학시절부터 김규식과 친분관계가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이후 의친왕과 김규식은 버펄로에서 열린 남.북미 박람회에도 함께  참석하였으며, 1902년 의친왕은 당시 L.A를 방문하여 안창호에게 미국에 있는 우리동포들의 복지향상을 위하여 금일봉을 전달하기도 하였는데 이 무렵은 을사늑약이나 경술국치가 일어나기 전이라 군자금의 성격은 아니지만 백성들을 생각하는 의친왕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의친왕의 신분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니, 1900년 8월 17일 기존의 의화군에서 의친왕으로 진봉(進封)하였으며, 마침내 5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쳤다.
 
그런데 의친왕의 미국 유학시절에 일본에서 의친왕을 황제로 추대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일심회(一心會) 사건이었는데, 사실 이 사건은 의친왕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고종황제가 황태자 책봉하는데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으로 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그 사건의 전모(全貌)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 보고자 한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해인 1895년 내부대신 박영효의 주선으로 노백린,이갑,유동열,어담 등 114명의 유학생들이 국비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 가운데 21명은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을 거쳐 1898년 12월 일본육사 11기생으로 입교하였고 이듬해 11월 졸업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들은 국내의 배일(排日)적인 분위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면서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결국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일심회(一心會)”라는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혈맹서(血盟書)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대황제(고종)와 황태자(순종)을 폐위시키고 의친왕을 황제로 추대한다.
 
둘째. 일본에 망명중인 사람들로 새정부를 구성한다.
 
그런데 여기서 미묘한 문제가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의친왕을 황제로 추대한다는 부분이었는데 이 사건이 일어난 1902년은 의친왕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던 시기이며, 황제추대는 의친왕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종황제는 의친왕을 경계하게 되며, 그로부터 5년이후에 이루어진 황태자 책봉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보는 필자의 시각은 비록 의친왕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개인적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 점은 있으나 일심회(一心會)에서 의친왕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다는 점은 그야말로 그의 재능에 견주어 볼 때 의미심장한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일심회(一心會) 사건은 결국 그 이후 국내사정이 호전되면서 가담하였던 인사들이 전부 귀국하였으며, 혁명결의도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는데, 나중에 이 사건이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지만 증거가 없어서 모두 석방되었다.     
  
한편 의친왕은 미국유학생활을 마친 이후 1905년 8월 귀국을 위해 일본 동경에서 8개월 체류한 이후에 드디어 오매불망 그리워 하던 고국으로 돌아오니 때는 1906년 4월 7일이었다.
 
귀국한지 3일후인 4월 10일에 대한제국 육군부장으로 임명되며, 이어서 4월 19일에는 참모관으로 임명되었다.
 
3개월 후인 7월 12일에 고종황제의 칙령(勅令)에 따라 창립한 대한적십자사 제4대 총재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의친왕이 귀국한 해인 1906년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의친왕이 비밀리에 천도교에 입교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러한 근거는 필자가 입수한 천도교 경성교구(京城敎區)의 천민보록(天民寶錄) 제3호에 의친왕의 가족명단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는 점을 밝혀 둔다.
구체적으로 천민보록(天民寶錄)은 1911년 8월 17일 천도교 종령 제88호에 의해서 작성된 것으로서 이것은 일정한 기준이상의 독실한 교인들을 가족단위로 이름을 기록해 놓은 교인명부(敎人名簿)라 할 수 있다.
 
의친왕과 천도교의 관계와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있는데 의친왕의 호가 춘암(春菴)이며, 더불어 의친왕의 많은 부실(副室)들의 당호(堂號)가 수관당으로 부터 시작하여 수인당,수현당,수경당,수덕당,수완당,수길당이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천도교에는 도호(道號)가 있는데, 끝에 남성은 암(菴)을 여성은 당(堂)으로 하는 것으로 볼 때 의친왕의 호(號)와 부실(副室)들의 당호(堂號)가 이러한 천도교의 도호(道號)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저술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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