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한국은 이웃에 위치해 있고 어느 의미에서 보면 일부에서 말하듯이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적인 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막부시대 약 200년을 제외하면 이웃사촌이라는 관계라기보다는 이웃원수라는 관계로 유지되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두 나라의 관계가 이처럼 이웃원수로 악화된 것은 오로지 일본의 침략적인 태도 때문이며,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우호적인 태도에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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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관은 처음부터 침략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교역이나 문화교류 보다는 누가 어떻게 한반도를 침략했느니, ‘임나(任那)국’이 한반도 남단에 있었다는 주장 등 주로 침략사실을 내세우는 것으로 고대한일 관계를 다루었다. 그것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부추겨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시대 한국과의 교역이 중시되고 이황의 주자학 등 유학이 일본에 전파되어 무사들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준 과정에서 일본의 지배층이 한국의 학문과 문물을 선호하였으나, 그것이 한국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친화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정한론은 이미 명치유신 전부터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었다. 그 주 내용은 일본의 국력배양을 위해서 한반도를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막부말기 하야시 슌사이(林春濟)는 한반도는 일본의 신화에 나오는 신인 “스사노오 노미고도(素戔鳴尊)가 경력한 곳으로, 이 신이 삼한의 조(祖)”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발상은 외세위기가 고조되면서 팽창주의적 한국관의 기초가 되었는데, 그 앞장을 선 것이 1785년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을 저술한 하야시 시헤이(林子平)와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였다. 이들은 한국과 류구(琉球) 등이 일본의 국가 방위에 깊은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국방의 강화와 팽창주의 정책만이 일본의 국가이익을 위해서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서 국방논의가 더 활발해지면서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는 한국정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방면을 할당하여 대총(大銃)과 화전(火箭)을 앞세워 함경, 강원, 경상, 충청지역으로 공격하도록 제의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한반도가 일본의 국방에 중요하다는 하야시의 한국관을 진일보시켜 한국정복을 국가 정책목표로 채택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국학연구자였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1854년 유수록(幽囚錄)을 통해 양이들이 일본을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베리아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과거 한국이 일본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를 정복하여 다시 복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이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발상이다. 하시모도 시나이(橋本佐內)는 1857년 일본도 서양의 국가동맹체를 모방하여 한국과 중국을 병합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만주와 한국을 병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막부의 고관인 이다구라 가쓰기요(板倉勝靜)는 사쓰마, 죠슈 세력의 도전에 따른 국내 체제위기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을 틈타 한국과 중국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 후일 사쓰마와 죠슈를 도와 명치유신에 협력하게 된 막부의 신하였던 가쓰 가이슈(勝海舟) 역시 유럽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을 설득하였다가 응하지 않으면 정복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한론의 주장들이 메이지유신의 지배층에 영향을 주어 한일합방의 근원적인 논리를 제공하였다.
지금 국수주의로 치닫는 일본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집단적 자위권 강화를 추진하는 그들의 내면(혼내)에는 바로 정한론이 작용하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해본다. 반성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다. 언젠가 그들은 독도문제를 앞세워 우리와의 한판 승부를 벌리려 할 것이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는 일본인의 본심을 꿰뚫어 보며 그날을 철저히 대비하면서 독도문제와 향후 일본과의 관계를 처리해나가야 할 것이다. hjy20813@naver.com
*필자/하정열. 박사, 시인, 예비역 소장,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