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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황족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7)

박관우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11/18 [11:28]
1907년 북한산성 거사가 결행된지 2년후가 되는 1909년 10월 의친왕이 경남 거창군 소재 위천(渭川)의 전(前) 승지(承旨) 정태균을 방문하여 1개월동안 머무르면서 이 지방의 뜻있는 우국청년들과 북상(北上)의 사선대(四仙臺) 일대를 장차 의병의 근거지로 확보하려는 목표하에 일부 땅을 매입하려다가 발각되어 서울로 호송(護送)되었다.
 
그 이듬해인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 13년의 역사를 포함하여 1392년 이성계가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태조로 즉위하면서 시작된 519년의 조선왕조의 역사가 단절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대 의친왕 항일운동의 첫 신호탄이라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일어 났으니 1911년 봄에 의친왕과 손병희는 극비리에 우이동에서 회동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심도깊은 의논을 하였다.
 
이어서 8월에 손병희가 우이동을 다시 방문하여 주변의 땅 3만평을 매입하게 되며, 그 이듬해에 봉황각(鳳凰閣)을 세웠다.
 
▲사진은 의친왕이 최진동 장군에게 보낸 족자(최진동 장군의 증손자 최학철님이 제공).     ©브레이크뉴스
봉황각은 3.1운동의 발상지(發祥地)라 할 수 있는데, 필자는 3.1 운동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봉황각에서 7년동안 치밀한 계획이 준비되었으며, 결국 고종황제의 국장(國葬)이 중요한 명분이 되어 거족적(擧族的)인 운동으로 승화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단서가 있으니 봉황각에서 3년에 걸쳐서 49일 수련회라는 명분으로 여러차례 천도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교육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33인 대표 중 15명이 배출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의친왕과 손병희가 우이동에서 회동할 당시에 항일운동과 관련된 의견교환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그러한 회동의 구체적인 결실이 바로 봉황각의 완공으로 보는 것이다.
 
경술국치가 일어난지 5년후가 되는 1915년 의친왕은 상해에서 이상설,박은식,신규식,조성환,유동렬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에서 고종황제를 당수로 추대하고 북경으로 망명시키려고 할 때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당시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서울로 잡입한  외교부장 성락형을 비롯하여 의친왕의 장인 김사준,김사홍,김승현,변석붕,김위원,심인택,박봉래,정일영,염덕신,이경창 등 관련자가 1915년 이후 전부 투옥되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보안법위반사건(保安法違反事件)이었다.  
 
이러한 “보안법위반”사건이 발생한 이듬해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大韓獨立義軍府 總司令)으로 활동하였던 임병찬이 타계(他界)하였으며, 여기에 의친왕이 추모제문(追慕祭文)을 보냈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의친왕이 임병찬과 교류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1907년 북한산성 거사를 신호탄으로 시작된 의친왕의 항일의지를 상징적으로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한혁명당이 추진하였던 고종황제의 북경망명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국권회복을 향한 고종황제의 항일의지는 변함이 없었는데, 이러한 그의  항일의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파리강화회의 파견이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이준,이상설,이위종이 고종황제의 밀명에 의하여 헤이그로 파견되어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호소하려다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준 열사는 현지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으며, 결국 이 사건의 여파로 고종황제는 강제퇴위가 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경운궁(慶運宮)에서 유폐(幽閉)가 된 상황에서도 국권을 회복하려는 그 의지는 변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과 웨슬리언 대학 동문인 하란사를 함께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러한 중대한 거사를 앞두고  뜻밖에 붕어(崩御)를 하면서 그러한 계획이 중단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계획이 중단된 이후 결국 1918년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김규식을 한국대표로 파견하는 것을 추진하여 마침내 1919년 3월 13일 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일제침략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참여국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경술국치 이후 의친왕의 처소인 사동궁(寺洞宮)에는 일본경찰이 보초를 서면서 출입자를 감시했고, 궁내 사무실에서는 일본인 사무관이 유리창으로 감시하면서 의친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총독부에 보고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삼엄한 감시를 받아 가면서도 의친왕은 3.1운동 준비와 관련하여 손병희와 모의를 했던 사실이 1919년 11월 24일자로 총독부 경무국장이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밝혀져 있다.
 
[공은 즐겨 시정잡배와 왕래하였는데, 금춘(今春) 독립운동의 수모(首謨)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하였고 손(孫)이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狼狽)한 빛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러한 일제의 공식적인 기록은 의친왕이 3.1운동의 배후에서 손병희와 비밀리에 회합하고 모의를 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동궁의 위치가 3.1운동 시위가 일어난 파고다 공원 근처였고, 특히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태화관(泰和館)이 사동궁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공교롭게도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던 보성사(普成社)도 사동궁 근처인 인사동 골목에 위치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의친왕이 3.1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3.1운동 이후 그동안 의친왕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 알려져 있는 상해망명 탈출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일어났던 새로운 사건을 “최진동 장군”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근거로 소개하려고 한다. 
 
이 사건의 핵심은 1919년 늦가을 의친왕과 최진동 장군이 중국 단동(丹東)에서 극비리에 회동하여 그 이후 독립군 단체인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의미에서 최진동 장군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최진동 장군은 1883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서 만주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을 하나의 근거지로 하여  우리나라 독립군 3대 대첩중의 하나로 알려진 봉오동대첩(鳳梧洞大捷)의 주역으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물을 의친왕이 만났다는 점인데, 그 자리에서 의친왕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부분을 언급하였다는 것이다.
 
[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에게 무력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려면 무력으로 대처하여야 한다는 이치는 3.1운동을 통하여 얻어낸 결론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의친왕의 의견에 대하여 최 장군도 봉오동에 있으면서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두사람은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최 장군은 봉오동으로 다시 돌아가서 군무도독부를 조직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필코 되찾자는 비장에 찬 결의를 하고 의친왕과 훗날을 기약하였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미 초반부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1911년 봄에 의친왕과 손병희가 우이동에서 회동을 하여 그로부터 몇개월 후에 훗날 3.1운동의 발상지가 된 봉황각의 부지를 매입하여 그 이듬해에 완공한 것처럼 의친왕과 최장군의 회동이후에 최 장군이 군무도독부를 조직하였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우이동 회동과 단동 회동이 일맥상통(一脈相通)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런데 의친왕이 단동을 갔다면 그 구체적인 회동장소는 어디였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추정할 수 있는 장소를 언급한다면 그 곳은 바로 이륭양행(怡隆洋行)이라는 곳인데, 사실 일반적으로 이 명칭만 가지고는 이 곳이 어떤 곳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기회에 이 곳이 과연 어떤 곳이었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이륭양행(怡隆洋行)은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가 1919년 5월 중국 단동에서 설립한 무역회사인데 사실은 이 곳이 당시 상해임정 교통국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독립운동가의 망명,군자금모집,무기반입, 연통제운영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니, 아직 그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의친왕과 최 장군이 단동에서 회동하였다면 필자는 바로 이륭양행(怡隆洋行)에서 이루어 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 당시 최 장군을 수행한 인원은 3명이 등장하며 그 중의 한명이 이태성이라는 인물인데, 이런 것을 미루어 보아도 회동을 확신하는 것은 다소 이른 감이 있기는 하나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로서는 회동자체도 상징적인 의미가 크지만 이러한 회동이후 군무도독부가 조직되었다는 점인데, 이미 군무도독부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독립운동 단체이며, 봉황각이 의친왕과 손병희의 회동의 결과물이었듯이 군무도독부가 진정 의친왕과 최 장군의 회동 결과물로 조직된 것이라면 의친왕의 항일운동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있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공식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기서 의친왕과 최 장군의 회동이후 조직되었을 가능성이 큰 군무도독부란 과연 어떤 단체였는지 알아 보기로 하겠다.
 
군무도독부는 무장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서 1919년 최진동 장군이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吉林省 汪淸縣 鳳梧洞)에서 조직하였는데, 특히 이 단체가 중심이 되어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과 안무의 국민회군(國民會軍)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대파(大破)하였다.
 
이와 더불어 의친왕과 최 장군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는 새로운 증거를  최초로 공개한다.
 
그것은 1939년 최 장군의 막내 아들이 출생하였는데, 이러한 소식을 의친왕이 전해 듣고 이기권을 통하여 막내 아들의 이름과 함께 출생을 축하하는 족자를 최 장군에게 전달하였다는 점인데, 여기에 의친왕이 최 장군에게 항일운동과 관련된 밀서(密書)도 함께 동봉하였다는 점을 주목한다.
 
사실 밀서가 현재 존재하고 있지 않아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지만 이러한 밀서는 의친왕의 항일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물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 장군에게 족자를 전달한 이기권은 당시 의친왕의 밀사이면서 동시에 사돈이었는데, 더불어 최 장군과는 동서가 되었으니 이렇게 본다면 의친왕과 최 장군은 겹사돈의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이 족자는 최 장군의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필자는 의친왕이 최 장군 아들의 탄생소식을 알게 된 이후 이름을 지어 주고 축하 족자까지 보낸 사실을 통하여 그가 평소에 최 장군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이상과 같이 그동안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의친왕과 최진동 장군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엄밀히 분석하여 단동회동(丹東會同) 사건은 가능성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의친왕이 최 장군에게 보낸 족자가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하며, 임병찬,손병희를 비롯하여 이렇게 최진동 장군과도 친분관계를 맺은 것을 보면서 과연 의친왕의 독립운동가 인맥은 어느 정도였는지 그 범위가 궁금하게 생각된다.
 
필자가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의친왕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실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과 접촉을 하였다는 사실인데, 앞으로 보다 정밀추적을 하다 보면 그동안 그의 항일행적과 관련하여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혜성같이 등장할 날이 도래할 것으로 믿는다. 
아울러 이번에 최 장군의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진실이 규명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공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구체적으로 1919년 9월 2일 당시 남대문역에서 하세가와 총독의 후임으로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을 향하여 폭탄을 던져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게 하였던 강우규 의사 의거(義擧)에 다름아닌 최 장군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연구 스타일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편인데, 그런 차원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지난 2010년에 의친왕의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최진동장군연대기”에서 의친왕이 1919년 중국 단동에서 최 장군을 만나고 더불어 1939년 의친왕이 최 장군에게 족자를 보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브레이크뉴스” 에 국내언론사로는 최초로 의친왕 일대기를 연재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다시 “최진동장군연대기”를 읽어 가다가 강우규 의사 의거에 최 장군이 관련되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3년전에 “최진동장군연대기”를 읽은 바 있는데 당시에는 의친왕과의 관련성에 촛점을 맞추다 보니 이 부분을 놓친 것인데, 이렇게 뒤늦게 나마 이런 사실을 알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다.
 
여기에는 최 장군이 강 의사에게 수류탄 2개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며, 바로 그것을 가지고 원산을 거쳐서 서울에 잠입(潛入)하여 9월 2일 남대문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변수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폭탄출처가 최 장군이 아닌 러시아인으로부터 구입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폭탄의 출처가 현재 최 장군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러시아인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필자는 오랜 세월동안 역사 속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을 추적하는 활동을 하였는데, 이번 같은 경우는 인물보다는 하나의 사건에 주안점(主眼點)을 두게 되었는데 그 핵심은 강 의사가 사용한 폭탄의 출처를 확실히 밝히자는 것이다. 
 
사실 필자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지는 불과 얼마 안되지만 이번에 조사하면서 느낀 것은 강 의사 의거가 발생한지 어느 덧 94주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필자의 역량으로 진실을 규명한다는 것이 역부족인 것을 인정하면서 현재까지 제기된 문제를 정리하여 소개하겠으니 독자 여러분께서 관심을 보여 주시기를 기대한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강 의사 의거에 사용된 폭탄의 출처는 최 장군과 러시아인으로 되어 있는데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첫째. 폭탄을 최 장군이 제공하였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근거는 “최진동 장군”에 나와 있다.
 
강 의사는 경술국치 이후 해외로 망명하였으며, 1916년 가족들을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전에 연변을 경유하였는데 당시 도문 월청 하소(下所)에는 강 의사의 친척들이 있었다는 것인데, 거기에서 강 의사 가족들이  체류하였다는 것이며, 여기서 그는 의술(醫術)을 통하여 주민들의 질병을 고쳐 주었으며, 최 장군이 강 의사가 하소(下所)에 임시로 체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봉오동으로 그의 가족들을 초대하였으니, 이것이 최 장군과 강 의사의 첫번째 만남인 것이다.
 
두번째 만남은 강 의사가 1919년 7월경에 다시 훈춘 일대를 방문하여 최 장군을 만나서 반일구국(反日救國)의 방책(方策)을 의논하고 최 장군으로 부터 수류탄 2개를 받아서 서울로 잠입(潛入)하여 마침내 남대문역에서 장렬한 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둘째. 강 의사가 러시아 하바로스크 청룡역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러시아인으로부터 50환을 주고 구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근거는 “노구를 민족제단에 바친 의열투쟁가 강우규”에 강 의사가 1920년 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 때 재판장이 심문하는 과정에서 밝힌 내용에 따른 것인데, 강 의사가 직접 진술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나 어떤 과정을 거쳐서 러시아인으로 부터 구입하였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으며, 더불어 폭탄을 제공한 러시아인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폭탄의 출처에 대하여 살펴 보았는데 과연 최 장군이 강 의사에게 폭탄을 제공한 것인지 아니면 강 의사가 재판에서 밝힌 것처럼 러시아인으로 부터 구입한 것인지 그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게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강우규 의사 의거는 3.1운동 이후 조선민족의 강력한 항일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통쾌한 거사라 할 수 있으며, 필자의 칼럼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의거가 발생한지 어느 덧 94주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 폭탄 출처의 진실이 명확하게 규명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저술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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