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의친왕 상해망명 탈출사건이 만약에 성공적으로 이루어 졌다면 당시 독립운동의 양상은 새로운 판도로 변화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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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더불어 이 거사와 관련하여 주목할 부분은 상해임정 요인 강태동이 중심이 되어 이왕직(李王職) 전의(典醫) 안상호와 의친왕의 간호부(看護婦) 최효신을 상해로 불러내어 미국으로 보내서 고종황제의 독살을 폭로할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실제 이루어 졌다면 독립운동에 미치는 그 파급력 또한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야심찬 계획이 결국 거사실패로 중단되게 되었으니 90년이 지난 오늘날에 생각해도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가 없다.
이제 의친왕의 1920년대 항일운동의 행적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기로 하겠다.
먼저 1921년에 발생한 대한민족 대표단 연명부 청원사건에 대하여 알아 보기로 하자.
대한민족 대표단은 국내외 우국지사들이 1921년 8월에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로서 건의서와 연명부를 만들어 11월 11일 부터 워싱턴에서 개최되었던 5대 열강회의에 제출하였던 것인데, 당시 갑신정변 주역의 한명이었던 서재필이 뉴욕에 대표단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국내에서는 이상재가 연락을 맡아 13도와 260여개군 기타 각 사회단체 대표자 372명이 서명하였다.
구체적으로 이 열강회의가 전후의 군비축소와 태평양 문제 그리고 원동정책을 확정했던 것이었으므로 한국문제 조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열강회의에 건의서의 내용이 반영되지는 못하였지만 독립의지에 대한 대외적인 선전효과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할 만한 내용은 의친왕이 당시 황족대표로서 서명한 것이었으니, 이것은 통한의 상해망명 탈출사건이 실패로 끝난 이후 사동궁(寺洞宮)에서 일제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던 의친왕의 지칠 줄 모르는 항일의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저술가.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