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도 교수신문이 선정한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도행역시(倒行逆施)’로 꼽았다고 합니다. 도행역시는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이죠. 도행역시는 <사기(史記)>에 실린 고사성어로, 춘추 시대의 오자서(伍子胥)가 그의 친구에게 “어쩔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부득이하게 순리에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고 말한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교수들은 “박근혜 정부의 출현 이후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역사의 수레바퀴를 퇴행적으로 후퇴시키는 정책과 인사가 고집되는 것을 염려하고 경계한다.”는 뜻으로 이 ‘도행역시’를 들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한국 최초의 여성대통령, 부녀대통령으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과거의 답답했던 시대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면서 안타까워 한 것 같습니다. 또한 “국정에서 민주주의의 장점보다는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더 많이 보인 한 해였다”고 박근혜 대통령을 평가한 것이지요.
물론 박근혜 정부 1년에 대한 평가가 전적으로 교수신문이 선정한 도행역시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체로 인사파행과 불통이미지는 인정해야할 것 같지는 않은지요? 인재풀의 외연(外延)이 좁은 것도 문제입니다. 여권 수뇌부는 나름대로 소통을 잘 한다고 하죠. 그런데 누구와 소통하는가요? 야당과 노동계 그리고 종교계, 서민들과 소통을 잘해야 그것이 진정한 소통이 아닌가요?
현 집권세력끼리도 소통이 잘 안 되는 모양입니다. 여당 안에서도 ‘친박’과 ‘비박’으로 나누어진다고 하네요. 그리고 ‘친박’은 또 ‘원박’과 ‘돌박’으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쟁에서 박근혜 후보가 이명박 후보에게 씁쓸한 고배를 마셨을 때 그 곁을 지켰던 정치인이 ‘원박’이고, MB에게 줄을 섰다가 이번에 대권을 잡자 박 대통령에게 다시 돌아온 이들이 ‘돌박’이라고 합니다. 그래가지고야 신의를 중시하는 박 대통령과 대화가 잘 될 리가 없죠.
“통하지 않으면 아프고(不通則痛), 통하면 아프지 않다(通則不痛)”는 의성(醫聖) 허준의 말이 있습니다. 오죽 불통의 이미지가 강했으면 연말연시의 건배사가 ‘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다’는 뜻의 『소화제』, ‘진실성과 정직성이 제일이다’는 의미인『진정제』가 회자(膾炙) 될까요? 아무쪼록 이 <소화제>와 <진통제>의 건배사가 권력의 사각지대, 복지의 사각지대,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힘겨워하는 이들의 아름다운 건배사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런데 이 올해의 사자성어 ‘도행역시’가 아무래도 잘못 선정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했다’는 질책이지요. 우리 [덕화만발]카페의 <석봉 조성학 선생의 한류와 글>방의 주인이신 석봉 선생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도행역시는 시류(時流) 천리(天理)에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이 맞습니다. 이렇게 네 자만 놓고 보면 적절한 성구라 할 수 있죠. 그러나 출전(出典)의 문맥은 오자서가 ‘시류와 천리에 역행하는 것이 불가피했노라’고 합리화한 것이 아닌가요? 그런 점에서 사려부족이라 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어떻습니까? 잘 못된 것을 합리화 시킨 것은 잘 된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올해의 사자성어를『일박서산(日薄西山)』이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서산에 걸린 해처럼 살날이 손꼽을 만하다.’는 뜻이죠. 나이 먹은 사람들의 한탄소리만이 아닙니다. 정권도 마찬 가지입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하지 않던가요? 10년은커녕 4년밖에 남지 않은 정권입니다. 부디 ‘소통과 화합’ ‘진실성과 정직성’이 통하는 그런 희락(喜樂)의 나라로 만들어 가시지요.
『일박서산(日薄西山)』이라는 말은 중국 한(漢)나라 때의 문인 양웅(揚雄)이 지은〈반이소(反離騷)〉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일락서산(日落西山)’과 같은 뜻이죠. 양웅은 명리(名利)에 연연하지 않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일생을 보낸 인물입니다. 조정에 중용되고 못 되고는 운명에 달린 것이며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굴원(屈原)의〈이소(離騷)>를 읽을 때마다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죠.
그러나 때를 만나지 못한 처지를 한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굴원의 행위에 대하여는 찬동하지 않았습니다. 양웅은〈이소〉에서 글을 따와 굴원의 행동을 반박하여〈반이소〉를 지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 “멱라수에 이르러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해가 서산에 지는 것을 두려워함이네.(臨汨羅而自隕兮 恐日薄於西山)”라는 구절이 있죠. ‘일박서산’은 이 구절에서 유래된 고사 성어라고 합니다.
무상(無常)이 신속(迅速)하여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서산에 걸린 해와 같습니다. 비록 오늘에는 있으나 내일은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죠. 하물며 사람 목숨보다 허망한 정권욕 때문에 서로 상극의 인연으로 치닫는 것은 대인으로서 할 일이 못 됩니다. 온 나라가 계사년(癸巳年)한 해를 온통 반목과 투쟁, 비방전으로 얼룩진 불통과 억지의 허송세월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놓고 서로 정의를 부르짖는다면 그건 이미 정의가 아니죠.
그럼 무엇을 일러 정의라 하는가요? 강자가 약자를 품어 약자를 나와 같은 강자로 키워내는 것이 강자의 도리입니다. 그 도리를 다하자면 대화와 소통과 포용으로서 길을 트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방법은 자리도 조금 나누어주고 무릎을 맞대고 설득도 하는 것이지요.
사람으로서 육도(六道 : 天上 人道 修羅 畜生 餓鬼 地獄)와 사생(四生 : 胎 卵 濕 化)의 세계를 널리 알지 못하면 이는 한 편 세상만 아는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육도와 사생의 이치를 두루 알지 못하면 눈앞의 일밖에 모르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윤회(輪回)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일박서산(日薄西山)입니다. 서로 위치가 바뀔 때를 생각하여 모든 갈등의 당사자들이 중도(中道) 중용(中庸) 중화(中和)로써 소통해 가야 하지 않을까요! duksan4037@daum.net
*필자/김덕권. 시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