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뉴스 2012년 1월 16일자에 국내언론사로는 최초로 종두인허원 경기도 대표로 활동하였던 증조부 박승석 선생을 소개한 이후 2014년에 몇편의 관련 칼럼을 기고하였다. 증조부가 49세가 되는 1913년에 종두인허원을 취득하게 된다는 것인데 어떤 이유로 이러한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보건복지부에 민원을 신청한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조사하였으나 그 내력을 규명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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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고종 2)에 탄생하였으니 올해가 어느 덧 탄생 150주년이라는 뜻깊은 해가 되건만 현재 남아 있는 증조부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1933년에 작성된 제적등본과 조선총독부 관보 1913년 4월 14일자 기사이외에는 찾을 수가 없다.
70평생 넘게 사신 분이거늘, 왜 이리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착잡한 심정 금할 수가 없다.
물론 거주하셨던 지역이 6.25전쟁으로 인하여 당시 관련 자료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증조부의 유품은 단 한점도 없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종두인허원 자격증이라 할 수 있는 종두인허장을 비롯하여 사진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간접적으로 나마 증조부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하나는 집안의 고모가 어머니께 말씀하신 내용인데 방골에서 증조부가 선비들이 착용하는 갓을 쓰신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필자가 2010년 연천에서 주민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알게 된 증조부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는 2017년이면 증조부 서거 80주년이 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서거하신지 100년도 안되신 것인데 어찌하여 증조부의 사진은 전혀 없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게 생각된다.
더군다나 올해가 증조부 탄생하신지 150주년이 되니 더욱 더 증조부의 모습이 그리워지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관련 칼럼을 통하여 소개한 바 있지만 증조부는 1913년부터 1935년 까지 20년 넘게 우두의사라 할 수 있는 종두인허원으로 활동하신 것으로 짐작되나 안타깝게도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오래전부터 뇌리속에서 가끔 떠오를 때 마다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었는데, 가사도 정확히 외지 못하면서 그냥 그 노래가 마음에 와닿았다.
그런데 최근에 그 노래의 제목이 비로서 “머나먼 고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결국 가사까지 전부 외우게 되었다.
가사를 외운 이후 이 노래를 혼자 자주 부르게 되면서 왜 이 노래가 그리도 좋은 것인지 그 의미에 대하여 분석해 본 결과 바로 “머나먼 고향”의 실체는 다름아닌 마음속에서 늘 그리워하던 증조부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그 노래를 주위에서 알려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기는 정확히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혼자 흥얼거리다가 증조부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에 가사를 완전히 외우게 되었던 것이다.
증조부께서 1937년에 서거하셨으며, 그로부터 26년 이후 필자가 태어난 것이니 생전에 전혀 뵙지 못하였지만 그분은 필자의 정신적인 지주이면서 동시에 “머나먼 고향”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통하게도 그런 증조부의 사진을 전혀 볼 수가 없으니 “머나먼 고향”을 통하여 증조부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래고 싶었던 것이다. pgu77@naver.com
*필자/박관우. 작가.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