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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후 정치권 뒤흔드는 남자 ‘성완종’

드라마틱한 인생…“맨손으로 시작해 맨손으로 갔다”

김범준 기자 | 기사입력 2015/04/20 [11:51]

▲ 성완종 전 회장은 자살 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강조했다.     © 주간현대


엄숙하게 진행됐던 발인식…정치인은 이인제만 참석
1000원으로 시작했던 사업…2조원대 기업으로 성장
모친 유훈으로 시작한 장학재단…2만5천명 혜택받아
MB 자원외교에 뛰어든 후 몰락해버린 ‘서산의 아들’


자살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다양한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 단돈 1000원으로 시작해 2조원대 대기업을 일군 ‘자수성가의 대가’. 3만여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선사한 ‘자선사업가’. 2000년 들어 정치권 입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고향 서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결국 금품 제공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선거법 위반 정치인’. ‘이명박 자원외교 수사’에 정면으로 저격당한 ‘MB맨’. 그리고 자살 전 박근혜 정권에 대선자금을 제공한 리스트인 ‘성완종 리스트’까지…. 이같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성완종 전 회장의 인생사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주>

 
[주간현대=김범준 기자] 지난 4월9일, 이명박 정부 해외 자원개발 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받다가 북한산 형제봉 매표소에서 300m 떨어진 지점에서 목을 매 자살한 성완종(64) 전 경남기업 회장에 대한 발인식이 4월13일 충남 서산 의료원과 인근 교회에서 진행됐다.

엄숙했던 발인식

이날은 다소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6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유가족과 경남기업 관계자, 조문객들은 이른 아침부터 고인의 마지막 길을 준비했다. 성 전 회장의 두 아들은 차분한 표정으로 발인에 임했다. 성 전 회장의 부인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흐느끼며 부축을 받는 모습이었다.

오전 8시 40분 서산중앙감리교회에서 진행된 발인예배에는 정치권에서는 유일하게 이인제 새누리당 의원과 홍상표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참석했다. 박성호 장례위원장과 김명회 시인은 인사말과 조사를 통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김 시인은 “이제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어머니 곁에서 편히 쉬시라”고 말했다.

한 서산지역 관계자는 “서산에 아까운 인재가 갔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고인은 서산 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한 사람”이라며 “서해안에 유류 사고가 났을 때 하루에 2∼3시간씩만 자면서 현장에서 뛰던 성 회장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고인의 장지는 어머니의 묘소 곁에 마련됐다. 성 전 회장의 아들은 “생전에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셨던 배지 네 개를 함께 묻는다”고 말했다. 고인이 가장 좋아했다는 사랑과 나눔의 배지, 회사 배지, 국회의원 배지, 서산장학재단 배지가 고인과 함께 묻혔다.

유족에 따르면 성 전 회장은 유서를 통해 아들에게 “집 한 채도 물려주지 못하고 떠나 미안하다”고 밝혔다. 또 고인이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설립한 서산장학재단을 계속 이어가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전해졌다. 성 전 회장의 아들은 장지에서 “세상이 당신을 외롭게 하고 오해해도 모든 것을 지고 지켜주기 위해 내려놓으신 점이 죄송하고 감사하다”며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장례절차가 모두 끝난 후 성 전 회장이 운영했던 충청포럼의 민병구 운영위원은 기자들과 만나 “고인은 기업을 하면서 무리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파렴치한 행동은 안 했다고 했다”면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말하고, 이루려 했던 소망들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장례 마지막 날인 4월12일까지 약 5500명의 조문객이 빈소를 찾았다. 전날까지 빈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친박 인사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친박계 좌장인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을 비롯해 윤상현, 박덕흠, 이명수 의원 등이 빈소를 찾았다. 서 최고위원은 이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과 전화도 했고 만난 것도 사실이다. 도움을 요청해온 것도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도 새누리당에서는 정몽준 전 의원, 원유철 정책위의장, 문대성 의원 등, 새정치민주연합에선 양승조 사무총장과 박수현 의원 등이 빈소를 조문했다.

성완종 전 회장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모친의 묘가 있는 충남 서산시 음암면 도당리에 묻혔다.

충청도의 정주영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성완종 전 회장은 초등학교 중퇴 학력에 100만원으로 2조원대 기업을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여러 번 정계 입문을 시도하다 2012년 총선에서 선진통일당 후보로 충남 서산·태안에서 당선됐지만 지난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었다.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성 전 회장은 1976년 서산토건을 인수하면서 건설업에 처음 뛰어 들었다. 이후 대아건설을 인수한 성 회장은 2004년 경남기업을 품에 안은 뒤 매출규모 2조원이 넘는 기업을 일궈내며 건설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무일푼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과 비교하기도 한다. 건설회사로 시작해 성공한 궤적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성 전 회장은 유년기는 가난과의 사투였다. 1963년 12월 매서운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날 밤. 고향 충남 서산을 나와 무작정 기차를 타고 어머니를 찾아 서울 영등포역에 도착한 12세 소년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다. 가진 것이라곤 외삼촌이 쥐어준 10원짜리 지폐 몇 장과 부친에게 버림받은 모친이 식모살이를 한다는 집 주소뿐이었다. 그때 얼굴도 본 적 없는 삼륜 용달차 운전기사가 떨고 있던 소년을 데려가 기사들이 머무는 좁은 방 한구석을 내줬다. 기사는 다음 날 아침 따끈한 국밥을 사줬고, 어머니가 있는 집에 데려다줬다. 매출 2조원의 건설회사인 경남기업을 일궜던 성완종 전 회장의 52년 전 모습이다.

어렸을 적에 성 회장은 서울 영등포의 교회에 머물며 신문팔이와 약국 심부름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밤에는 교회 야학에 다니며 초등학교 중퇴의 한을 달랬다. 성 전 회장은 “언젠가 나도 낯선 이들에게서 받은 도움을 갚겠다고 다짐하며 돈을 벌었다”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도 “네가 어려운 시절 받았던 도움을 잊지 말고 꼭 다른 사람을 도와라”고 자주 당부했다고 한다.

이처럼 초등학교 4학년에 중퇴를 하고 서울로 상경한 성 회장은 신문배달과 막노동, 운수중개업 등을 통해 종잣돈을 모았다. 7년 뒤인 1970년,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당시 돈 1000원으로 화물운송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악착같이 일을 하던 성 회장의 수중에는 조금씩 돈이 모였다.

20대 중반이던 1976년 당시 충청권 서열 3위의 건설회사 서산토건 오너였던 최순기씨가 개인사정으로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이 회사를 인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최순기씨는 성실히 일하던 성 전 회장에게 인수를 권유하였다. 당시 서산토건 인수금액은 200만원으로 성 회장은 사명을 대아건설로 바꾼 뒤 본격적으로 주택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성 전 회장의 대아건설은 플랜트 산업 설비 분야에서 토목주택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하며 1993년 코스닥에 상장, 1996년에는 서울특별시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의 중·도매법인 ‘중앙청과’와, 온양관광호텔을 인수하며 사업영역을 확장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1991년 미국의 비인가대학인 퍼시픽웨스턴대학에서 경영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95년 대한건설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성 전 회장과 경남기업의 인연은 2003년 시작된다. 주택건설을 통해 자본금을 마련한 성 회장은 해외시장 진출을 고민하다가 대우그룹에서 분리된 경남기업에 눈독을 들였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서 토목·건축 공사를 수행한 경험이 풍부한 경남기업은 당시 대우그룹에서 분리돼 독자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워크아웃이 진행되는 등 경영권 부침이 계속됐다.

2003년 대아건설을 통해 경남기업 지분 51%를 확보한 성 회장은 이듬해 경남기업을 흡수합병하면서 회장 자리에 올랐다. 한때 경남기업 매출액은 2조원이 넘어서며 성 회장은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장학재단 설립

회사가 성장하고 안정되자 성 전 회장은 40세이던 1990년 4월 자신의 사재 31억원의 기부로 기금을 조성하여 재단법인 서산장학재단을 설립한다. 이후 성 전 회장은 단순 기업활동에서 벗어나 장학과 학술, 문화, 자선 사업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2000년 12월31일 충남 안면도에서 굴 조업 어선이 전복돼 어민 9명이 숨지자, 그날 밤 눈길을 뚫고 달려가 희생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위로했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로 고아가 된 엄수미 양 3남매 소식을 들었을 땐 대구로 가 3남매에게 대학까지의 학자금을 약속했다. 2007년 12월 태안 기름 유출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장학재단 회원들과 달려가 1주일간 기름 제거작업을 했고, 10억원의 성금을 내기도 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교육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2014년 12월10일 서산장학재단은 경남기업 소유의 베트남 하노이 랜드마크72빌딩에서 하노이국립인문사회과학, 하노이국립백화대학과 장학사업과 관련한 자매결연 협약을 맺었다. 서산장학재단은 베트남 교육발전과 인재육성을 위해 교류·협력을 추진하고 매년 50명의 베트남 장학생을 선발해 등록금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졸업 때까지 지원하기로 하였으며, 12월20일에는 623명에게 총 3억9000여만원을 지원하는 2014년도 장학금 전달식을 가졌다.

결국 이 같은 행보에 힘입어 김대중 정부에서 임기 마지막 달인 2003년 2월12일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결국 모친 유훈에 따라 장학재단을 설립한 성 전 회장의 서산장학재단은 2015년 성완종 이사장의 사망 시점까지 2만5000여 명에게 300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정치권 입문과 몰락

이같이 장학재단을 설립해 기업 외 활동을 이어오던 성 전 회장은 경남기업 인수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 감사, 법제처 정부입법자문위원, 주한 에티오피아 명예총영사 등을 맡았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다. 2003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특보단장을 맡으며 김종필 당시 총재를 보좌한 성 회장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원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선진통일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19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선거 초반 열세 전망을 뒤집고 42.6%를 득표해 2위인 새누리당 유상곤 후보를 1만2000여 표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이후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새누리당 소속이 됐다.

하지만 총선 전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지역주민을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되며 정치생명에 위기를 맞게 된다. 지난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서산 및 태안 지역주민에게 무료음악회를 열고, 충남자율방범연합회에 청소년 선도 지원금 명목으로 1000만 원을 기부한 것이 공직선거법 위반에 해당되어 기소되었다.

서산장학재단은 회원과 장학금 수혜자 3만여 명에게 탄원서 서명을 제출받아 1심 재판부인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에 전달했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대전고등법원 항소심 재판부는 서산장학재단이 그동안 충남방범연합회에 지급한 금품이 없었던 점을 들어 공직선거법에서 예외로 허용한 ‘정기적으로 지급한 행위’가 아니어서 유죄를 판시했다. 2014년 6월 26일 대법원 1부가 벌금 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여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 경남기업 회장으로 복귀한 성 전 회장은 경영에 집중했지만 재무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경남기업은 건설경기 위축에 따른 자금난으로 2013년 워크아웃을 신청하기도 했다. 이후 경남기업은 자산매각을 통해 자구책을 마련하려 했지만 1조원을 웃도는 차입금과 금융비용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올해 법정관리 절차가 개시됐다. 성 전 회장은 회사 지분과 경영권을 모두 내려놓겠다며 채권단에 법정관리만은 막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결국 거부당했다.

성 전 회장이 이명박 정부시절 추진된 해외자원개발에 발을 담근 것도 관급공사 위주의 사업구조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정·관계 로비를 통해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성 전 회장은 검찰 수사 선상에 올랐고 기자회견을 통해 “횡령한 사실이 없다. 왜 내가 자원외교의 표적이 됐는지 모르겠다”는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후 해외 자원개발을 둘러싼 검찰 수사가 부인 등 성 전 회장 일가 전체로 확산되자 이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한 서산의 아들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와 관련하여 비리 의혹에 연루되어 관련 수사를 받던 중 법원의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예정된 지난 4월9일 오전 유서를 쓰고 서울 청담동 자택을 나왔다. 그리고 <경향신문>에 박근혜 정부 인사들에게 대선 자금을 넘겨줬다는 일명 ‘성완종 리스트’를 고발하고, 리스트를 메모로 작성한 후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마지막 반격’은 죽은 후에 시작된 것이다.

kimstory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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