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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달빛정원’ 시리즈 작가 배동환 ‘27회 오지호상 수상’

탈이념화의 시대, 해체되어 무화된 주체들의 혼돈의 경계를 자유롭게 유목하는 배동환 작가의 예술세계

박정대 기자 | 기사입력 2019/12/12 [12:51]

 제26회 오지호상을 수상한 배동환 작가.  ©브레이크뉴스

제26회 오지호상은 ‘성지’, ‘달빛정원’ 시리즈로 알려진 배동환(1948~ )작가가 수상했다.  오지호미술상은 1992년 제1회 류경채를 시작으로 임직순, 이대원, 구자승, 서승원, 이태길 등 한국 화단을 이끌고 있는 대표 작가들이 수상했다.

 

작가 배동환의 대표작시리즈 중 하나인 ‘성지’는 돌이 거친 물살과 바람, 다른 돌들과 부딪히며 모난 부분이 둥글게 다듬어 지는 모양새, 비슷해 보이지만 하나도 같은 것이 없고, 저마다 다른 자세로 놓여져 있는 자갈의 형태를,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으로 은유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극사실주의(Hyper realism)로 재현했다. 

 

인간(자갈)이 모여 가족(자갈의 무리)을 이루고, 어딘가에 있을 안식처(성지)를 찾아 거친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간(자갈)의 평범한 모습들에서 신성함이 느껴진다.  이는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작품들이 보여주었던 평범한 이들의 노동의 신성함과 비견되며, 1970년대 한국화단을 이끌었던 비구상 중심의 단색화(Monochrome art)에 반대되는 극사실 회화의 차별화된 형식으로 단색화 운동에 동참되었고, 1980년대 일었던 심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의 의식을 그려낸 민중미술의 흐름을 앞서고 있다.    물감을 찍어 바르며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친 나이프를 사용하여 물감을 덜어내면서 그리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의 삶이 채워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덜어내면서 더 성숙하고 완성되어진다는 작가의 철학이 담겨 있다.

 

‘달빛정원’은 작가 배동환이 숲 속에 위치한 현 작업실로 안착한 이후부터 발표된 작품으로, 현 작업 환경의 영향에 따른 의식의 흐름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요한 밤의 정원에서 따스한 달빛을 마주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에 높이 떠있는 달의 달빛을 받은 바람과  나무, 자연과 조우하고 그 사이를 함께 있는 작가는 이미 자연의 일부로 흡수되었고 자신을 자연과 일체시켰다.  거침없고 자유로운 붓의 흐름은 사물의 형태와 의식의 흐름을 과감하게 동화시켰다.  그리고 덮고 지우고 긁어내며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는 그의 행위에는 한국화 특유의 수련적 태도가 담겨 있다.  배동환의 작품은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그냥 한국화다.  

 

작가 배동환의 다양하고 거침없는 그의 작품은 미술사적 정의를 탈피하고 형식과 형식의 간극, 그 어떤 형식에도 구속받지 않는 무형식의 경계에서 광활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탈이념화의 현상이 의식의 붕괴로 나타난 시대적 모호함은 결국 다양함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장 한국적인 우리 모습의 미술로 대표하고 있다.

 

자신 만의 독특한 미술 세계이자 우리 한국 미술을 향한 작가 배동환의 노력은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오지호미술상을 수상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진다. 

 

작가 배동환은 1974년 문화공보부장관상과 국무총리상을 비롯하여, 2014년 장리석상, 특히 1978년 최초의 민전인 한국일보 공모전에서 대상 수상을 게기로 프랑스 파리에서 하게 된 세계미술 레지던시 활동은 그가 최고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전기가 됐다.    

 

▲ 배동환 작품.     ©브레이크뉴스

 

광주광역시가 주최하고 광주예총이 주관하는 2019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 시상식은 2019년 12월 11일 광주광역시 라붐웨딩홀에서 진행됐다. 오지호미술상 외에 허백련미술상에 하성읍(본상), 김병균(특별상), 박용철문학상에 김동근, 김현승문학상에 고 박홍원, 정소파문학상에 이한성, 임방울국악상에 정상희를 시상했다. 다음은 2019년 양평군립미술관 지역 원로작가 아카이브 자료에 게재된 배동환 작가 인터뷰의 주요 내용이다.

 

-처음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벌교 출신으로 광주의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조대부고)를 나왔어요.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가 동창이죠.  어머니가 생산을 팔아 가난하게 살았던 저는 장학생으로 입학해 학업을 이어갔지만 당시 조대부고는 2개반만 영재반이고 나머지는 깡패 같은 아이들이 가득찬 학교였죠.

 

그러던 어느 날 미술실을 지나다가 난생처음 목탄 데생과 수채화를 보고 너무 황홀했어요.  마침 오승윤 선생님(1936~2006)이 저를 보시고 “수채화 처음 봐?” 하셨죠.  결국 저는 미술실에 들어가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처음 참가한 ‘혼합예술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했죠.  미술 실기장학생이 됐고 그때부터 공부는 담쌓고 그림에 빠졌죠.  서울대가 목표였지만 멘토셨던 선생님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대학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는데,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서라벌예술대학 마지막 공모에 밤 12시 서울행 기차를 타고 서류를 내고 다니게 됐죠.  7년간의 대학 생활 동안 안해 본 알바가 없을 정도로 밑바닥 인생을 체험했죠.

 

-1970년대 극사실적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으셨는데, 그 중 1974년 국전 문화공보부상을 받은 [어머니의 방]과 한국미술협회전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휴일의 방]의 작품 탄생의 과정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게 신형상주의는 신소재주의이기도 해요.  소재의 혁신이었죠.  젊은 날 느낀 좌절과 현실 속의 분노를 도시의 콘크리트와 맨홀 뚜껑, 신문지 구겨진 맨홀바닥, 도시의 어두운 구석 등의 소재를 통해 그려냈죠.  그 이전 국전 참여작들을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여인좌상이나 꽃 배경의 정물화, 풍경화 등이 휩쓸었죠.

 

[어머니의 방]은 물레를 돌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에요.  어머니가 물레를 받고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직접 모델을 서주셔서 작업을 잘 마칠 수 있었어요.  당시 항간에서는 “이 그림이 대통령상감인데 너무 신인에게 이런 작품이 나왔다”고 했죠.  한 외국인 평론가도 신문에 “중요 전시공모전을 봤는데 실제 최고 작품은 [어머니의 방]이었다”는 내용을 쓰기도 했죠.  대통령상은 정물화에게 돌아갔죠.

 

[휴일의 방]은 후배를 모델로 한 작품인데, 뒷배경인 흰 벽 위에 신문기사를 오일 칼라 위에 판화처럼 찍혀 있는 거였어요.  신형상주의 미술로서의 현대미술에 흥미를 느끼게 하는 단서가 되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죠.

 

-1978년 한국일보 공모 ‘한국미술대상전’ 대상을 수상하며 파리에서 레지던시 활동을 하셨는데, 이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파리에서 중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김창렬, 김기린, 함묵, 정상화, 향안여사 등과 친분을 쌓고 교류했죠.  38세이던 저는 에꼴보자르로부터 “나이가 들어서 안되겠다”는 입학을 허락받지 못했죠.  덕분에 여행을 주로 하면서 그간 흠모해왔던 서구미술을 마음껏 봤죠.  그러면서 오히려 그동안 촌스럽고 초라하다고 느껴왔던 내 것,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과 정체성을 자각하게 됐죠.  ‘내 것, 우리 것을 그려야 겠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죠.  작품 밑바닥엔 우리 것에 대한 정체성이 깔려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이 한창인 시기에 신형상주의 미술운동을 해오셨습니다.  이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광주에서 5.18이 터졌을 때 저는 그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큰 부채감과 배신자가 된 것 같은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어요.  이후 500호 사이즈 그림을 그려서 인사동의 민중미술 기획전에 참여하는 등 노력도 했지만, 제가 대학 교수라는 이유로 비제도권 친구들에게 “너는 민중미술 작가가 아니야”라며 회색분자 취급을 받았죠.  무지하게 마음이 아팠어요.  6월 항쟁 당시 부산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였는데 매일밤 가까운 부산 서면 로타리에 나가서 밤새 최루탄을 마시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작품에서 신형상주의라면 소재주의를 말할 수 있어요.  현실의 중앙이 아닌 아웃사이더로 외곽에 놓여있는 것들, 신문지나 돌바닥이나 맨홀 뚜껑 등을 그렸죠.  당시 제가 돌멩이로 유명해지자 화랑에서 매일 돌멩이만 그려달라고 했죠.  ‘돌멩이는 제 고뇌에 찬 제 인생의 결정체인데 이것이 상품화되는구나.  내가 장사를 하고 있구나!’ 하는 자책감으로 당시엔 돌멩이를 그리지 않았어요.  대신에 시골 장터를 돌아다니며 오래된 벽지를 사모으고 삼베 옷이나 천 등을 염색했죠.

 

당시 크게 호평받았던 미국 LA 아르코 전시에서 벽지 위에 드로잉을 하고 삼베를 염색해 드로잉하기도 하고 실크스크린 기법을 쓰면서 5.18희생자들이 묶여서 처형당하는 사진을 꼴라주하기도 했죠.  제가 거절했지만 산타모니카의 큰 화랑에서 초대전시 제안을 받기도 했죠.

 

-대표작품 중 고통 속에 피어나는 우리의 삶을 ‘자갈’로 표현한 [성지]시리즈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돌멩이는 제 삶에 존재하는 상징물이에요.  시인이건 소설가건 소재에 대한 자기화 과정이 필요해요.  돌밭에 텐트를 치고 살았어요.  맨발로 돌밭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그 속을 흐르는 물소리도 들어봤죠.  삐쭉 올라온 아버지 돌, 그걸 받치는 어머니 돌, 그 사이에 자잘하게 박힌 아들 딸 같은 돌들이 가족 단위로 보였어요.  또 누워서 보니 센 물살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처럼 돌멩이들이 한 방향으로 고개를 디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저는 돌멩이 소재로 성공했다고 한 소재만 고집하지 않았어요.  하나의 정체성이 확립되면 제 스스로 못 견디고 그 정체성을 깨뜨려요.  작가는 끊임없이 변모하면서 스스로 경계를 부수고 자유를 스스로 향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경계는 다 무녀졌어요.  앞으로도 제 작업이 더 다양해지길 바랍니다.

 

-최근 대상을 과감히 파괴하고, 생략하여 추상화시킨 작업들이 많으신데요.  작업 동기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 전시장 오프닝에 우연히 들어갔는데 그 여성작가가 평면 작품을 벽에 걸어놓고, 동료와 함께 누드로 등장하는 거에요.  그리고 관객들이 그 나뭇잎을 작가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덮는 퍼포먼스를 같이 하는 거에요.  지금은 다양성으로 가는 길목이기에 이런 다양성을 용인할 수 밖에 없죠.

 

-2000년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미디어아트에도 영향을 끼치셨는데, 활동을 시작하신 계기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한때 영상작업도 했어요.  요즘의 디지털 영상과는 다른, 상당히 시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영상이죠.  하지만 촌스러운 것이 시간이 흐르면 더 소중해지죠.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은 곧 정체되지 않는 것이죠.  이 그림이 2005년에 그린 [붉은강]이에요.  그런데 2009년에 다시 꺼내서 그리고, 다시 올해 꺼내 세 번째 그렸어요.  작가가 수천 개의 작업을 해도 작품을 다 기억해요.  하지만 걸리는 작품은 견딜 수가 없어요.  변화가 중요하지요.

 

-양평으로 이주하신 동기와 작업환경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서울에서 작업실을 20번 정도 옮겼어요.  작가들이 작업실을 옮기는 것은 일반인들의 이사와는 완전히 달라요.  캔버스며 작업하던 것들의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섣불리 이주가 힘들죠.  그런데 내가 꿈꾸는 자연 속에 작업실을 갖고 싶었어요.  결국 벼루고 벼루다가 양평으로 옮겨왔죠.  20년 거의 다 됐네요.  자연 속의 질서를 알게 됐죠.  달빛의 소중함도 알게 됐구요.  자연의 움직임 속에 질서가 있음을 알고, 또 따스한 햇볕과 달빛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씨앗을 뿌리고, 과일 나무를 심고 따기도 하고... [달빛정원]이란 작품도 그렇게 나왔어요.

 

-작가로서 살아간다는 것, 즉, ‘작가의 삶’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돌아보면 세기말은 안팎으로 대전환기였죠.  탈 이념화를 중심으로 디지털기반 정보화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서로 뒤섞이며 모든 사고의 다양성은 광범위해지고 복잡해지면서 개인과 사회를 하나의 개념으로 묶기가 어려워졌어요.  이러한 삶과 세계의 불완전함은 또한 개인의 삶을 해명하고 탐구하는 방법도 그 다양성으로 인해 모호해지죠.  결국 타자와의 끝없는 갈등 속에서 주체는 해체되어지고 주체와 타자와의 구분마저 무화된 상태로 남게 됩니다.  제게는 혼돈의 경계선이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폭넓은 회화세계를 펼쳐오셨는데,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뚜렷한 작업 방향을 펼치기보다 미완성인 채로 내버려두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그 변화 속에서 흥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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