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좌) 호무즈트 라쌈(1826~1910)이 1853년 발굴한 길가메시 점토판. (우)1854년 발굴한 아시리아 아슈르바니팔 시대에 제작된 실린더로 발굴자 라쌈 실린더로 명칭된 유물 (대영박물관 소장) 출처: 구글 © 이일영 칼럼니스트 |
호무즈트 라쌈(1826~1910)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대에 이라크 모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리스도 아시리아 교회 총대주교였다. 그가 스무 살이던 1846년 영국 고고학자이며 미술사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1817~1894)를 만났다.
오스만제국(터키)의 퍼드 캐닝 영국 대사와의 만남으로 고고학자가 되었던 헨리 레이어드(1817~1894)는 1845년부터 1847년까지 고대 아시리아의 주요 도시 니므루드에서 머물며 아시리아 왕국에 대한 방대한 탐사를 마치고 모든 기록을 뛰어난 재능의 기록화로 제작하였다.
호무즈트 라쌈은 1846년 레이어드 유적 발굴팀에 고용되어 탁월한 감각으로 유물 발굴을 도왔다. 명석한 두뇌에 특유의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친화력이 뛰어나 유물 발굴 작업에서 생겨나는 현지인과의 문제에서부터 다양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1848년 탐사를 마치고 레이어드가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라쌈을 데려가 옥스퍼드 대학 모들린 칼리지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당시 레이어드는 그간의 탐사 과정을 정리한 (고대 아시리아의 예술탐사)와 (니네베의 기념물)을 연속 출판하여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받았다. 당시 레이어드가 기록화로 남긴 자료들이 대영박물관의 고대 아시리아 문명에 대한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1849년 레이어드는 두 번째 탐사에 나서면서 라쌈이 동행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지대의 남부지역과 바빌론의 유적을 살폈다. 이때 고대 아시리아 왕국의 아슈르나시르팔 왕이 세운 인류 최초 점토 도서관 을 발굴한 것이다.
2차 탐사를 마친 후 레이어드는 정계에 진출하면서 라쌈을 대영박물관에 추천하였다. 이후 1851년 2월부터 수사 유적을 탐사한 지질학자이며 고고학자인 윌리엄 로프터스(1820~1858)가 수사 궁전 유적을 발견한 후 라쌈으로 교체되어 그가 6월부터 수사 유적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어 라쌈은 1853년 니네베로 이동하여 아슈르나시르팔 궁전 도서관 터에서 인류의 선구적인 문학작품으로 기록되는 영원한 생명의 땅을 소망한 서사시 (길가메시) 점토판을 발굴하였다.
이후 라삼은 영국에 돌아와 레이어드의 주선으로 중동의 아라비아반도 남서부에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오늘날 예멘 남부 항구 도시 아덴의 영국 영사관에서 근무하였다. 이곳 아덴은 홍해의 관문으로 식민지 인도를 통치하던 동인도 회사의 식민지로 영국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라삼은 아덴의 영국 영사관에 근무하며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일등 정무 상주직에 올랐다. 이와 같은 직책은 보편적인 영사업무가 아닌 외교관 신분으로 현지 지도 세력과 소통하는 정무직이었다. 이는 인도의 국가와 동인도 회사가 맺은 지류 동맹 또는 자회사 동맹으로 부르는 제도의 직책에서 생겨난 것이다.
본래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서 처음 시행한 제도로 인도 국가 통치자들이 자국의 거점에 동맹국 군대를 두어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어 이와 같은 업무를 소통하고 감독하는 직책에서 출발한 것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더욱더 발전적인 제도가 되었다.
1866년 라삼은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 황제가 영국 선교사들을 인질로 억류하는 사태를 맞아 빅토리아 여왕의 친서를 전달하는 대사로 파견되었다. 오랜 협상을 통하여 황제를 만났으나 자신마저 감금되는 사태를 맞아 1868년 영국군의 원정으로 2년 동안의 감금에서 풀려났다. 당시 영국에서 라삼에 대한 질책과 옹호의 여론이 팽배한 가운데 빅토리아 여왕은 특사로 파견되어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며 고초를 겪은 라삼에게 보상금을 하사하였다.
이후 라삼은 1877년 러시아가 터키에 전쟁을 선포하여 1878년까지 이어진 전쟁 동안 파견되어 터키를 비롯한 아나톨리아와 아르메니아 일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과 교회 상황을 살피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통하여 흥미로운 사실을 정리하고 가자. 라삼을 양성한 영국의 고고학자 헨리 레이어드(1817~1894)가 1842년 오스만제국(터키)의 영국 대사 스트래드 퍼드 캐닝(1786~1880) 대사를 만나 고고학자가 되었던 사실은 몇 번을 설명하였다. 1877년 헨리 레이어드가 오스만제국(터키)의 영국 대사로 부임하여 1880년까지 재직한 사실이다.
![]() ▲ (좌로부터) 스트래드퍼드 캐닝(Stratford Canning. 1786~1880).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Austen Henry Layard. 1817~1894). 호무즈트 라쌈(1826~1910). 출처: 구글 © 이일영 칼럼니스트 |
당시 오스만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지대 대부분을 통치하고 있었다. 레이어드가 오스만제국(터키)의 영국 대사로 부임한 이후 술탄과의 협상을 통하여 법령을 개정하여 영국의 유물 발굴단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라삼은 더욱더 활발한 유물 발굴 작업을 펼쳐 헤아릴 수 없는 역사적인 유물들을 연이어 발굴하였다.
대표적으로 1853년 니네베 아슈르나시르팔 궁전 도서관 터에서 발굴한 (길가메시 점토판)과 1879년 발굴한 아케메네스 제국의 창건자 키루스 대왕이 남긴 세계 최초 인권 선언문 (키루스 실린더)은 물론 성경에 느부갓네살 왕으로 기록된 신바빌로니아제국의 두 번째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전유적 발굴은 쾌거였다.
유물 발굴의 전설을 낳은 라삼이 명성만큼 숱한 음모와 폄훼의 시련을 받을 때마다 그를 최초로 헤아렸던 헨리 레이어드는 (라삼은 내가 아는 가장 정직한 동료이다, 그렇지만, 정직한 봉사가 바르게 인정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artwww@naver.com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