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에서 감합(勘合)이라고 하는 것은 조공국의 사신이 명나라에 입항할 때 관리가 나와 황제의 도장이 찍힌 문서를 말한다. 감합은 무역에 관한 상세 사항들이 적혀 있는 표찰로, 이를 반으로 나누어 정해진 양만큼 조공국들에게 나누어 준 뒤 일일이 맞추어 확인함으로서 사용했다. 이는 중국 명나라 당시 조공국들과 명나라 사이에서 행해졌던 동북아시아 지역의 가장 보편적인 공무역이자 조공무역의 일종이었다. 이와 같은 조공무역은 전통적인 중화사상에 따라 주변국들이 황제에게 종속의 표시로 공물을 바치고 그 반대급부로 회사품(回賜品)을 받는 무역으로 이는 외교적 의례 및 관례와 결합되었다. 명나라의 이같은 무역은 조선 및 여진 등과도 행했지만 주로 명나라와 일본 간의 무역을 의미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감합무역의 가장 큰 목적은 무역 그 자체에서의 이익 추구보다는 중국 측에서 주변의 민족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는 외교적 목적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조공무역은 상당한 경제적 이권과 연결되어 있었다. 본래의 종속적 의미보다는 중국의 풍부한 물자와 산물들을 이용하여 동북아시아 국가들과 민족들을 중화 중심의 체계로 그 질서를 확립시켰다. 이러한 무역에 이득이 엄청났기 때문에 상인들은 물론 해적들까지 조공을 위장하여 몰려들게 되었다. 그로 인해 감합과 같은 황제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절차로 자리잡게 된다. 감합은 각 나라마다 배부할 양이 정해져 있었고, 감합을 미리 발급하여 확인된 상인들만 공식적인 사행에 지참시켰다. 그리고 상인들의 진위를 확인하여 정체불명의 상인이나 해적들이 조공을 사칭하는 것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최초로 감합이 사용된 사례는 1383년 시암 왕국으로 알려진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의 사절단들에게 발급한 것이 기록으로 나타나 있다. 원래는 금속과 상아, 목재 등의 재료로 만든 표찰에 글자를 새긴 뒤, 양분하여 한 쪽은 보관하고 한 쪽은 상대방에 발급하는 형태였지만, 이후 문서화되어 원장에 등록하고 계인과 일련 번호까지 매겨 발급하는 방식으로 바꾸게 된다.
또한 명나라 황제들의 연호가 바뀔 때마다 주변국들에 새 감합을 보내고 옛 감합은 회수하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는데 감합은 조공 횟수와 국가, 선박의 숫자, 사신단 일행 등을 고려하여 발부되었다. 여기에는 선박과 인원, 화물의 수와 내왕기간, 입항지, 조공로 등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조선의 경우는 사행이나 무역 과정에서 왠만하면 감합을 발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일반 외교 문서만 서로 주고받았으며 동지사를 비롯, 명나라 황제의 생일에 대규모 상단이 함께 북경를 방문하여 교역을 허가해주는 등, 나름 자립적인 특혜를 줬다. 이런 감합무역은 명나라만 시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서도 통신부(通信符)라는 이름의 감합이 일시적으로 발급되기는 했다. 그 이유는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들을 상대로 한 관시(關市) 때문이었다. 토문강 지역의 여진족과 국경 지역에서 여진족의 약탈을 막고자 관시(關市)를 열었고 조선 나름대로의 감합을 발부했다. 조선에서 내린 감합은 보통 도서(圖書)와 서계(書契), 문인(文引) 등의 문서가 공식 사신의 확인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진족을 제외하고 조선은 일본이나 유구국에 대해 허용한 무역은 감합을 발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됐든 왜관에서 치뤄진 일본 및 유구국과의 교역은 감합을 발부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지 감합의 형식을 띈 비공식적 무역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경우, 무역을 외교의 부수적인 행위로 간주하면서 기타 사무역을 엄격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교역 상대는 일본의 막부는 물론, 거추(巨酋)라고 불리는 각 지방의 영주들과 대마도주 등의 일본인들과 여진족의 여러 부족들, 바다 건너 유구국, 가장 멀리 베트남의 레 왕조 정도였다. 감합무역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명나라와 일본의 사례를 들 수 있는데 1401년 명나라로부터 일본의 국왕으로 책봉되면서 교류를 시작한 아시카가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는 명나라에게 계속 청원하여 1404년에서야 감합 무역을 허가받게 된다. 본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는 무로마치 막부의 창건자로 명나라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는 역병이 돌아 일본 내의 사정이 좋지 않게 되자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천황의 연호였던 메이토쿠(明徳)를 바꾸게 된다.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주원장 홍무제(洪武帝)의 연호인 '홍무(洪武)'에서 한 글자인 '洪'을 일본의 연호로 삼자고 천황에게 주장했으나 다른 조정 신하들에게 '홍수(洪水)'를 연상시키는 단어라고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대신 바뀐 연호가 오에이(応永)로 일본 역사에서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가 확립되기 전에 가장 오래 사용한 연호가 된다. 당시 일본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명나라는 당시 일본의 정식 무역 대상을 북조나 막부 정권이 아니라 남조를 상대로 인정하고 있었던데다 천황을 일본의 왕으로 보고 쇼군과 막부 정권은 모두 천황의 신하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 아니라 왕의 신하를 무역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후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는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스스로 승려로 출가하여 천황의 신하 자격이 아니라 자유민의 입장으로 돌아가니 당시 명나라 황제인 건문제(建文帝)는 마침내 감합을 승인하게 된다.
명나라는 왜구를 단속한다는 조건으로 제한된 감합무역을 허가하게 되고 일본 조공 사절단은 명나라 해안도시 영파에서 물품 검사를 한 후 북경으로 가서 교역했다. 그 이익이 최소 4~5배에서 최대 20배에 달하는 이익을 누리면서 일본 내에서 감합무역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였던 요시미츠 시대의 종결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고, 1467년 오닌의 난(応仁の乱)까지 일어나 막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해져 전국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러면서 감합무역권은 오우치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 독점하게 된다. 1523년 오우치 가문이 명나라에 감합선을 파견하자 호소카와 가문도 감합선을 파견하였고, 오우치 측의 감합선이 먼저 도착하였으나 호소카와 측에서 명나라 관리에게 뇌물을 바쳐 먼저 입항검사를 받게 되었다. 이 사실에 분노한 오우치 측은 호소카와 측의 감합선을 불을 지른 다음 선원들과 명나라 관리를 살해하였고, 일부 인원이 명나라의 해안지방을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곳이 바로 영파의 난(寧波之亂)이다.
명나라 황제의 인장까지 위조해 가면서 가짜 서류까지 남발되자 명나라 황실과 조정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감합무역이 잠시 중단된다. 이후 1536년 오우치 가문에서 재개되었고 1551년 오우치 가문의 멸망 때까지 이어졌지만 영파의 난 이전보다는 확실히 제한된 거래물목과 환경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이득 또한 그리 높지 않았다. 감합무역이 재개됐지만 많은 부분에서 제한적인 거래 때문에 일본 상인들과 해적들은 중국 해적들과 밀무역을 했고 쌍서도의 왕직(王直)이 이를 주도했다. 그러나 밀무역이 적발되어 1559년 12월, 절강순무 호종헌에 의해 왕직이 체포되면서 왕직의 조직이 타도되었고 이에 따라 단속을 강화하면서 결국 명나라는 해금령을 내리게 된다. 이에 일본과 교역하던 명나라 상인들이 타격을 입게 되면서 상인들은 영파 인근의 해안지방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며 일본 상인들과 광범위한 밀무역을 벌이게 되었다. 이에 편승한 왜구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척계광에 의해 완전히 토벌될 때까지 북로남왜(北虜南倭)의 대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he Largest Public Trade in Northeast Asia, Ganhap Trade (勘合貿易)
- Columnist Jeong Gil-seon
In Northeast Asia, Ganhap (勘合) refers to a document that an official stamped with the emperor's seal when an envoy from a tributary country entered the Ming Dynasty. Ganhap was a label that contained detailed trade information, and it was used by dividing it in half and giving a set amount to the tributary countries, and then checking each one. This was the most common public trade and a type of tribute trade that took place in Northeast Asia between tributary countries and the Ming Dynasty during the Ming Dynasty of China. This kind of tribute trade was a trade in which neighboring countries paid tribute to the emperor as a sign of their subordination according to traditional Sinocentric ideology and received gifts in return, and it was combined with diplomatic etiquette and custom. This kind of trade by the Ming Dynasty was also conducted with Joseon and the Jurchen, but it is also a term that mainly refers to trade between the Ming Dynasty and Japan. The biggest purpose of this tribute trade was not the pursuit of profit in the trade itself, but rather the diplomatic purpose of China's effective control of the surrounding ethnic groups.
Tribute trade was linked to considerable economic interests. Rather than its original meaning of subordination, it established the order of the Northeast Asian countries and ethnic groups as a Sinocentric system by utilizing China's abundant materials and products. Since the profits from this trade were enormous, merchants and even pirates flocked to the country disguised as tribute. As a result, verifying documents with the emperor's seal, such as the gamhap, became a very important procedure. The amount of gamhap to be distributed to each country was set, and only merchants who had been confirmed by issuing gamhap in advance were allowed to bring it on official missions. In addition, by verifying the authenticity of the merchants, it was possible to prevent unidentified merchants or pirates from falsely claiming to pay tribute. The first recorded case of gamhap being used in this way was in 1383, when it was issued to a delegation from the Ayutthaya Kingdom in Thailand, known as the Kingdom of Siam. Originally, it was a form in which letters were engraved on a sign made of materials such as metal, ivory, and wood, then divided into two, one side was kept and the other side was issued to the other party, but later, it was changed to a method in which it was documented, registered in the ledger, and issued with a seal and serial number.
In addition, whenever the reigns of the Ming emperors changed, new gamhap were sent to neighboring countries, and old gamhap were collected. The gamhap was issued considering the number of tributes, the country, the number of ships, and the envoys. It included detailed regulations on the number of ships, personnel, cargo, period of travel, port of entry, and tribute route. However, it is said that Joseon did not issue gamhap during diplomatic missions or trade unless absolutely necessary. Instead, it only exchanged general diplomatic documents, and on the birthday of the Ming emperor, a large-scale merchant group visited Beijing together to permit trade, giving independent special privileges. This gamhap trade was not only practiced by the Ming. In Joseon, a gamhap called Tongsinbu (通信符) was temporarily issued. The reason was the Gwansi (關市) against the Jurchen people in the Hamgyeong Province region. In order to prevent the Jurchen people from plundering the border region and the Tumen River region, the Gwansi (關市) was opened and Joseon issued its own gamhap. The gamhap issued by Joseon was usually used as a confirmation letter for official envoys in the form of documents such as books (圖書), letters (書契), and letters (文引). However, except for the Jurchen people, Joseon did not issue gamhap for trade permitted to Japan or Ryukyu Kingdom. However, in any case, trade with Japan and Ryukyu Kingdom conducted at the Waegwan can be seen as unofficial trade in the form of gamhap, although it did not issue gamhap. In the case of Joseon, trade was regarded as a secondary act of diplomacy and other private trade was strictly controlled. Joseon's trading partners included the Japanese shogunate, the lords of each region called Geochu (巨酋), the Japanese such as the Tsushima lord, various tribes of the Jurchen people, the Ryukyu Kingdom across the sea, and the Le Dynasty of Vietnam at its furthest. A representative example of the gamhap trade is the case of the Ming Dynasty and Japan. Ashikaga Yoshimitsu (足利義満), the third shogun of the Ashikaga shogunate, who began trading after being crowned the king of Japan by the Ming Dynasty in 1401, continued to petition the Ming Dynasty and was finally granted permission for gamhap trade in 1404. Ashikaga Yoshimitsu (足利義満) was originally the founder of the Muromachi shogunate and was very favorable to the Ming Dynasty. When the situation in Japan became bad due to the outbreak of an epidemic, he changed the emperor's era name, Meitoku (明徳), in order to improve the atmosphere. At that time, the Ming Emperor Zhu Yuanzhang's era name, the Hongwu Emperor (洪武帝), suggested to the Emperor that the Japanese era name be based on a single character, "洪", but other court officials thought it reminded them of "洪水" (flood water), so it was not accepted. Instead, the new era name was Ōei (応永), which became the era name used for the longest time in Japanese history before the issei one yuan system was established. At that time, Japan was divided into the South and the North and were fighting a civil war. The Ming dynasty did not recognize the Northern Court or the shogunate as Japan's official trading partner, but rather the Southern Court. In addition, the Ming regarded the Emperor as the King of Japan, and both the shogun and the shogunate were considered vassals of the Emperor, so it refused on the grounds that "the King's vassal cannot be the trading partner, let alone the King." After that, Ashikaga Yoshimitsu (足利義満) gave up all power and became a monk himself, returning to the position of a free man rather than a subject of the emperor, and the Ming emperor at the time, Jianwen Emperor (建文帝), finally approved the kanji trade.
The Ming permitted limited kanji trade on the condition of cracking down on Japanese pirates, and the Japanese tribute delegation inspected goods in the coastal city of Ningbo and then went to Beijing to trade. As the profits were at least 4-5 times and up to 20 times, interest in kanji trade grew within Japan. However, after the end of the Yoshimitsu era, which was the heyday of the Muromachi shogunate, it began to decline, and the Ōnin War (応仁の乱) occurred in 1467, weakening the shogunate's control over the provinces and ushering in the Warring States period. As a result, the kanji trade rights came to be monopolized by the Ouchi and Hosokawa families. In 1523, when the Ouchi clan dispatched a gamhap ship to the Ming, the Hosokawa clan also dispatched a gamhap ship, and although the Ouchi clan's gamhap ship arrived first, the Hosokawa clan bribed the Ming officials to receive the port inspection first. The Ouchi clan, enraged by this fact, set fire to the Hosokawa clan's gamhap ship, killed the crew and the Ming officials, and some of the people plundered the coastal areas of the Ming. This was the Ningbo Rebellion.
They forged the seal of the Ming emperor and issued fake documents, which angered the Ming imperial family and court, and the gamhap trade was temporarily suspended. Afterwards, the Ouchi clan resumed the trade in 1536 and continued until the fall of the Ouchi clan in 1551, but since it was conducted in a more limited trade environment and with a more limited scope of goods than before the Ningbo Rebellion, the profits from it were not that great. Although the trade in the same area resumed, due to the limited trade in many areas, Japanese merchants and pirates engaged in smuggling with Chinese pirates, and Wang Zhi of Shuangxi Island led this. However, smuggling was discovered, and in December 1559, Wang Zhi was arrested by Zhejiang Governor Ho Zongxian, and Wang Zhi’s organization was overthrown. As a result, crackdowns were strengthened, and eventually the Ming Dynasty issued a ban on maritime trade. As a result, Ming merchants who had been trading with Japan suffered a blow, and the merchants expanded their activities to the coastal areas near Ningbo and engaged in extensive smuggling with Japanese merchants. The activities of the Japanese pirates who took advantage of this became active, and great chaos occurred in the Northern and Southern Wae (北虜南倭) until they were completely suppressed by Qi Jiguang. lukybaby7@gmail.com
*Author/ Jeong Gil-seon. Member of Novatopos, historian, paleoanthropologist, columnist, research professor at the Institute of Eurasian Paleoanthropology, Russian Academy of Sci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