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소설가 정종명씨, 문인협이사장 출마선언

출마의 변 "정직한 사람이 공정한 사회 만든다"

박정대기자 | 기사입력 2010/11/14 [11:26]
소설가 정종명씨는 지난 10월 16일 문인협회 이사장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출만선언에서 "정직한 사람이 공정한 사회를 만든다"고 강조했다. 문인협회 이사장 선거는 12월 중순부터 2011년 1월 20일까지 우편투표로 실시될 예정이다. 다음은 본지에 기고한 정명종씨의 글이다,


“품격 높은 문학지 만들고 싶었다 ”

▲ 정종명 작가    ©브레이크뉴스

나는 1978년 5월에 <현대문학> 편집부에 입사했다. 문학평론가 조연현 선생께서 주간을 맡으셨고, 작가 김국태 선생이 편집부장이었다. 1983년 5월까지 5년 동안 근무했다. 

1986년 6월에 미당 서정주 선생께서 발행한 <문학정신> 편집장으로 취임했다. 시인 김윤성 선생이 주간을 맡았다. 나중에 계산해 보니까 출근 48일 만에 <문학정신> 창간호를 발행했다. 나는 거기서 2년 6개월 동안 의욕적으로 문예지 편집에 전념했고 많은 경험을 체득했다.

대충 이런 전력을 인정받아, 2007년 2월, 나는 김년균 이사장의 부름을 받고 <월간문학> 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김년균 이사장과 나는 40년 지기이고, 평소 형제처럼 막역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김년균 이사장으로부터 “나는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 <월간문학> 편집은 편집국장이 책임을 져라.”는 엄중한 지시를 받았다. 

나는 2007년 4월호부터 2010년 10월호 현재까지 총 43권의 <월간문학>과 12권의 <계절문학>을 편집했다. 나는 평소에 <월간문학>이 한국문인협회 얼굴이라는 사실, 원로문인에서 신인회원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좋은 작품을 받아 실어야 한다는 점, 많은 문예지 가운데서 회원들이 작품을 꼭 싣고 싶은 품격 높은 문예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역점을 두고 나름대로 정성을 다했다. 그러한 생각과 태도는 <월간문학> 자매지인 <계절문학> 편집에서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월간문학>에 싣는 작품은 크게 청탁과 기고로 이루어진다. 청탁의 경우, 원로회원에서 신입회원까지 나름대로 발표의 기회 균등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리고 청탁과 관계없이 보내오는 기고 작품도 적지 않은 편인데, 일단 작품을 보내오면 나는 기고자가 예측할 수 있도록 게재 시기를 명시한 답메일이나 편지를 보내 주었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작품을 받고도 받았다는 연락 한 마디 없고, 게재될 때까지 부지하세월로 기다려야 하는 기고자의 초조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릴 줄 모르는 오만한 편집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월간문학> 편집자는 누리거나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마땅히 정성을 다해 회원들을 섬기는 자리여야 하며, 그러한 자세는 회원들에 대한 기본 예의이자, 편집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다. 

문협은 이제 1만1천 명 회원 시대로 접어들었다. 회원은 많고 지면은 태부족이다. <월간문학>과 <계절문학>으로는 많은 회원들의 작품을 수용하기가 힘겨운 처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간문학>과 <계절문학> 편집에 있어 필자 선정, 원고 청탁, 지면 배치 등, 김년균 이사장은 나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여 주었고, 덕분에 나는 편집 업무를 소신껏 수행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면이 워낙 태부족이라, 회원들의 작품을 한 편이라도 더 싣고 싶은 욕심을 접어야 하는 고충과 안타까움이었다. 원고 분량을 줄여 달라, 다른 작품으로 교체해 달라, 제목을 바꿔 달라, 적절한 시기에 다시 기고해 달라 등등, 편집자의 무례(?)한 요청을 너그럽게 수용해 주신 회원들에게도 물론 고마운 마음 끝이 없다. 그리고 메일이나 편지, 전화로 보여 주신 따뜻한 격려의 말씀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좀 운이 좋고 행복한 편집자였다고 회고할 수 있다. ‘정직한 사람이 아름답고 공정한 문협을 만든다’는 마음을 새겨, <월간문학> 500호 기념글로 남긴다

**작가연보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이사장 역임. 경기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우교수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현). 한국사이버대학교 방송문예창작학과 외래교수(현). 한국문학발전포럼 대표(현).한국문인협회 편집국장(현)

1945년 아버지 정봉수(鄭奉守), 어머니 박임득(朴任得) 사이에 3남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50년에 도계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으로 고향인 경북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 독점동으로 피난, 그곳에서 수식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는 겨울밤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같은 이야기책을 즐겨 읽어 주었다. 마을 사랑방에 방치된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우연히 읽고 생애 최초로 장차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의 불씨를 가슴에 지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60년 강원도 태백시로 이주했다. 태백중학교를 거쳐 1963년에 강릉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각종 백일장에서 입상 경력을 쌓았다. 『학원』에 작품을 투고해 싣고 전국의 여학생들로부터 편지 받는 재미에 빠져 대학 입시공부는 뒷전이었다. 국어는 수준급이었는데, 수학이 너무 어려웠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데모 주동자로 낙인 찍혀 퇴학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났다. 조기방학 중에 쓴 단편소설 「도주(逃走)」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주최한 전국고등학생 문예콩쿨대회에 당선의 영예를 차지했다. 이 작품은 1966년 3월 부산에서 펴낸 문예지 『문학시대』 창간호에 실려 있다.

1966년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장차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내 말에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지금도 기억한다. 󰡒다리 밑에 가 보면 거지들이 더러운 거적을 덮고 산다. 작가란 그런 거지들하고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어야 하는데, 너 그렇게 할 수 있느냐?󰡓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 특기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바로 위에 마종하 이동하 김형영 임영조 박건한 김정례 제씨들이 다녔고, 훗날 문단에 등단한 김년균 오정희 이경자 윤정모 이우선 장경호 이남진 김희원 제씨들은 동기생이다.

1971년 대학을 졸업했으나 취업이 어려워 낙향할 수밖에 없었는데, 󰡐재워 주고 먹여 준󰡑 김년균 형의 호의로 그의 자취방에 들어앉아 500장 넘는 중편소설을 썼다. 김년균 형은 재미도 없는 그 작품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읽어 주면서 󰡒소설 잘 쓴다. 작가 되겠다.󰡓 하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진짜 내가 소설 잘 쓰는 줄로 오해했다. 동년 4월에 월간 『스포오츠』 취재기자로 입사했다. 주간에 구자운 시인, 편집부장에 최범서 작가가 재직했고, 후에 작가로 등단한 황원갑, 이호일 씨가 함께 근무했다. 그 해 10월에 김원일 작가가 부장으로 재직하는 도서출판 국민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4년 6개월간 근무했다. 1974년 11월에 결혼했고, 이후 두 아들을 두었다.

1975년 유익서 이채형 황충상 등을 만나 소설습작 토론회를 만들었다. 만년 󰡐신춘문예 낙방생들󰡑이었는데, 나중에 이들 모두 작가로 등단했다. 1978년에 문예지 『현대문학』에 입사했다. 주간에 조연현 선생님, 편집부장에 김국태 작가가 재직했고, 감태준 시인이 함께 근무했다. 그 해 가을에 단편소설 「사자(死者)의 춤」이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79년 「떠돌이의 혼」 등을 발표했다.

1980년 이문열 이외수 윤후명 손영목 서동훈 유익서 김원우 김채원 유홍종 표성흠 등과 󰡐작가(作家)󰡑 동인을 결성하고 동인지 1집을 민음사에서 출간했다. 후에 강석경 김상렬 김인배 정소성 최학 황충상 등도 참여했다. 이 덕에 나도 덩달아 󰡐좀 쓰는 작가󰡑로 분에 넘치는 평가를 받았다. 1981년 단편소설 「건널목 뛰어넘기」 「고맙습니다」 「겨울 야화」 「회귀전말」 「추방」 「심판」과 중편소설 「우울한 희극」 등을 발표했다. 1983년 단편소설 「오월에서 사월까지」 「이명(耳鳴)」 등을 발표하고, 만 5년간 근무한 현대문학사를 떠나 문예지 『소설문학』으로 직장을 옮겼다. 1984년 중편소설 「탈춤」, 단편소설 「사설문담」 등을 발표했다.

1985년 동년 5월호부터 장편소설 「거인(巨人)」을 『소설문학』에 연재했다. 창작예술사에서 소설집 『오월에서 사월까지』를 출간했다. 제1회 동포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1986년 문예지 『문학정신(文學精神)』 편집장으로 부임했다. 이승훈 시인의 추천으로 장편소설 「거인(巨人)」을 「인간의 숲」으로 개제하여 고려원에서 출간했다. 1987년 3월 동아출판사에서 간행된 󰡐우리 시대 우리 작가󰡑 32권 문학전집 중 27권에 장편소설 「거인」이 수록되었다. 중편소설 「우울한 희극」을 고려원 소설 문고본으로 출간했다. 1988년에 소설집 『이명(耳鳴)』을 도서출판 동아에서 출간했다. 1989년에 전상국 작가의 추천으로 장편소설 「아들 나라」를 강원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월간태백』에 연재했다. 동년에 중편소설 「숨은 사랑」, 단편소설 「피아트 볼론따스 뚜아」 「서울은 천국이다」 등을 발표했다. 장편소설 「거인」이 mbc 미니시리즈 8부작으로 방영되었다.

1990년 중편소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 몽상가의 빗나간 운명론」 「빠른 바람은 소리로 남는다」 「아무도 죽지 않는다」 등을 발표했다. 장편소설 「아들 나라」가 세계일보 출판국에서 출간되었고, 이듬해 12월 영화로 만들어져 대한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이듬해에 중편소설 「그러나 사랑은 아름답다」 등을 발표했다. 1992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역사소설 「거물(巨物)」을 서울경제신문에 연재했다. 1993년 소설집 『숨은 사랑』을 동아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94년 11월부터 1995년 9월까지 대동일보에 역사소설 「제왕의 춤」을 연재했다.

1995년 7월에 역사소설 『신국(新國)』(전3권)을 문예산책에서 출간했다. 11월에 역사소설 『대상(大商)』(전2권)을 한국경제신문 출판국에서 출간했다. 1997년 단편소설 「의혹」에 이어 「빛과 그늘」 「내 사랑 내 곁에」, 중편소설 「꼭꼭 숨은 입」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1999년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영남일보에 장편소설 「욕망의 늪」을 연재했다. imf 시절인데, 월 300만원의 원고료를 받았다. 1999년 10월 소설집 『의혹』을 뿌리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동문회에서 주관하는 서라벌문학상을 수상했다.

2001년 3월부터 경기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출강, 2010년 2월까지 강사ㆍ겸임교수ㆍ대우교수를 거치면서 수필쓰기, 소설쓰기, 동화쓰기 등을 강의했다. 같은 기간에 롯데백화점 잠실점 mbc문화센터에서 소설쓰기를 강의했다. 2001년 12월 수필집 『사색의 강변에 마주 앉아』를 출간했다. 2002년 11월에 박양호 손영목 유만상 유익서 이채형 정동수 정성환 최학 황충상 등과 『소설마당』 1집을 출간했다. 2003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로 피선되었다.

2005년 1월에 국제펜클럽한국분부 부이사장에 피선되었다. 이사장에는 문효치 시인, 부이사장에는 김종상 아동문학가, 이수화 시인, 이길원 시인, 김학 수필가가 동반 당선되었다. 2005년 9월부터 현재까지 한국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부에서 소설작법을 강의하고 있다. 경기대학교에서는 우수강의자 표창을 받았고, 한국사이버대학교에서는 240개 과목 중 상위 10%권에 드는 우수 강의자로 평가받았다. 2006년 여름부터 1년간 수필전문지 『수필과 비평』 소속 창작아카데미에서 수필쓰기 지도강사로 출강했다. 2007년 2월 한국문인협회 편집국장으로 부임했고, 현재까지 『월간문학』 『계절문학』 등 편집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동화 「어른들은 모른다」를 발표했다. 2009년 장편소설 『올가미』를 출간했다.

2010년 1월에 한국소설가협회 이사로 피선되었다. 2001년 3월부터 9년간 강사ㆍ겸임교수ㆍ대우교수로 출강해 온 경기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강의를 2010년 2월 말로 마감했다. 현재 한국사이버대학교 방송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및 한국문인협회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8월에 다음 카페 한국문학발전포럼을 개설했다.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