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간 사진전의 제목으로 ‘色’, ‘空’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2010년엔 ‘충주천의 空’, 2011년엔 ‘충주천의 色’과 ‘미안마의 色’이라는 제하로 사진전을 열었다. 이번의 사진전 제목도 ‘쇠지울못의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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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에 둘러싸인 충주천의 요란한 낮의 풍경에서 色을 읽고 그 요란함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잠든 한 밤을 空으로 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오월이 되어 연못에 연 싹이 돋고 이것이 자라 줄기와 잎을 풍성하게 하고 꽃망울을 터트리고.....그러나 가을이 되어 싱싱하고 아름다웠던 연은 시들어 고개를 숙이고 영하 이십도가 넘는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는 연과 연못을 보면서 “色이 空으로 변화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영조 때 제작된 여지도서에 보면 쇠지울못의 둘레는 875척(약270미터)미터이고 수심은 3척(약 1미터)이라고 해요. 그런데 지금은 둘레가 100미터정도로 줄었지요. 새마을 사업 등으로 연못의 상류를 매립하고 논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예요. 일부 주민들에 의한 매립과 불법경작이 계속되어 연못을 계속 줄어들고 있고 제초제 등으로 오염되고 있어요. 이런 일이 속히 중단되어 충주시청의 정원 연못으로 남아 있으면 좋겠어요.”라며 환경운동가 다운 속내를 드러냈다.
전시는 오는 25(수)일부터 5월 1일까지 충주문화회관 1전시실에서 열리며 개막식날인 25일 오후 3시 30분에는 지역인사들을 모시고 개막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문의010-9486-6117)
쇠지울못에 대하여 충주시청 서쪽에 쇠지울못(金堤池)이 있다. 월악산에서 달려 온 산줄기가 계명산을 낳고 다시 서쪽으로 달려 팽구리산을 맺기 전에 쇠바우골을 만들었다. 쇠지울못은 이 쇠바우골에서 나온 샘물과 연못 100미터 위쪽 습지에서 솟은 물이 고여 것이다. 영조 33년(1757)~41년(1765)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金知洞堤 : 금지동제-현의 북쪽 5리로 북변면에 있다. 둘레는 875척이고 수심은 3척이다.”라는 기록이 현 쇠지울못으로 추정된다. 발원지에 폐갱이 있는 것을 보면 이곳도 오래 전부터 쇠를 캤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쇠를 치던 골짜기', ‘쇠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골짜기’에서 음과 뜻을 살려 ‘쇠지골(金知洞)’이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을까. 지금은 ‘쇠지울못’의 연원을 정확히 아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다만 1945년에 사시사철 펑펑펑 솟아나는 샘물 주변에 제방을 만들어 현재와 같은 연못이 되었다는 일부 증언이 있다. 또한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연못북쪽을 매립해 현재 논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재작년 겨울(2010.12)엔 누가 포크레인으로 연못북측의 바닥 흙을 퍼서 연못과 경계를 이루는 논둑을 넓게 만들었다. 봄이 되자 콩이 심어졌다. 재작년 어느 가을날 연못 동남쪽 제방에 있는 수십년 된 포플러 밑동 껍질이 돌려가며 벗겨졌다. 그 포플러 주변 제방엔 깨와 옥수수, 고구마가 심어졌다. 이런 일들을 누차 시청관계자들에게 말하며 연못을 잘 보호해 달라고 말했다. 역시 말은 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국민신문고’를 경유해 공문을 보냈다. 작년엔 ‘불법경작이 없다.’라는 답을 했다. 말라 죽어가는 포플러를 수술해 살려달라고 했더니 불가능하다는 답을 올 3월에 보내왔다. 반복된 공문에도 불구하고 ‘불법경작지를 확인하여 원상회복하겠다. 나무껍질을 벗긴 당사자를 찾아내 과태료처분을 했거나 법적인 조치를 했다.’는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내 집 소나무가 이런 일을 당했거나 우리 집 연못을 옆 집 아저씨가 메우고 깨를 심었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조선 영조이전부터 존재했던 쇠지울못(金知洞堤)과 함지(含珠堤), 호암지(蓮池)는 일제가 조선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없었던 연못을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다. 쇠바우를 뚫고 나온 쇠지울못, 옥구슬을 머금은 함지, 연꽃이 만발했던 호암지는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 때 태어난 샘물이다. 여기에 충주의 혼이 깃들어 있다. *忠州의 地誌(飜譯本), 충주시·충주대학교문화산업연구소, 101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