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울 부암동 산에서 역사천문학회 식구들과 칠석제를 시작한 해가 1998년이므로 오래되었는데, 이후로 칠석제에 관심을 갖는 단체들이 많이 생겨났다.
작년(2011년)에 문경에서 칠석제를 지내는 날 <칠석제의 국가사적 의미와 역사복원>이라는 제목으로 세미나에 참가했고, 재작년(2010년)에는 석정원 세미나에 <무교의 관점에서 본 서울을 대표하는 민족문화로서의 칠석제>라는 제목의 글을 써주기도 하였다.
2010년 8월 중순 경에 중국사회과학원에서 60대의 여성학자 한 분이 와서 한국의 칠석제에 대하여 물어서 자문을 해 주기도 하였다. 그분을 모시고 온 분의 말을 들으니, 중국이 칠석제를 국가지정문화제로 지정하기 위한 준비차 한국에 왔다는 것이었다.
서문의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1998년 역사천문학회가 삼각산에서 지낸 첫 칠석제
칠석제七夕祭는 칠석 날 제사지낸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 온 칠석제는 견우와 직녀에게 제를 올리는 칠석제였고, 이 칠석제가 민가에서 세시풍속으로 자리 잡은 칠석제였다. 그러므로 칠석제에서 중요한 것은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지냈다는 대목이다. 통상 소원을 빌기 위해서 사직이나 조상에게 지내는 제례를 제사라 하였다.
견우와 직녀라는 이름이 보이는 기록은 첫째가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별이름으로 기록된 견우와 직녀이다. 견우는 북방현무칠수北方玄武七宿에 속한 별들이고 직녀는 자미원紫微垣에 속한 별들이다. 견우가 직녀를 만나려면 은하수를 건너가야만 한다. 견우가 은하수를 건너가서 직녀를 만나는 날이 칠월칠석이다. 
선유도 칠석제 직녀 신주궤 개문례
다음에 견우와 직녀라는 이름이 보이는 기록은 덕흥리 고분(북한 남포시 강서구역 소재) 에 그린 <견우직녀도>에 나타나는 견우와 직녀이다. 이 그림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와 직녀가 이별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견우직녀설화>가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덕흥리고분 견우직녀이별도>의 모티브가 됨을 알 수 있다.
<荊楚歲時記-형주와 초의 세시풍속의 기록>에는 견우직녀가 7월7일 만나는 밤(7月7日爲牽牛織女聚會之夜)이라고 하였다. 초는 웅역熊繹의 후예로 기성己姓을 가진 동이족이다. 산동반도에 기성己姓의 나라 모국牟國이 있었다.
모국이란 소가 우는 나라라는 뜻이다. 牟자의 머리에 앉은 사厶자가 기己자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牟자의 의미는 기성을 가진 내가 소를 끌고 가기 때문에 소가 울어서 울음소리가 난다고 한 것이다. 덕흥리 고분에 그려진 몸집이 염소만한 소는 그런 사연을 담고 있는 소이다. 
모국의 역사가 반영된 북방현무칠수 견우직녀도
기성己姓은 우리 역사에서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桓因天帝의 직계 후손이다. 단국시대檀國時代에 홍제洪帝로부터 소성蘇姓을 사성賜姓하여 소성이 되었다. 소蘇자는 조선朝鮮을 구성하는 어족魚族이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소성이 되었다고 해석이 되는 문자이다. 어족을 예濊라 하였고, 농사를 짓는 소성족을 예穢라 하였다. 만주滿洲나 몽골蒙骨 쪽에서 사냥을 하는 맥족貊族을 예獩라 하였다. 소는 맥족이 야생소를 잡아서 길들여 예족濊族에서 예족穢族이 된 소성에게 넘겨준 가축家畜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수렵시대에서 농경시대로 넘어가는 우리 조상의 역사가 牟자에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牟자는 내가 소를 끌고 간다는 의미가 있는 문자이므로 견우牽牛로 볼 수 있는 문자이다. 결국 견우가 기성족己姓族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기성족이 소성이 되었으므로 소성에는 소(牛)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모국에는 이런 신비스러운 역사가 있다.
모국의 소성족을 래이족萊夷族이라 하는데, 래이족은 춘추전국시대에 제齊의 공격을 받고 한반도로 피난하였다. 이들이 상륙한 곳이 지금의 소래포구蘇萊浦口이다. 소래란 소성을 가진 래이족이라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에 모국의 소성족이 한반도로 들어왔음을 인증하는 문자가 래이라는 문자이다.
소래에서 부천으로 넘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소래산蘇萊山은 이들이 정착한 산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이 소래산에 붙은 성주산聖主山을 넘어서 넓은 평야에 지금의 부천富川이 된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을 세웠다. 우체모타국의 牟는 모국을 뜻한다. 탁涿은 모국인의 조상이 탁록涿鹿에서 왔음을 나타내는 문자이다.
우리가 칠석제를 기려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 우리의 모국역사와 우체모탁국의 역사와 탁록(청구靑邱)의 역사를 계승하기 위해서이다.
중국인의 조상인 화이華夷는 견우를 견우라 하지 않고 우랑牛郞이라 하였다. 우랑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때는 서한西漢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한 초기에 장안에서 우랑과 직녀의 애정신화가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西漢初的長安牛郞織女的愛情神話開始生成)고 하였다. 이때 우랑이라는 말을 썼던 점으로 보아서 견우라는 말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우랑이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 쓸 수 없었을까? 서한에서 견우직녀설화가 시작되었다고 하기 전에 이미 견우직녀설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史記 天官書>에, 직녀를 천손녀天孫女라 하였다. 
칠석제를 지낸 공민왕과 왕후 영정. 종묘의 공민왕사당에 모셔져 있다.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지낸 기록이 고려 <고려사>권 38 공민왕조에 있다. 공민왕 2년 7월(음력)에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내정에서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지냈다고 했던 것이다.(壬申 七夕 王與公主祭牽牛織女于內庭) 왕이 평민에게 제사지냈을 리가 없으므로 모국왕인 견우에게 제사지냈다고 보면 견우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국의 역사는 대조영大祚榮이 동모산에서 건국한 발해국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동모산東牟山이 만주에 있지 않고 산동반도에 있기 때문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나 역사에서 발해국의 건국지를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이라 했는데, 성산자산성은 연길시延吉市 동쪽으로 약 10km 떨어져 있는데, 그곳은 연길시와 도문시图们市가 만나는 곳이다. 대조영이 이곳에서 건국하면서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고 했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동모산은 지금도 산동반도에 있고 성산자산성을 동모산이라 하지 않는다. 이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왜 공민왕이 왕후인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단 두 분이 칠석제를 지냈는지 그 속내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칠석제를 돈 없이 하려하니 제대로 갖추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있는 것이라곤 칠석제 대본 하나뿐이다. 그날 종묘 앞에 모이는 노인들을 상대로 칠석제를 지내야 하는데, 엉터리라는 말을 듣기가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대본 하나만은 믿어도 좋을 것이다.





















